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벌어 먹고 살기 (8)

(1) 낮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모든 영역들을 나눈다.
– 각 영역별로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찾아서 행동강령을 마련한다.
– 그것을 실현한다.

그러나,
(2) 높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세상의 모든 영역, 하나님의 주권 등등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는다.
– 이미 존재하는 여러 영역들에 그 고찰한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한다.
– 하나님의 주권을 행동강령으로 이해하지 않고 궁극적 이상으로 이해하고 현실에서의 유연함을 유지한다.

다르지 않은가?

말하자면,
북유럽 국가들이 사람을 더 존중하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1)의 방법을 취하기 보다는 (2)의 방법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사랑, 자비, 공의, 인애 등등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그 ‘개념’을 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적당한 현실적 방안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면,
(1)의 방법을 취한다면…
성경적 경제 체체를 이루기 위해
성경적으로 은행을 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세금을 운영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이자를 조정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이런식을 접근 하는 것이다.

(1)의 문제는,
2000년도 더 된 문서 속에서 21세기에 적용가능한 성경적 은행 운영의 원칙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고 왜곡의 위험이 크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생각들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한 후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을 감안해서 더 유연하게 해야하는 것이다.

소위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등식을 마련한 것은 (1)의 방법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성경적 직업관 = [x]’ 라고 해놓고, x에 어떤 것을 넣어도 같은 위험성이 있다.

성경적 직업관을 논하기 전에, 정말 성경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고찰하고…
그것을 현실(직업=밥벌어 먹기) 속에서 잘 적용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밥 벌어 먹고 살기 (7)

한참 전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출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와 관련해서 생각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다.
(혹시 독자들 중에서 출처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유럽(스칸디나비안 국가들), 독일 등의 국가들은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루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위스등의 일부 남유럽 국가들과 영국/스코틀랜드 쪽은 캘빈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미국이 궁극적으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루터와 캘빈은 소위 ‘세계관’에서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흔히 ‘두 왕국 이론’으로 알려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왕국 이론은 세상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와 영적인 영역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가 다르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대단히 이분법적 생각이다.)
반면 캘빈은 제네바에서 사실상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이분법적 생각을 거부하고 일원론적 아이디어를 추구했었다.

예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했던 사람들에게 ‘이원론’은 ‘dirty word’이다. 배격해야할 prime enemy이다.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루터의 두왕궁론은 완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루터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은,
캘빈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인권의식이 발달했고 더 복지국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원론적 사상으로 다스려진 나라들이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할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게… 소위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할때,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낮은 차원에서의 노력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내일 조금 더 이어가보겠다.)

밥 벌어 먹고 살기 (6)

예전에는 그래도 변혁 모델이 조금 더 relavant하다고 생각되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그럼 무얼까?

우선 엘리트의 비율이 현저하게 줄었다.
앞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변혁 모델은 엘리트들에게 적용할때 제일 잘 맞는 모델이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 엘리트가 현저하게 줄었다.
신자유주의체제로 인해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져서 경제적 파워를 가진 집단이 극소수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따라오는 권력 역시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한국에서 예전에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면 그래도 엘리트이고 뭔가 한자리 할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그리 허무맹랑하지 않았는데… 요새 어디 그런가.
명문대 졸업해도 결국 금수저들 명령 받아 일하는 사람들되는게 제일 흔한 코스 아니던가.

그리고 또한 자본의 집중과 권력과 특권의 집중이 심해지면서 그들이 누리는 권력의 부패도 더 심해졌다고 본다. 견제받지 못하는 권력이 부패한다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더 ‘악해졌다’고 나는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다.
부와 권력의 집중이 사회를 더 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악하기 때문에 노력으로 그것을 개혁해 내는 것이 더 어렵게 되었고.

개혁의 주체인 엘리트가 줄어들어서 약화되었고,
개혁을 막는 저항은 더 강해졌으므로 당연히 개혁이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5)

어떤 모델이 얼마나 좋은 모델이냐 하는 것은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모델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을 그런 기준으로 한번 보자.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은,
엘리트, 금수저 등에는 잘 맞는다.
아니 이 사람들은 변혁모델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 능력이 없어서 맨날 구박받는 사람은 어떨까?
직장에서 짤린 사람은?
남들이 잘나가는 회사에 다닐때 나는 빌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변혁의 힘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 일에 충실한 능력 조차 없는데?

