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 (1)

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차는, 11년된 Civic 이다. 
현재 150,000 마일에 육박하도록 타고 있다.
7년전 4만마일, 4년된 중고차를 사서 그동안 참 잘 썼다.

차가 좀 낡아서, 소음이 좀 크기도 하고, 가령 햇볕 가리개 (Sun visor) 같은 곳의 천이 삭아서 너덜거리기도 하고… 페인트가 벗겨지는 곳도 좀 있고…
CD player도, cassette player도 다 안나오고…
이제는 정말 오래된 차라는 느낌이 확 나긴 하지만,
그래도 꽤 잘 달린다. ^^ (차 본연의 임무에는 아주 충실한놈이다!)
매일 1시간 20분정도 운전하는데 보내는 나로서는, 참 좋은 벗이 되어주고 있다.

문제는,
이 차를 보는 주변 사람들이 다들 난리라는데 있다. -.-;
우리 가족들이 다들… 이제 그거 그만타라고 난리다.
낡아서 안전이 염려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사실 이 차는 기계적으로는 참 상태가 좋다.
제때 제때 정기 점검도 잘 받고, 나름대로 관리도 잘 한 탓에…
비록 낡은 티가 좀 나긴 하지만 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쓰고 있다. 

하도 주변에서 성화여서,
정말 이 차를 팔고 다른 차를 사야하나..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이어서 씀)

자신을 극복해내기

사람들이, 자신을 극복해내기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자주 접한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런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중 하나이다. ^^)

그런데,
너무나도 자주,
자신이 이미 익숙한 것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게으름을 극복해보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치자.
그리고는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평소에 하던 말씀묵상도 더 열심히 하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뭔가 자신이 하던 모든 것들을 더 ‘열심히’ 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극복해야하는 모습이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이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공급받아야만 나아질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앞의 예를 들어 다시 말하자면,
이미 자신이 하던 일들 – 말씀 묵상이 되었건, 기도가 되었건 – 을 더 열심히 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라던가,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혹은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한 어떤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해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extra nos 의 개념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다.

깨어진 세상 속에서의 바른 원칙?

지금 나는,
Silicon Valley 에서는 거의 minimum wage에 가까운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닌데, 가령, 이 돈을 모아서 이 동네에서 집을 산다거나 아이를 키우면서 여유롭게 어디 여행도 즐기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 

우리 manager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manager가 이렇게 내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 우리 그룹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느냐, 얼마나 중요한 contribution을 받느냐 하는 기준에 따라 사람들이 월급을 받고 있지 않고 있다. 나는 그게 정말 심하게 거슬린다.
(우리 manager는 매우 공명심이랄까… 그런게 많은 사람이다. 전혀 Christian은 아니고… 그렇지만 아주 마음이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불의를 보면 씩씩거리면서 분노할줄도 알고.ㅎㅎ)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또 이어갔다.

우리 회사가 지금 이 고비를 좀 넘기고 나면, 당장 네 월급부터 ‘현실화’ 하면 좋겠다.
어떤 의미에서 너는 지금 exploited 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말에 참 감사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깨어진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도 내가 일하는 만큼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함께 고생해서 만드는 우리 회사가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면,
나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공정하게 보상을 받는 회사가 되도록 하고 싶다.
회사의 높은 사람이 천문학적인 돈은 받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낮은 임금으로 부리고, 심지어는 회사에서 해고하면서 보너스를 챙겨가는 식의 구조가 아닌 정말 공정한 구조를 만들면 좋겠다. 나는 나 혼자서 조금 더 돈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지금 일하고 있는 거다.

우리 manager는 이렇게 답했다.

네 말에 정말 공감한다. 네 말이 맞긴 하지만, 네가 믿고 있는 원칙을, 어려울때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 잘 되었을때’ 그것을 지킨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공정하지 못한 것을, ‘장래에’ 이루려고하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이 아니겠냐.

우리 manager와의 그 대화는, 나로 하여금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한편,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appreciate 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고…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내가 그냥 받아들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래의 이루어질지 모르는 약속을 위해, 현재의 가치를 compromise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한, 내 괜한 고집스러움으로… 아내와 우리 가족이 괜히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엉터리 아빠

지난 주말,
민우가 Math Olympics에 나갔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다.

그냥 ‘동네’ Math Olympics 이므로,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

작년에 나름대로 학교 대표로 나갔는데,
아무런 상도 타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민우가 실망하지 않도록 격려해주고 하는 일을 꽤 열심히 했었는데… 
올해 또 학교 대표로 참석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냥 꽤 시큰둥 했었다. 

괜히 민우가 상 못타고 맘 상하는건 아닐지.

그런데,
내 예상(?)을 뒤엎고 민우가 상을 받았다.
민우는 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자기는 수학이 제일 재미있다는둥, 수학 문제 풀때 즐겁다는둥…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잘조잘 수다가 터졌다. ^^

민우가 별로 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을 하지 못했던 터라,
나는 특별히 카메라를 준비해 가지도 않았는데…
앞에 나가서 상을 받을때, 사진은 뭔가 하나 찍어줘야 겠고… 해서.
그냥 내 전화 카메라로 간단하게 하나 찍어 줬다. 

다른 부모들은,
이런거 나가면 집에서 준비도 시키고… 미리 훈련도 시킨다던데…
쩝… 나는 맨날 민우랑 집에서 장난만 치고…
이런거 있을때 카메라 하나 준비해가지도 못하고. -.-;

민우는 작년 Math Olympics에 참석할때 받았던 이름표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금년 이름표를 가만히 잘 챙기더니, 함께 보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민우는 이걸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로서,
뭔가 해야할 일을 잘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뭔가 좀 더 나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어…
지난 주일 오후엔, 민우랑 함께 수학 문제를 함께 풀고 설명을 좀 해 주었다.

