사람을 키우는 것에 관하여 (8)

모임이나 조직에 익숙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사람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그 모임에서 많이 쓰는 jargon에 익숙하게 된다거나, 그 문화에 편하게 되는 사람이 많이 만들어 지는 것은 오히려 그 조직이나 모임이 프로그램을 우상화하고 있다는 위험한 sign일 수 있다.

사람이 키워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의 내용 자체가 담긴 보따리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 놓을 때 이루어 진다.

복음의 가치는 결국,
그 사람을 키워내는 리더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겨져서 그 다음 사람/세대에게 전달된다.

프로그램은 자주 그 인격적 관계를 제한시킨다. 혹은 인격적 관계를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만든다.
이때 리더는 결코 우상화 되어서는 안된다.
끊임 없이, 리더를 뛰어넘도록 encourage 되어야 한다.
신앙의 기준이 그 리더에 의해 정해져버리면 그 리더가 하나님을 가리게 된다.

리더는 그저 밟고 더 성장하는 디딤돌임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원이 아닌, 사람이 길러진다.

사람을 키우는 것에 관하여 (6)

나는,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게 느낀다.

물론 어떤 특정한 단체나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형의 인재를 만들기 위해 복음의 어떤 특정 분야를 많이 강조할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 연구, 독서, 찬양, 기도, 봉사 등등) 그리고 때로는 어떤 방법론을 더 많이 강조할수도 있겠다. (귀납법적 성경연구, 일대일 제자양육, 소그룹 모임, 노방전도 등등)

그러나 그것에만 매몰되어서, 마치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마치면 사람이 키워진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혹은 그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수도 있다.
오히려 그럼 프로그램들은, 사람을 그 프로그램 이상으로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단체에 가면, 유난히 그 단체의 리더를 우상화하고 그 사람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심지어는 그 리더가 어떤 특정 용어를 잘 못 발음하면, 그 잘못된 발음까지도 따라한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버릴것만 같다.

훌륭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섬기는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어떤 사람을 모방하는 일은 때로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모두가 어떤 사람에 주목해서 그 사람을 추종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의 수준까지 밖에는 자라지 못한다.

나는 프로그램이나 리더를 우상화하는 공동체나 단체나 교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기간 성장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도 결코 그 프로그램이나 리더가 처음 의도했던 건강한 spirit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키워지지 않아서 리더십 이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두가 함께 프로그램/리더와 함께 늙어버리게 된다.

나는 이런것이 모두 무용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를 어떤 일정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데에는 이런 방법이 어느정도 먹힌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가 길러지지 않는다.

사람을 키우는 것에 관하여 (5)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을 키우는 시도를 하면, 나를 따르는 일부 매니아 가운데에서, 다음의 몇가지 안타까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첫번째는, 나를 개인적으로/인간적으로 좋아하지만 내가 경험한 복음의 풍성함에 대한 목마름은 없는 경우이다.
내가 해주는 복음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하는데, 막상 내가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뜨거운 열망이 없다.

두번째는, 나를 imitate 하려고 하다가 상처를 받는 경우이다.
나와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 나를 imitate 하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으니 오히려 깊이 절망하는 경우이다.
혹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 없이 그저 종교적인 선배로서 나를 대하다보니 처음에 약간 imitate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으니 그냥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경우이다.

세번째는, 아무리 설명하고 노력해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심지어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기도 하는데, 막상 내가 설명해주고 가르쳐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면 자기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 물론… 내가 사람을 키우는 시도를 하다보면 정말 대다수는, 뭐 나를 ‘스승’이나 ‘선배’로 여기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

Upcoming Topics

다음 몇가지 토픽을 이 블로그에서 다룰 예정이다 – 허락 된다면 : 그렇지만 subject to change 🙂

– 사랑: 금년 코스타 주제 관련해서

– 사람을 키우는 일에 관해서 : 내 개인적 결심과 소망

– 영적 고독: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경험하는 외로움

– 평신도 해먹기 어렵다

– 새 직장 update (어쩌면 A 회사랑 G 회사 비교도 쪼금)

혹시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 추천도 받습니다. – 독자와 소통하는 목수의 졸개 🙂

reciprocity

내가 어떤 일을 할때,
상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

혹은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을때,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황금률이 과연 그런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상호주의(reciprocity)는,
상대의 반응에 대한 기대가 중요한 key인 반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

예수님의 황금률은,
나의 행동이 중요한 key인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하면 내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런의미에서,
황금률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key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My Favorite Movie

한때,
무진장 영화음악들을 좋아해서 그걸 ‘테이프’에 녹음해서 ‘워크맨’에 넣고 늘어질때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FM radio에서 ‘영화음악’만을 들려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었고, 그걸 듣고 있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그론 했었다.

몇년전,
민우가 일본 만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Japan town에 민우를 데리고 갔었다.
민우가 한참 ‘나루토’ 만화책을 고르고 있는 중에 나는 혼자서 그 책방을 돌아다니다가 ‘Howl’s Moving Castle’이라는 영화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그냥 무심코 넘기는데 완전 재미있어 보였다! ㅎㅎ

그후,
그 Netflix를 통해서 그 만화영화를 실제로 보고는, 난 완전 빠졌다.
Netflix에서 그때 한시적으로 그 만화를 streaming으로 풀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마 10번 이상 봤을 거다.

