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역자의 외로운 싸움

어제는 참 오랜만에 보는 한 동역자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
나름대로 미국에서 함께 30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벌써 한국에 간것이 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스턴에 있었고, 그 형제는 뉴헤이븐에 있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막상 함께 만나는 곳은 늘 코스타였다. ^^

사역을 위해서 만났어도,
만나서는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 나라, 성경, 신앙,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많이 외롭다고 느끼고 있을때,
그렇게 함께 만나서 섬기며 토론하고 논쟁하고 배울 수 있었던 fellowship은,
내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어제 교회에서 했던 것은 아주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 나눔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에서 너무 혼자서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참 가치있다고 생각도 되고,
그걸 참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정말 허허벌판에서 혼자서 창 하나 들고 대군과 맞장뜨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누가 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악의에 찬 공격들을 받아가며 힘들어할때 그것을 함께 견디도록 힘을 주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찌 그 동역자만 그렇겠나.

사실 젊은 시절에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기도하며 토론하며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흩어져서 다들 외롭고 힘들게 버텨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예수 믿는 다는건 다 그렇게 외로워야 하는 걸까.

우리 우교수님의 건투를 빈다.

잘난 사람들?

새로운 회사에 와서 보니, 정말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회사에서 자주 보는 어떤 허름한 아저씨가 있어서 그냥 친절하게 인사하면서 지냈는데,
오늘 알고보니.. Stanford 공학박사에다가, UCSF에서 의학박사(MD)를 받았다.
그리곤 완전 유명한 회사들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가 여기 와 있다.

어떤 hardware engineer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인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Stanford 심장외과 교수에다가 Stanford 의대 무슨 director 그런거 하다가 여기 왔단다.
이 사람은 MIT에서 전자공학 석사하고, Stanford 의대 나오고, Harvard 의대에서 전문의 하고, Harvard에서 뭐 석사 하나를 더 했다.

Harvard 의대 꽤 유명한 스타 교수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고, (이 사람 이야기는 신문에도 났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Yale에서 MD 받고 Harvard에서 석사한것 말고 다른 박사는 더 없는 것 같다 ㅋㅋ

또, 어떤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 꽤 똘똘하다 했더니 벌써 회사를 두개나 차려서 CEO를 했던 경험이 있고,
(물론 그거 잘 안되었으니 여기 와 있겠지만)

University of Washington의 tenured professor 였는데 그거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고,

Google VP 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대학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서 일해왔던 사람도 있고,

중국에서 2류쯤 되는 학교 학부만 졸업하고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별로 유명하지 않는 대학원을 다니다가 학위를 마치지 못한채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뭐 물론 다들 ‘잘난’ 사람들이겠으나, (그리고 실제로 얘기해보면 참 잘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되지만)
그렇게 ‘잘난’ 것이 그냥 학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 참 보기 좋다.

아이비리그 박사학위가 두개 있는 사람하고 대학 중퇴한 사람이 맞장뜨는 직장이어서 참 좋다. ^^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인’들이 물론 많이 있긴 하다. ㅎㅎ

비종교적 기독교 (10)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 ‘정상적으로’ 깊게 성경을 반복해서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 원칙을 찾아가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노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transform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행동강령을 시시콜콜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에는, 온 세상이 누구의 피조물이며, 그 창조자가 어떤 분이시고, 그 창조자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어떤것인가 하는 것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계속 하다보면 당연히 ‘일반은총’의 영역에 해당하는 많은 지혜가 쌓이게 된다.
그런데 이걸 추구하지 않고, 그냥 shallow하게 ‘명령’만을 찾으려하면, 풍성한 지혜를 쌓는데 이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주장하는 ‘비종교적’ 기독교는 바로 이런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전 인격으로 평생 배워나가고,
일반은총의 영역에 펼쳐진 많은 지혜와 지식들을 embrace하되,
기독교를 ‘명령’의 집합으로 이해하지 않고 ‘원칙’의 가이드라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며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데 더 가까이 가게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상 어줍잖은 생각을 여기서 마무리 지어본다.)

비종교적 기독교 (9)

가령 어떤 사람이 게임 중독이라고 하자.
그런데 내가 그 사람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종교적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접근한다.
그 사람이 게임을 그만해야하는 ‘성경적’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쓰여진 몇천년 전에는 컴퓨터 게임이 없었으므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서 매달리지 말라는 근거를 찾는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슷한 다른 예들을 막 뒤져서 어떻게든 성경에서 ‘명령’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아마 비종교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자, 봐라. 지금 네가 그렇게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지금 너를 심각하게 파괴시키고 있잖니. 그러니까 그거 그만둬.

나는,
어거지로 성경에서 명령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좀 자연스럽게, 비종교적인 접근으로 문제에 다가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면서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비종교적 기독교 (8)

종교적 기독교가 갖는 위험은, 좁게 가두어진 ‘원칙’이 절대성을 갖게된다는 것에 있다.

가령,
헨리 조지의 사상이 ‘성경적’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생각은 ‘비성경적’이 되어버리기 쉽다.

혹은,
종은 상전에게 충성을 다해야하는데,
감히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행위는 ‘비성경적’이 되어버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권위의 파워게임으로 이 모든 논의가 전락하게 되고,
먼저 어떤 ‘성경적’ 가치를 선점한 사람이 매우 비정상적인 권위와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어떤 원칙을 그 당시 상황에서 써놓은 이야기들로 읽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지금 적용해 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것을 위해서,
현대 학문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고,
전문가들의 의견에 경청을 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된다.