영…엉터리 아빠다… 쩝. 

원칙과 변화

다급해지거나 위기에 처하면,
혹은 변화가 생기거나 예상치못한 상황에 닥치면,
지키고자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 제대로 드러나기 나름이다.

내가 지키고자하는 원칙이 정말 무엇인지 하는 것을…
제대로 보고싶은 욕심(?)이 생긴다. ㅎㅎ

오늘 부터,
회사일과 관련해서,
중요한 event가 앞으로 한달동안 진행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내 이익을 취하지 않기,
사람을 순간의 이익보다 중요하기 여기기,
거짓말하지 않기

등의…
유치원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대로 지키고 싶다. 

미숙함과 하나님의 인도

가끔,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슴 철렁하도록 미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20대 후반에,
도대체 무슨 신앙과 삶과 세상에 insight가 있다고…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인냥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을 기억한다.

shallow한 passion과 더 shallow한 지식으로,
쉽게 모든 것을 재단하려고 했던 것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만일,
그때 내 생각이 정말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속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어휴… 정말 가슴 철렁한 일이다.

매 순간의 고민과 생각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 미숙함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자 인도하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10년, 20년 후에는,
지금 내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회상해볼 수 있기를 정말 바란다.

무능함

무능함이 죄가 될 수 있을까?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무능함이 어떻게 죄란 말인가.

그런데,
내 삶을 돌이켜보면, (가정, 직장, 인간관계, 섬기는 일들…)
무능함을 죄로 여기는 경우를 흔히 경험한다.

가령,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심각하게 무능하다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그 사람은 심하게 위축되어 있고, 그래서 더더욱 일을 더 잘 못한다.
그 사람이 일을 잘 못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겪는다.
주위의 사람들이 일을 더 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일을 다 해내지 못해 함께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으로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큰 해가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더더욱 무능함의 늪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가기만 한다. 그럴 수록 주변 사람들의 고통은 더더욱 심해지기만 하고.

자,
이럴때, 이 사람의 무능함이 죄일까?
이 사람의 무능함이 죄가 아니라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서 스스로 움추리는 그 자세는 죄일까?
혹은, 주변 사람들의 자신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 sensitive하지 못한 것은 죄일까?
그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의 positioning이 죄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무능함을 함께 억울하게(?) 짊어져야 하는… 어그러진 세상을 비난해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무능함을 죄로 여기는 것이 죄일까?

한가지 예를 그냥 들었지만,
인간 관계 속에서, 친구 사이에서, 직장에서, 기독교 단체에서도,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이런 일들은 있다.

그리고,
좀 더 큰 scale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을 사회적으로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그 가난한 이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인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인지 하는 debate을 해볼수도 있겠다.

물론,
무능함은 죄가 아니다.
무능한 이들은, 유능한 사람들이 손을 잡아 일으켜 함께 가야하는 이웃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으면….
무능함이 마치 죄인것 같이 생각되게 되었단 말인가!!!

이웃, 또 다른 우리.

사랑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을 어떻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자기 희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내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 가치 등등을 생각할때,
사랑 = 자기희생 으로 거의 등식화 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꽤 잘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다. ^^

그렇지만, 사랑을 자기 희생이라고만 생각할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는 사랑은 설명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해서 많은 것을 해주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그 사랑의 본질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대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그래서 버려야하는 욕심이라고만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던지는 것 (헌신) 이외에도,
그분을 원하고,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싶어하고,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하나님에게 나와 함께 있어달라고 매달리는 그런 것이 내게 정말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내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민우와의 관계에서도,
부모님, 동생, 가족, 친구,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내가 사랑하는 가치, 내가 사랑하는 모임 등등에서 모두.

지금 이 나이 정도면,
인생의 절반은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고 있는 듯 하다.
 

Over-Communication

나는,
한 말을 또 하는 것, 들은 이야기를 또 듣는 것을 참 잘 참지 못한다.

한참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붙들고, 이미 알고 있는/듣고 있는 이야기를 5분씩 장황하게 할때면…
어휴… 정말 복창이 터진다.
(대개는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그런 대화를 끝내는 시간을 시계로 정확하게 잰다. -.- 어휴… 이번엔 자그마치 6분 42초나 걸렸네!!! 이런 식이다.)

내가 이런 short-temper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
나는 내가 한 말을 또 하는 것도 극도로 조심하는 성향이 있다.
한번 이야기하는 것을 또 한번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하여 큰 실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내가 한번 이야기한 것을, 상대가 다 이해하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할 경우에는,
크게 당황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그거 3주 전에 전화로 다 이야기했고, 두주전 이메일로 한번 더 나눈건데, 기억 못하세요? “
 
그런데…
그렇게 over-communication을 피하고자하는 내 의도에는,

1. 내가 연관된 대화 /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화의 내용은 상대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선
2. 나와 같은 관심사 / 생각의 시작점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대하여 배려하지 않음
3.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일의 효율성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랑없음

등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위하여, 나와 함께 하는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한편으로는 효율적인 communication을 위하여^^)
over-communication을 더 많이 생활화 하는 것이 필요한 듯 하다.

기쁨과 사람

어떤 사람을 보면서 기쁜 것은,
그 사람이 가져다주는 유익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을 그저 사랑하기 때문일까?

(나는, 지난 주말… 참으로 기뻤다. ㅎㅎ)

첫번째 사진은,
우리 부모님께서 손주 (민호)를 stroller에 태우고 산책을 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 

두번째 사진은,
지난주말, 뉴욕에서 몇몇의 간사들과 함께 했던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