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는 사명

지난 주말에,
후배 간사 몇 사람에게 좀 긴 이메일을 보내면서 사랑이 없는 사명에 대해 잠깐 이야기 했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자신을 dry하게 만들고, 급속히 burn-out 시킨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인정에 매달리게하고,
쉽게 실망하게 하고,
인내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랑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드는 힘을 공급해 주지만,
사랑 없는 사명은 점차 그 사명을 감당할 힘을 고갈시킨다.

사랑없는 사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지만,
사랑은 사람들을 사람으로 대하게 한다.

사명으로인해 지치는 사람은 있지만,
사랑으로 인해 지치는 사람은 없다.

낙망하고 지치는 이유는,
사명이 흐릿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 이메일에다가 뭐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써보려고 했으나,
잔소리가 되는 것 같아 말았다. ^^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기가막히고 감탄하게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식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역자들이 되면 참 좋겠다.

비종교적 기독교 (2)

20 여년전, ‘기독교적 세계관’ 이라는것을 공부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기독교적 학문’, ‘기독교적 가정’, ‘기독교적 정치’, ‘기독교적 경제체제’, ‘기독교적 기업’, ‘기독교적 자녀교육’ 등등…

그리고 나름대로 정말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위해 몸부림쳤고,
그런 차원에서 내 삶 속에서 모든 영역에 ‘기독교적’ 혹은 ‘성경적’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런 시도는, 매우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내 개인적으로 신앙을 성숙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은 여태껏 내게는 소중한 ‘동지’로 남아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모든 영역에 ‘기독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시도가 정당한 것일까?
과연 ‘기독교적 xx’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냥 몹시 불경한 것일까?

비종교적 기독교 (1)

보통 ‘비종교적’ 기독교란 어떤 것일까.
종교적 의식이나 감정적 흥분에 사로잡혀서 이분법적인 삶의 자세 지양하는 기독교를 이야기한다고 쉽게 생각할 것 같다.
종교적 의식보다는 진실된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기독교.
이 땅에서의 책임을 다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
뭐 그런 것들 아닐까.

사실 맞다.
그런것은 분명히 비종교적 기독교일 것이다.
(사실 내가 교회에서, ‘비종교적 기독교’라는 주제로 한 6번 정도짜리 강의 시리즈를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별로 원하는 사람이 없는 듯 해서, 약간 주춤하고 있긴 하다. 그 강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런 내용을 많이 다룰 것 같다)

그런데,
그것과는 좀 다른, 혹은 그것보다는 약간 더 큰 차원에서 비종교적 기독교를 깊이 좀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비종교적 기독교는 지극히 경건주의적이고 개인의 진실됨을 많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시리즈의 글에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좀 다루어 보고 싶다.
그래서, 종교성을 탈피하는 것이 ‘개인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좀 다른 차원에서는 ‘신학’의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argument를 해보고 싶다.

나는 뭐 사실,
신학적 지식이 깊지 않으므로,
누가 이런 관련된 가르침들을 좀 잘 정리해서 내게 가르쳐주거나 자료들을 좀 알려주면 참 좋겠는데… ^^
특히 이렇게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궁금한 것이,
과연 교회사 속에서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한 흐름은 없었을까 하는 건데…
신학도 잘 모르고, 교회사도 잘 모르니… 뭐 그냥 이렇게 써볼 수 밖에.

Tangible한 도움을 주는 일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나서,
나를 몹시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공부하는 ‘재료공학’이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데 기여한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이걸 열심히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유익이 간다거나 그런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의 직접적인 열매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나는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정말 전공을 바꾸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게 대학교 3학년 때 였으므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여태껏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냥 가보자… 이렇게 그냥 결정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정말 내 적성에 100%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은 더 없어갔고, 석사과정 2년차때에는 그 회의가 극에 달했었다.

그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모든 tangible한 열매를 다 내가 맺도록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불합리한 생각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내 적성에 딱 들어맞지 않는 이걸가지고 결국 박사까지 받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 새 직장에서 하는 일은, 정말 이 product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들이다.

당뇨병, 뇌전증(간질), 심장질환, 우울증, 시각장애 등 여러 분야의 질병이나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정말 내가 만드는 이 제품이 바로 어떤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상태를 계속 monitor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 그렇게도 내가 바랐던 ‘tangible하게 사람을 돕는 일’을 마침내 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인한 excitement가 내게 별로 크지 않다.

왜 그럴까?

