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ear’s Resolution (5)

그리고 생각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할 것 같다.

귀에서 이어폰을 떼고,
뭔가를 계속 배우겠다는 내가 가진 일종의 집착을 어느정도 포기해야할것 같기도 하다.
운전을 할때도 뭔가를 듣기보다 뭔가를 생각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려고 해보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생각을 위한 건강한 재료들이 계속 공급되기는 해야할 것 같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성경을 조금 더 제대로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익숙하지 않는 내용을 독서등으로 배우는 것을 조금 더 시도해야할것 같다.



그래서,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본 올해의 결심.

생각좀 하고 살자. 그러기 위해서 조금 더 빠릿빠릿하게 살고, 생각의 여유를 두고, 생각의 재료를 섭취하자.

….

별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한번 해보는 거지 뭐.

New Year’s Resolution (4)

예년과같이 생각도 좀 하고 반성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런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작년 연말을 보내고…
그래서 이런 반성을 좀 해본다.

생각좀 하면서 살자.

그래서 이것이 내 새해 결심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우선, 생각을 할 여유를 좀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조금 더 빠릿빠릿하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을 살짝 질질 끌면서 하는 때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자꾸만 쫓겨서 일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바빠져서 생각할 여유를 많이 잃어버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첫번째 action item은 조금 더 빠릿빠릿하게 살자.
이건 멍하니 생산적이지 못한 것으로 시간 보내는 것을 줄이는 것을 의미할것이고,
쫓겨서 살기보다는 조금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할 것 같다.
하다못해 운동도 좀 열심히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 누워서 전화보는 일 같은거 하지 말고…

New Year’s Resolution (3)

문제가 있다.
올해에는 작년과 같이 그렇게 분명한 결심이랄까 목표를 아직 세우지 못했다.

지난 연말에 참 오랜만에 잘 쉬었다.
마음껏 자고, 마음껏 쉬고, 대단히 게으르게 보냈다.
이런 휴식이 내게 그래도 조금 필요하긴 했던 거구나…

한동안 이렇게 쉬면 자연스럽게 생각도 좀 하게되고 그러다보면 작년을 돌아보고 금년 계획을 세우는 것이 되곤 하는데…
금년엔 그냥 완전히 다 shut down!

허어… 이것 참.
이거 당황스럽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아니 왜 이렇게 아무 생각을 못하겠는 거지?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그렇게 좀 생각할 여유가 없이 살았던 거다. -.-;
생각할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계속 뺑뺑 돌면서 생각을 하지 못했고,
생각의 흐름 자체를 잃어번채, 지쳐있는 채로 한해를 마무리했던 것 같다.

새해에 이건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New Year’s Resolution (2)

작년에 내 새해 결심은 조금 더 열심히 살자… 뭐 그런거였다.
그렇게 결심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이미 얻게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나누며 살고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는 재작년 연말에 달란트 비유를 가만히 곱씹어보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많았다.

우선 내겐 시간이 있었다.
나는 비교적 여러 일로 바쁘게 살고 있는 편이긴 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시간을 내가 쪼개서 쓸 수 있는 유연성(flexibility)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낮에 일을 다 하지 못하면 밤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덜 급한 것들은 테트리스를 하듯이 빈 공간을 잘 채워넣으며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내게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겐 여러 경로로 얻어진 지식이 있었다.
이건 내 전문분야의 지식도 있고, 내가 따로 공부해서 얻게된 다른 지식들도 있다.
기독교 관련 지식도 있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skill이랄까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그 지식들을 충분히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겐 제안적이지만 일종의 안정(stability)라는 것이 있었다.
이건 내 자신도 늘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불안정하면 나도 불안정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대단히 부유하다고 볼수는 없지만 그래도 쪼들리며 사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인 안정도 약간은 있다.
적어도 이 안정이 주어져있는 이 시간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더 힘을 내어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온라인으로 성경공부와 기독교 관련 공부를 조금 더 해보자는 것이었다.
혹시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절하지 말고, 또 그런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여러가지를 제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이 52주 이니까, 적어도 그 절반인 26주정도는 한주에 90분정도씩 시간을 쓰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작년에 대충 따져보니까 90분짜리 세션으로 계산하면 거의 70세션정도를 했던 것 같다.
작년에는 목표를 추과달성(?)한 셈이다.

New Year’s Resolution (1)

새해 결심이라는걸 하는게 어떤땐 매우 의미있을 때도 있었고, 어떤땐 별 의미 없었을 때도 있었다.

새해 결심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대개 다음중 최소한 한가지를 포함한 경우였다.