신앙을 생각할때,
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야하는 목표/성취를 설정해 놓으면 결국 이런 한계에 부딛힐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정’의 중요함이다.

가령, 우리는 구직을 할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직장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앙의 본질의 입장에서 보아서, 구직을 할때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직의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잘 풀릴때도 있고, 그래서 잘 안풀릴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구직의 열매가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그분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역시 그렇다.
때로는 죽어라고 힘들고, 때로는 열나는 일도 있고, 가끔은 의로운 일도 하고, 어떤때는 승진을 하기도 하고,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변혁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은 신뢰하고, 직장을 돈버는 소중한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변혁의 모델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모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4)

개혁주의/변혁주의적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세속주의/혼합주의에 오염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간 새내기 직장인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C&C man (Copy and Coffee man – 복사기 돌리고 커피 뽑아서 돌리는) 정도에 만족해야할때도 있다.

세상은 변혁시켜야하겠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사명은 이루어야 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승진(!) 이 목표가 된다.
그래야 뭔가를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변혁이 목표이기 때문에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해서 영향력을 키워야지.

그런데 이게…
2년, 3년, 5년, 10년, 그렇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뛰다보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역량은 고지를 점령하는데 집중되게 되고,
고지 점령의 원래 목적인 변혁의 꿈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것이 변혁주의자들이 걸어가는 매우 typical한 변절의 모습이다.

내가 80년대 대학을 다닐때
그렇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기독교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변혁을 위해 고지를 점령해야 했고,
그러면서 결국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절해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변혁의 모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대의 상황이나 어떤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절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3)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고 이야기하는 개혁주의적 변혁주의 세계관은 이원론을 극복해내는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이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 매우 가치있다는 주장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깃발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져다준 부작용 역시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반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 좀 더 좁게는 직업활동의 가치와 의미가 ‘대단한 것’이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직업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 자체가 영광이 되게 하라” 고 설교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 생존경쟁의 현장인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내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공부 잘 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그리스도인 말단 직원이,
그 거대한 대기업의 체제 속에서 도대체 뭘 하면 그 대기업이 변한단 말인가!
세상은 변혁시키라는 구호에 취해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 접하면 금방, 이거 뭐야…. 과연 이렇게 사는게 의미가 있는 걸까. 악한 체제, 혹은 marginally 선한 체제 속에서 부품이 되어버리고 있는데… 내가 학생때 꾸웠던 원대한 꿈은 어떻게 되는거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여 잘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면, 직장을 변혁시키지 못하는 좌절 속에서,
어떤 사람은 ‘뭔가 더 새로운 꿈을 찾아서’ 직장을 때려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좆아서’ 목회자나 기독교 관련 직종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학생때 가졌던 꿈은 이게 아닌데’ 하며 그저 낙망해 있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게 세상 사는 거 아닌가.
한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거 말이다.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다.
이런 식의 ego-centric한 생각을 연료로하여, 변혁적 세계관의 불을 붙여 놓으니 처음엔 당연히 잘 타기는 하는데… 그 불길이 오래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타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독가스가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직장생활,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다.
그저 밥 벌어먹고 사는 거다.
그걸로 세상 못 바꾼다. 못 바꿔도 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좀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요한복음

1.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어떤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와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성적으로 성경공부하고 책 읽고 그러는걸 더 좋아하는 반면, 그 형은 신비체험이 많고, 환상을 보고, 귀신을 쫓고 그런걸 하는 형이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내게 그 형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형이 어느날 뜬금없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적이 있다.
“너는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의미를 그때 잘 이해하지 못했다.

2.
N T Wright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복음은 내 아내와 같습니다. 나는 요한복음도, 내 아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요한복음에 대한 N T Wright의 이 말을 완전 공감한다. ^^

3.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록 불친절(?)하다.
뭐 좀 논리적 흐름을 따라 노력하다 보면 그게 뚝 끊기고 그냥 선언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서술적이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선언적이고 직관적인 책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 같다.