어쨌든 내게 허락된 이 값진 일을 하면서, 그 일의 효과와 결과와 consequene들을 깊이있게 생각하는 일들을 더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수렁에 빠졌을 때 말씀 묵상

1.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때,
그래서 혼자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닐때,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2.
혹시 그 상황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나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3.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고 엉뚱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려움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셋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세가지를 분별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기르고,
나 자신을 좀 더 자라도록 이끌지만,
그저 좀 ‘제 정신’을 찾도록 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게 말씀 묵상이 없었다면,
그나마 이 정도 정신차린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새해 소망

새해에 약간 긴 시리즈의 글을 쓰느라,
새해 소망, 새해 결심 이런거 하는 글도 쓰지를 못했다. ^^

그런데 사실,
내 새해 소망은 ‘소망’이다.
혹은 ‘희망’이다.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망’을 깨닫게 되면 좋겠다.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진 그 ‘희망’을 발견하게 되면 좋겠다.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remind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작년보다 조금 더, 조금 더,
우리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따르고 싶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그 ‘사랑’이 유난히 마음 깊이 담긴다.

희망에 사로잡히기 (9)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은,
어떤 궁극적 이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지금 희망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의 근거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지금 우리 삶의 자세 역시 자포자기, 현실회피의 모습이어서는 안된다.
냉소적이거나 현실비관적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궁극적 희망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수 없다.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 분명할수록,
오히려 지금 어려움의 상황에서 불꽃같이 빛나는 자세(attitude)가 있어야 한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낙망하고 있는 내 후배들에게,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내 온 몸의 힘을 다 모아서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싶다.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질주의적 종교적 희망이나, 인본주의적인 shallow한 희망으로 다시 돌아갈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가야하는 길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의 길이다.

함께 좀 힘을 내자.
우리 주님의 음성에 우리 모든 마음을 다 빼앗겨보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희망에 사로잡히기 (8)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나,
조엘 오스틴 식의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들은,
낙관의 열매로서 결국 내가 잘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결국은 물질적 풍요나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나는 결코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meta narrative를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악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회복하시고, 결국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judge하신다는 엄청난 scale의 낙관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하는 (혹은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세는,
낙관적인 자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그리고 나를 끔찍하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정도라면,
낙관적 자세를 견지할만 하지 않은가!

결국 낙관적 자세를 가지면 잘 되어서 내가 현실적으로 유익을 얻게된다는 그런 천박한 수준의 낙관론이 아니라,
결국은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붙들고 계시다는, 깊은 믿음으로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낙관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런 낙관적 자세를 통해서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나가시고,
역사를 진보시키시기도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더 넓게 선포하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세우기도 하시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들을 되새겨 보고,
성경의 meta narrative를 이해해야만 가질수 있는 그런 깊은 낙관적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희망에 사로잡히기 (7)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희망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포용과 관용이 아닌가 싶다.

공격적이지 않고, 오래 참을 줄 알고, 온유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음… 어디서 많이 듣던 것 같지 않은가?
결국 진정한 희망과 사랑의 속성이 매우 비슷해진다.

나는,
진정한 희망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사랑에 함몰되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희망을 소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희망을 다시 보기 위해서,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이 사랑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옳은가’ 하는 질문보다는,
‘무엇이 사랑인가’ 하는 질문을 훨씬 더 많이 던지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용납하는 일을 해야하지는 않을까 싶다.

정치적인 견해, 신앙적/신학적 견해 등등이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심하게 polarized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데,
이런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기 위해… 사랑에 좀 주목해보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싸우는 일을 그치고,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정말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오래 참아내는 그런 사랑.

희망에 사로잡히기 (6)

미숙함은 왜곡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성숙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숙함을 정죄할수는 없다. 미숙함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권면하고 도와줄수는 있으나 미숙함을 정죄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교만의 문제일 수 있다.

기복주의적 희망이나 인본주의적 희망은 모두 추구할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미숙함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정죄하지 말아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옳은’ 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에,
때로 그 ‘옳은’ 기준을 가지고 미숙함을 사랑없이 정죄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렇게 미숙한 사람이 나이가 많은, 오래 교회를 다닌 어른일수도 있다.
때로는 미숙한 어떤 ‘시대’가 있을 수도 있다.
때로는 특별히 어떤 생각이나 가치의 흐름의 어떤 부분이 유난히도 미숙한 어떤 그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미숙함은 물론 벗어나야할 모습이지만,
그 미숙함을 지나치게 정죄하면,
그 미숙한 사람은 ‘진리’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채 무기력해져버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으로 미숙함을 견뎌주고, 그 미숙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그저 용납하여주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윽박지름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개인, 집단, 시대에 자연스럽게 하시는 ‘일하심’에 반응해서 organic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한다.

나는 다시 희망을 찾는 일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미숙함에서 오는 미숙한 희망을 지나치게 공격하여,
가라지와 함께 알곡을 함께 죽여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숙한 거짓 희망을 조금 더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저 꾸준히 참된 희망을 이야기하되,
거짓 희망에 대한 정죄를 좀 자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