더 이상 종교지도자들이,
비정상적이면서 비합리적인 비뚤어진 권위를 갖지 않아도 되고,
정말 위대한 창조주의 뜻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가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풀어가는 ‘하나님 나라 동창생’들이 많아지게된다.

비종교적 기독교 (7)

성경에 나와있는 어떤 이야기를,
‘해석’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prescription 혹은 명령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성경적 원칙’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참 단순하고 쉽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저 단순한 ‘명령들’을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뜻을 작은 box 안에 가두어버리면 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칙’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전형적인 종교의 특징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떤 frame 혹은 box 안에 가두어버리려는 시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따위는 귀찮은 것이다.

그냥 원칙만 지키면 되니까…
그냥 고민하지 않고 지키면 내게 면죄부를 주니까…

바로 그런 차원에서 나는 지금 내가 이 시리즈에서 쓰고 있는 이러한 접근을 ‘비종교적’ 기독교라고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비종교적 기독교 (6)

성경에 나와있는 ‘description’과 ‘prescription’을 좀 구분하는 일을 한번 해보자.

가령,
골로새서에는, 종이 상전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나와있다.
이걸 prescription으로 생각하면 이건 따라야할 명령이므로 심지어는 노예제도를 지지하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실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걸 description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노예제도가 매우 편만한 그 당시 사회 체제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가 상전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은, 주어진 생활을 성실하게 그리고 integrity를 잃어버리지 말고 살라는 권면이다.
(눈속임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고… 등등)

자칫,
몇천년전에 고대시대에 쓰여진 문서에 나타나있는 어떤 ‘스토리’들을 읽으면서,
그것에서 무리하게 우리가 따라야할 ‘명령’을 찾아내려고 하다보면,
이런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런 의미에서 description과 prescription을 잘 분별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

비종교적 기독교 (5)

어제의 예가 너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다음의 예는 어떨까?

‘성경적 경제관’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성경적 경제관’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흔히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19세기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 (Henry George)를 신봉한다. 아니 오히려 헨리 조지는 그래도 현실 정치가로서 조세개혁 같은 형식으로 자산 불균형이 심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현실적 노력을 한데 반해, 헨리 조지의 지금 추종자들은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방식으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혹은,
‘희년’이라는 제도가 구약에서 언급되었다고, ‘희년’에 엄청 목매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현재 어떻게 희년을 구현할 수 있을까 뭐 그런.

(아, 성경적 경제관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다. ^^ 일부 어설프게 성경적 경제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나는,
헨리 조지의 생각도 참 좋다고 생각하고, 희년의 아이디어도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약에 나와있는 토지 사유 금지 라던가 희년이 이야기를,
지금도 행해야하는 ‘원칙’으로 받아들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쉽다.

어쩌면,
토지 사유 금지의 정신이라던가, 희년의 정신에 담겨있는,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정신, ‘인애와 정의’에 대한 정신 등등을 현대에 적용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지만,
21세기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고 개발해놓은 많은 경제학 이론들, 현실에서 정책을 세우고 입안하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노하우와 경험들 등등의 차원에서 보았을때,
19세기 헨리 조지의 생각은 그 당시로는 참 좋은 생각일 수 있으나 지금은 너무 뒤떨어지고 낡은 생각일수도 있을 것 같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정신’을 좀 제대로 파악하고,
지금의 전문가들이 성취해놓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여,
현실 속에서 동작 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것이 어쩌면 정말 ‘성경적’인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너무 prescriptive하게 볼 것이 아니라, descriptive하게 보는 일을 더 해야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적 경제관 이야기를 들었지만,
성경적 가정, 성경적 직업관, 성경적 기업, 성경적 정치, 성경적 교육… 이런 비슷한 예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비종교적 기독교 (4)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믿음과 실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건강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만을 유일한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성경에서 짜내어서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사실 좀 무리가 따른다.

좀 우스운 예를 들어보자.
성경적인 운전법 이라는 것이 있을까?

음… 뭐 있겠다.
규칙을 잘 지키고, 보행자에게 양보하고, 과속하지 않고, aggressive하게 운전하지 않고, 가능하면 연료를 아끼고,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이걸 성경을 마구 뒤져서 이것이 ‘성경적 운전법’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있을까?

음…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나귀나 말을 타는 예를 성경 속에서 찾아서 적용해보아야 하나?
발람의 당나귀 이야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는 이야기같은 것들?

벌써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냥 ‘상식적’으로 좋은 운전자가 되는 것에대한 기준이 충분히 있는데, 그걸 억지로 성경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기독교적 운전법’은, 그냥 상식적으로 법을 잘 지키는 안전운행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걸 억지로 성경에서 뭔가를 찾아서 근거를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너무 자주,
‘억지로’ 성경에서 어떤 원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비종교적 기독교 (3)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으며, 그 진실성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 전체는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

We affirm the divine inspiration, truthfulness and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로잔언약에 이렇게 나와있다.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모오한 척도”

그런데 이걸 영어로 보면 약간 어감이 다르다.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말하자면 한국어로 다시 풀어보자면 이런 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에는 착오가 없다. 그리고 유일한, 믿음과 실천의 법칙이다.

음….
그러니까, 억지로 paraphrase를 하자면 이런거다.
성경이 모든 것을 다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에는 오류가 없다.
그리고 믿음과 실천의 법칙들이 여러개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유일하게 infallible(무오한) 법칙이다.

너무 억지 해석인가?
사실은, Francis Schaeffer는, 바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로잔언약에 ‘자유주의적’ influence가 있다고 비판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위에 써 놓은 것이 꽤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는, 그런 관점을 갖는 것이 우리가 어그러진 종교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argue 해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