4.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직관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책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통시적이고, 초월적이다.
나는 그래서 요한복음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훨씬 더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언적이고 직관적이고 통시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잘 활용한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요한복음의 그 선언적, 직관적, 통시적, 초월적 성격을 잘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리 많이 만나지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연구를 좀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 몇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

5.
새해들어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매일성경 본문으로 QT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이 애가(lamentation)으로 읽힌다.
요한복음 1장에, 왕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theme이 요한복음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sign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들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적어도 나는 이번에 요한복음이 애가로 읽힌다.

6.
예전에 그 형이 내게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형이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은, 요한복음에 조금 더 강조해서 나와 있는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meta narrative도 물론 좋고, 조직신학적 분석도 물론 좋은데…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core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그냥 사랑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내가 정말 깊은 곳에서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7.
사랑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해되지 않는 요한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내 모습도 역시 역설적이다.

또, 평신도 설교

어제는 은규 형제가 설교를 했다.
평신도 신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었다.

어제 설교의 첫 부분은,
사실 내가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블로그에서 좀 썰을 더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inner being의 voice에 충실하는 것이 참되다는 낭만주의적 현대의 자아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은규 형제가 한번 질렀으니, 나도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서 한번 follow-up을 이 블로그에서 해봐야겠다.

그리고 또한 인상적이 었던 것은,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Ego-centric한 현대의 culture를 완전 까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N T Wright의 신학이 그런식으로 Ego-centricity를 직접적으로 깐다고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어가며 멋지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우 형제나 은규 형제 같은 사람들이 물론 참 똑똑하고 신실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조금만 교회가 불필요한 장벽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목회자들로부터 나오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평신도의 입을 통해서 멋지게 나오는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다들 돈 벌고, 애 키우고… 빡빡하게 살면서… 설교 한번 준비한다는게 그리 쉽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진주들이 이렇게 나오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관심있는 분들, ‘하나의 씨앗교회’ podcast에서 지난 주일 설교를 들어보시라! ^^

밥 벌어 먹고 살기 (2)

나는 교회에서 흔히 쓰는 ‘비전’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대부분 그 ‘비전’이라는 말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덧입히고 싶을때 쓰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하나님 안에서 기독 정치가가 될 비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거의 100%는 그냥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잘나가는 정치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이 정죄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새성전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라고 목사가 이야기할때, 그것은 그냥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슨 개뿔.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직업에서의 욕망을 이런식으로 포장하기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비전, 뭐 그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의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심, 직업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바람 등등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거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라거나,
직업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이런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대단히 흔하다.

아니 그냥…
나는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다.
나는 월급을 더 받는 직장에 가고 싶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회사 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좀 딱 까놓고 얘기를 못하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적’이라고 욕을 먹을까봐?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영적이지 못해서?

이렇게 꼬여버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언어구조 때문에,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이 구별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혼합주의와 세속주의가 기독교 안에 더 강력하게 침투해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좀 쉽게 생각해보자.
직장은 그것을 통해 돈 벌어서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것 아닌가?

밥 벌어 먹고 살기 (1)

1.
얼마전에 한 후배와 전화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하는 중에 직장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하나님의 뜻이니 비전이니 하고 이야기하는 후배에게, 직장이란 밥벅어 먹으라고 있는 거야… 라고 애기해 주었다. 그 후배는 약간 벙찐 분위기였다. 이 형에 타락한 걸까.

2.
최근에 이 블로그 독자중 한분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직장을 옮기는 것과 관련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내게 그 고민을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분에게도, 직장을 찾을때는 밥먹고 살기에 좋은 곳을 찾으라는 내용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3.
최근에 또 이 블로그의 다른 독자가 밥벌어먹고 살기위해 직장 다니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고 언급을 해 주셨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글을 좀 쓰라고 요청도 했다.

4.
우리 교회 목사님이 facebook에 루터의 Two Kingdoms 이론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게 우리에게 relavant해 보인다는 포스팅을 하셨다. 나는 facebook에 뭐 들어가서 내 생각과 마음을 쓸만큼 부지런하질 않은데도, 나는 화들짝 흥분해서 목사님의 포스팅에 열렬한(?) comment를 날렸다.

5.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직장은 밥벌어먹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기독교 셰계관, 그런거 개나 줘버려… 뭐 그런거 당연히 아니고, 직장을 밥벌어 먹기 위해 다니는 곳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