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30대의 목소리 (2)

지금 20대, 30대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참 어렵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들이 너무 작기 때문에 그렇다.
잘 들어보면 그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닌데,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 목소리는 대개…
“살려주세요”
라고 들린다.
(한국도 미국도 모두 그렇다. 미국보다는 한국이 더 심하지만.)

그래서 나는 20대와 30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너희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것은 그냥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50이 되어서, 지금의 20대가 그런 세상에 살게된 것에는 내 세대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잘 여겨지지 않는다.
나도, 우리 세대도, 그저 살아남으려고 바둥거리며 30, 40대를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가 그저 살아남으려고 바둥거리기만 했기 때문에, 지금의 20대와 30대가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세상이 만들어진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20대와 30대에게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다.
내 전 세대로부터 받은 마지막 resource를 우리 세대에서 그냥 다 소비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20대, 30대의 목소리 (1)

요즘 돌이켜보면서는, 과연 80년대 후반 대학생들이 정말 그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던가 하는 것에 살짝 회의가 있긴 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학진학률은 25% 수준이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서 20대의 목소리는 넘쳐났다.
20대가 거시담론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목소리를 내겠다는 패기가 넘쳐났다.
결국 20대의 그 패기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한국도 그렇지만 내가 바라본 80년대와 90년대 미국의 20~30대도 대단히 역동적이었다.
이들을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좀 약했다고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은 사람들이다.
Bill Gates, Steve Jobs, Larry Page 등등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Barrack Obama를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은 정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를 디자인해내는 일에 이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선수로 참여했다.

그런데…
지금 20대와 30대가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20대와 30대의 목소리가 정말 들리고 있는 건가?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5)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식 연설을 들으며 나는 막 울었다.
그 가치가 나를 울렸다.

웬만한 기독교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잘 울지 않는다.
그저 대부분 가치가 아닌 이익에 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인이라는게 참 많이 부끄럽다.

나는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독교는 부끄러워한다. 기독교의 많은 목사들은 부끄러워한다. 그들이 하는 설교들이 부끄럽다.
그것들은 그저 그들의 이익만을 변호하는 토착왜구당의 장외집회 연설과 그 근본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에 다니고 싶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4)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해결해주는 방식은 계속해서 기독교를 이익지향적인 모습에 가두어버린다.
사람들의 요구라는게 결국 대부분 이익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혹은 조금 더 작은 scale에서 어떤 지역교회나 어떤 공동체가 이익지향적인 모습으로부터 가치지향적인 모습으로 지향을 바꾸려면,
어떤 의미에서는 bottom-up의 felt need를 채우는 일이나, 당장 급해보이는 목회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등의 priority를 많이 낮추어야 한다.
대신, top-down 의 ‘케리그마’를 바로 세우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 세상의 주인이시다.
예수가 주(Lord)가 되신다는 것은 내 개인의 의견의 영역에 해당하는 선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가 되신다는 선언이 정치적이된다…. 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선언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직히 기독교 안에서 그런 케리그마가 바로 세워질 소망이 그리 크게 보이질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는 기독교 안에서는 그렇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3)

갑자기 뜬금이 없지만,
흔히 교회에서 사람들이 소위 ‘기도제목’을 나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들을 잘 모아보라.
그러면 그 ‘기도제목’이라는 것들이 다… 그저 이익추구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거기서 갑자기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이야기하면, 갑분싸가 되어버린다.

현대 기독교는,
grass-root level에서 보았을때 완전히 이익추구집단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가치지향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되비지만 공공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는 목에 핏대를 세워 반대한다.
공공에 불이익이 되더라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밀어붙인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오래된 행적을 들으며 여전히 감동하고,
노회찬의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와 같은 연설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지도 못한다.

노무현이나 노회찬은 가치지향적이었지만,
현대 기독교는 이익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2)

지금 가치추구를 하는 쪽의 정치적 견해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좀 답답하긴 하지만 암담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특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서 뻘짓을 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집단이 빨리 정화되어서, 좀 제대로된 논리를 펴는 가치추구 집단으로 변화되거나 대치되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가 부딛혔을때, 이익추구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가치추구를 이기기가 쉽지 않다. (양쪽의 힘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왜냐하면 가치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에 자신을 던지지만,
이익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그 이익을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적어도 한동안 가치추구 집단이 이익추구집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가치추구와 이익추구의 싸움 (1)

지난 토요일,
한국에서 방송된 518 기념식을 youtube로 몇번이나 다시 보았다.
나도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런데 그 기념식 전후로,
어떤 정치집단은 또 완전 이상한 소리들을 해댄다.

