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복음을 향한 갈망

은혜는 복음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favor라는 개념은, 사실 복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복음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 기도에 대한 열정, 그리고 구령의 열정 등으로 나타나고 표현된다.
그리고 복음을 향한 갈망은 은혜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깊으면 깊을 수록, 복음을 더 깊이 알고 싶은 갈망도 깊어진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비롯되는 복음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러부터 비롯되는 구령의 열정을 가지게될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은혜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은혜를 깊이 인식한다.
→ 하나님을 더 깊이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깊어지고, 그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어 오고 싶은 열심이 생긴다.
→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 그런 사람들에 비해, 일종의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다.
→ 그래서 복음을 전할때, 은혜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나처럼 해봐 는 식의… 은혜가 빠진 공로주의적 접근이 되게된다.

말씀 사역자들, 성경공부 리더들, spiritual leader들이,
은혜를 망각한채, 다른 이들에게 대해 ‘영적 우월감’을 갖게되면,
결국은 전해야하는 message 자체가 오염되고 그들이 인도되는 곳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종교가 된다.

나 자신을 보면서,
요즘 내가 바로 이 함정에 깊이 빠져있음을 발견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⑦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15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

나는, ‘캘빈주의자’라고 나를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깊이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참 좋아한다. – 특히 청교도신학을 참 좋아한다.

예수님을 믿는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결국 그 복음 message의 내용에 내가 동의하고, 믿겠다고 이야기하는 결정일까.

음… 사실 한동안 그렇게 많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믿게되는 과정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내 안에 믿음을 주시게 된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다보면 정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성적으로 이해도 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동의도 되는데, 막상 ‘저 안에 정말 생명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요즘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그 선물을 받는 것에대한 강조를 거의 하지 않은채,
프로그램으로 신자들을 찍어낸다거나,
너무 쉽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것이다’라는 선동으로 사람들을 이끌거나,
아니면 그저 종교적 흥분 / 감정적 흥분을 고취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이제는 교회를 오래다녔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게 된다.
심지어는 목사님이나 나이 오래드신 사역자들에게서도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이런 분들은, 그 안에 생명이 없으므로, 그저 프로그램 / 종교성/ 사회운동 등으로 자신과 교회를 drive할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나게되어,
목사님들, 사역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들을 꿈꾸어 본다.
종교적 감흥이나 의지적 헌신이 아니라, 정말 그 영혼 안에 생명이 들어가는 그런 회심말이다.

정말 내 말이…

요즘 사사기 말씀 묵상이 참 좋다.
사람들의 한계와,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대비가 정말 명확하게 보인다.
그러던중, 인터넷에서 설교 하나를 들었다.

http://2014.namseoul.org/vod/embed.php?num=56514

다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깊이 있는 울림이 있는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찰’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아… 정말 그렇다.
우리는 늘, 하나님, 이것 공급해주시면 제가 더 잘 믿을 수 있는데요… 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야박하게도, 그냥 말씀만을 자꾸만 주신다.
그리고 결국 현찰을 우리가 벌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런데,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찰을 주는 하나님 보다는, 말씀을 주는 하나님이 훨씬 더 좋다.
정말, 그런 하나님이 훨씬 더 좋다.

묵상과 생각의 타래를 이어가던중에,
전혀 다른 곳에서 ‘정말, 내 말이…’ 라고 느끼는 confirmation을 받을때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