(1) 나의 매우 고질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할때
가령 나 같은 people pleaser는 다른사람의 기대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한다. 그래서 무리를 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는 거의 4~5년 이상 매우… 올해에는 사람들의 기대를 맞추면서 사는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었고, 거의 매년 큰 진전없이 그해가 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2)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때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줄여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영 잘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내가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박사과정이 잘 풀리질 않았고 그래서 일종의 도피처로서 컴퓨터 게임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했어야하는 결심은 컴퓨터게임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자 가 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3) 결심의 내용이 모호할때
기도를 열심히 하자… 운동을 잘 하자… 뭐 이런 종류의 결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거나 흐지부지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도를 열심히 하자는 결심은 어떻게 결심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겠다는 내용이 빈약했다.
매일 몇시에 몇시간 기도를 하겠다 뭐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니까 그 결심을 지속적으로 체크하면서 지켜나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백인들은 두려워하는 걸까? (7)

나는 facebook이나 twitter 같은걸 별로 열심히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 대통령선거 시즌에 황무지가 되어있는 내 어카운트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좀 보았다. 당연히 내가 facebook이나 twitter connection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런데 그곳에는 역시 증오와 조롱이 넘쳐났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 상황을 이용하는 나쁜 정치가들/리더들은 그렇게 증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그러니 트럼프라도 좀 지지해야겠어…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증오와 조롱을 쏟아붇기도 하고, 그나마 좀 점잖은 사람들은 거기서 도덕교육을 시전하는 거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이런 함정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사람들의 꽤 절실한 절규에대해 도덕적잣대로 판단하며 도덕교사를 자청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트럼프를 그렇게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는 누군가는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black lives matter, feminism등등의 ageda에 대부분 동의하고, political correctness도 중요하다고 보고 (decency 라고 Biden이 표현하고 있는)
그러나 Biden정부가 그 목소리를 잘 들어서 정책에 반영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기독교가 이런 속에서 많이 더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야기한 두려움에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필요한것은 도덕교사의 훈계가 아니다.
좌절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며 공감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정치적 세력화로 더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정권을 잡도록 하는 정치운동도 다가 아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절망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절규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기독교가 무슨 얘기를 해줄수 있느냐고 물으면…
혹시 이 글을 읽는 몇 안되는 기독교인들은 나름대로의 답이 있는가?

백인들은 두려워하는 걸까? (6)

두려워서 그 출구로 혐오를 택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와 도덕적 당위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

이들이 표현하는 혐오는, 우월감에서 나오는 혐오가 아니라, 나도 죽겠다고 외치는 외침이 아닐까 하는 거다.

적어도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논리와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도덕교육을 시키는 것이 해법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그 외침의 근원에 있는 문제는 도덕교육이 부족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두려워하는 걸까? (5)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며 나선 백인들중에는 정말 용서하거나 용납하기 어려운 아주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모든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이 정말 있다고 본다.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정말 벼랑끝까지 밀려서,
소위 자신의 경쟁력이 딸려서 생존이 어렵다고 느껴져서,
많은 두려움과, 이렇게까지 밀려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래서 비이성적으로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 비과학적 무대뽀 주장 등을 일종의 위안과 위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두려운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주도의 세상도 두렵고,
밀려드는 빠릿빠릿한 이민자들도 두려운 것이다.
어떻게 생존할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지 않는 것 같이 느끼니 그저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이럴때 증오, 혐오라는 창구라도 찾아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게 칭찬하고 잘한 일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어떤 백인들에게 있어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자신의 우월감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두려움의 분출구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백인들은 두려워하는 걸까? (2)

어느 주일에, 라승찬 교수 (Soong-Chan Rah)가 그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
참 좋은 설교라고 생각했다. 세계 기독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그 설교에서 한 이야기중 한가지가 그곳에 있던 백인들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지금 세계교회는 급격하고 바뀌고 있다. 서구교회는 축소되고 있는 반면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조만간 기독교의 중심은 서구가 아니라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로 옮겨가게 될수도 있다. 그렇게 될때 백인들은, 비백인(non-white)의 리더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

내가 듣기엔 매우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러웠고, 라승찬 교수가 이야기한 tone이 그렇게 공격적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 참 맞는 얘기구나… 정말 세상이 변하고 있구나…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그 교회 백인중 꽤 많은 사람들은 그걸 대단히 불편하게 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다음주에 담임목사님이 설교 전에, ‘지난주의 설교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느낀 사람들’에 대해 calm down하는 이야기를 따로 언급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나는 라승찬 교수의 설교가 충격적이지는 않았는데,
그것을 듣는, 매우 건강하다고 여겨지던 교회의 다수 백인들의 반응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 이 사람들은 비백인의 리더십을 존중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구나…

그러부터 거의 15~20년이 지난 지금은 아마 그 교회의 백인들도 조금 다르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교회의 데모그라피도 많이 바뀌기도 했고.
이제는 거기 부목사들중에 비백인들도 많고, 한국인도 있으니까.

백인들은 두려워하는 걸까? (1)

내가 보스턴에서 다녔던 교회는 Lexington이라는 곳에 있었다.
Lexington은 주로 전문직에 있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백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그 교회는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임 목사였던 분은 미국 전체 intervarsity 대표를 했고, 아주 훌륭한 설교가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신학은 건강했고, 교회도 역시 참 건강하고 성숙된 교회였다.

그 후임으로 오신 담임목사도 역시 참 좋은 분이다. (지금도 그분이 그곳의 senior pastor로 계신다.)
담임목사 뿐 아니라 함께 섬기는 pastoral staff들도 참 좋은 분들이 많았고, 좋은 평신도 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대충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이라고 할까…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구성원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나 같은 한국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냥 백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꽤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Lexington이라는 동네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보스턴 지역의 크리스찬의 데모그라피가 그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