나는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과,
이익을 추구하는 일단의 정치집단이 맞붙어있다고 본다.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은, 그 가치를 위해서 젊은 시절에 고문도 당하고, 감옥도 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은, 젊은 시절부터 그저 이익/출세/성공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어떤 가치로 포장하려고 노력을 하긴 하는데,
영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삑싸리를 낸다.

지금 집권세력이라고 해서 모두다 고매한 가치를 가지고 있겠느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큰 흐름으로 봐선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5)

지금 이렇게 쓰는 이야기는,
사실 블로그를 하고 있는 내게도 매우 큰 고민거리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독자들만 이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들어오신다.

가끔 개인적인 통로나 이 블로그의 댓글등을 통해서 내게 전달되어오는 feedback들은 그냥 다 positive한 것 일색이다.

그게 어디 블로그 뿐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내 주장, 내가 하는 가치판단들…
이것들에 대해 건강한 반론을 듣는 일은 정말 아주 드물다.

아, 물론 아주 무논리의 억지주장으로 내게 악악하는 사람들을 만날때가 없지는 않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내 약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audience에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가끔 이 블로그에 쓰는 대로, 내가 갖고 있는 ‘외로움’은 바로 그런 고민과 맥이 닿아있는 듯 하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4)

그러면 이렇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버려 논리의 왜곡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가가 되었던 종교지도자가 되었던…
그 사람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자기확신으로 인한 확신편향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이 문제를 다루어낼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된다고 본다.

두번째로는,
건강한 비판을 계속 듣는 통로를 열어두어야 한다.
자신에게 하는 긍정적인 반응은 10분의 1로 축소시켜서 들으려 하고, 자신에게 하는 비판적인 반응을 10배로 확대시켜서 들어려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아니,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이 얘기를 했더니 은혜를 받더라고…
이건 그 얘기를 계속해도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해야 한다.

예전에 A 목사님이라는 분과 어떤 사역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분은 매우 말씀을 잘 하시고, 옳은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이셔서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과 함께 사역을 하던 일단의 사람들이 그분이 하시는 어떤 말씀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A 목사님은 그 문제에 대해 내 말이 맞는데 왜그래 하시며 계속 반발만 하셨다.
그 목사님과 그 문제로 대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분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으시고, 아주 꼿꼿하게 내가 맞다는 입장을 유지하셨다.
그분과는 대화가 참 어려웠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 뒤,
그 목사님께서 다른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내가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그때 막 facebook을 시작하셨을 때였다.
그분은…
내가 설교를 할때는 사람들이 다 아멘만 하니, 내가 다 옳은줄만 알았다.
그런데 facebook이라는 광장으로 나가보니, 내게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따라다니며 조목조목 따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늘 옳은줄만 알았는데 그런게 아니더라.

나는 facebook을 잘 하지 않지만,
가끔 한번씩 들어가면 그분의 포스팅을 볼때가 있다.
그분은 연세가 더 드셨지만, 그분이 젊었을때보다 훨씬 더 열려있으시고, 유연하시다.

정치인들이 되었건, 목사님들이 되었건,
나는 이 A 목사님과 같은 경험들을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3)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서 그 audience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치가는, 그 목사님은, 점점 그 환경 속에서 ‘뽕’을 맞게 된다.
자기가 이야기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줄 아는 거다.
그래서 더 독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게을러지기도 하고, 더 논리가 무너지게 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든, 무슨 무논리의 막밀이든,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 하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종교적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헌신한 그 종교적 가치에 동의한다는 차원에서 동의하지 않는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앞에서 내가 글을 쓰긴 했지만,
요즘 종교가 되어버린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어떤 정치가가 막말을 하거나 논리가 부족한 말을 하더라도,
그저 내 진영의 사람이니까 하고 그 사람의 엉뚱한 소리에 박수를 치고 열광을 한다.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그럼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