특히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참 좋았다.
그래서 그 음악만을 따로 youtube에서 수십번을 더 들었다.
나는 결국 그 영화를 download 받았다! 내가 직접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download 받은건 이게 여태까지도 유일하다.

그 후에,
그걸 내 ipad에 넣어놓고, 출장을 갈때마다 그걸 참 많이 보았다.
여태껏 그 영화를 수십번은 봤을 거다.

최근 며칠,
일이 많은데다 피곤해서 회사에서 커피를 많이 마시다보니 밤에 침대에 누워 잠이 잘 오질 않을 때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Howl’s moving castle을 보다가 Sophie가 Howl 하고 하늘을 걸어다니는 장면쯤 되면 스스륵 잠이 들어버린다.
아마 그때 나오는 그 음악이 내 마음을 많이 편한하게 해주는 모양이다

분석적 성경공부, 통합적 성경공부

돌아오는 주일부터,
교회에서 6주짜리 ‘성경공부’ 반을 하나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복음서를 공부하는 방법을 함께 배워보자는 것인데,
현재 생각으로는 내가 약간 강의를 하고, 함께 본문을 보면서 관찰-해석-적용을 하는 workshop을 하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공부한 본문을 가지고 내가 설교를 한번 하는 방식으로 해볼까 생각중이다.

나는,
분석적/귀납법적 성경연구가 주는 유익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깊이있게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훈련을 잘 받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귀납법적 성경연구가 누구에게나 다 work하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은 그걸 아무리 강조하고 훈련을 시켜도 그게 ‘자기 것’으로 자리잡기 전에 포기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이 글을 읽는 방식이 ‘분석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실 글을 읽는 방식 뿐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분석적이지 않다.
분석적인 사고를 제대로 하려면,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training을 받아야 하는데,
사실 주변에서 보는 ‘공학박사’들도 놀랍게 그렇게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는 것을 많이 보곤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향상 분석적 사고가 그냥 많이 어려운 듯 하다.

대신 그런 사람들은 통합적 사고를 잘 하는 강점이 있는데, 분석적이지 못한 통합적 사고는 자칫 엉뚱한 성경해석과 적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사실 내가 들을 수 있는 한국 설교의 80% 이상은 이런 잘못을 범한다.)

그런 이들에게,
통합적인 사고 자체를 아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성경해석/적용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실 지난 몇년간 여러가지 생각과 고민을 해왔었다.

성경 연구 방법을 training할때,
마치 전자공학 입문 과목을 가르치는 것 같이, 그 이론적 structure를 잘 equip해주고 그것을 적용하라도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마치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같이, 함께 넓은 풀장에 가서, 약간의 instruction을 주고, 함께 물 속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유용할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물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분석적으로 성경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뛰어난 수영 강사가 되려면 몸의 근육등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필요한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모든이가 그런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고, 어떤 이들은 그냥 물에 떠서 즐기는 것으로 충분할수도 있지는 않을까 싶다.

물론 6주 동안, 주일에 한시간씩 하는 것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제대로 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분석적 성경읽기 방법이 가져다주는 ‘중압갑’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엉뚱한 성경해석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수는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뭐 적어도 내 바람은 그렇다. ^^

전문성 vs. 자질

새 회사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서 일하고 있는 product가 4~5개 된다.
그중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많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워낙 많은 product를 만드는일을 아주 적은 사람의 사람들이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만들고 있는 product가 워낙 신기한(?) 것들이어서,
이것을 위해 개발되어있는 재료나 process 같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내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인데도,
내가 ‘전문가’가 되어서 문제를 급히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의 task들을 해 내는데 꽤 근사하게 일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A 회사에 있었던 1년의 기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직장에서는 모두 이런 식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전문가 코스프레를 해야만하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대충 전문가가 되어버리는.

나는,
어떤 조직 등에서 사람을 뽑을때,
어떤 사람이 가진 specialty를 보고 뽑는 것 보다,
그 사람이 가진 ‘자질’을 보고 뽑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질에는,
분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훈련)
새로운 challenge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
creative하게 생각하고 접근하는 자세와 능력,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의지
등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이것은,
회사와 같은 이익조직 뿐 아니라,
non-profit organization에도 적용되고,
심지어는 교회의 리더십이나 기독운동의 일꾼들을 세우는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아, 물론 교회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질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포함되겠지만)

오랜 동역자의 외로운 싸움

어제는 참 오랜만에 보는 한 동역자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
나름대로 미국에서 함께 30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벌써 한국에 간것이 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스턴에 있었고, 그 형제는 뉴헤이븐에 있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막상 함께 만나는 곳은 늘 코스타였다. ^^

사역을 위해서 만났어도,
만나서는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 나라, 성경, 신앙,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많이 외롭다고 느끼고 있을때,
그렇게 함께 만나서 섬기며 토론하고 논쟁하고 배울 수 있었던 fellowship은,
내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어제 교회에서 했던 것은 아주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 나눔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에서 너무 혼자서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참 가치있다고 생각도 되고,
그걸 참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정말 허허벌판에서 혼자서 창 하나 들고 대군과 맞장뜨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누가 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악의에 찬 공격들을 받아가며 힘들어할때 그것을 함께 견디도록 힘을 주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찌 그 동역자만 그렇겠나.

사실 젊은 시절에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기도하며 토론하며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흩어져서 다들 외롭고 힘들게 버텨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예수 믿는 다는건 다 그렇게 외로워야 하는 걸까.

우리 우교수님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