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하나님 (2)

민우가 3,4살때 그림을 그리면 쪼로록 달려와서 나나 아내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곤 했다.
나는 그게 하도 귀여워서 그럴때마다 민우가 숨막히다고 할만큼 꼭 껴안아주곤 했다.

그러면 민우는 캑캑 소리를 내면서 숨이 막힌다고 그러다가…
내가 좋아주면 또 강아지가 달려가듯 다다닥 자기 도화지로 달려가서 크레용으로 엉터리 그림들을 그려서 쪼로록 달려오곤 했다.

그럼 나는 또 숨이막힌다고 할만큼 꼭 민우를 꽉 껴안아주는걸 반복했다.

민우는 놀라울만큼 그걸 여러번 반복했다.
아무리 엉터리로 그림을 그려도 아빠에게만 가지고오면 아빠가 잘했다고 야단법석을 부리면서 자기를 꼭 안아주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누구든지 어린이와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우리의 인생의 그림을 가지고 쪼로록 달려갈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분은 내 재능없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내가 그 그림을 그분께 들고 쪼로록 달려가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인정, 세상에서의 성취, 자아실현등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자신의 그림은 옆집 아저씨에게 쪼로록 가지고가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아빠, 하나님 (1)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게 민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금도 나는 민우가 집에 오면 꼭 껴안아주고,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해준다.

아직도 내겐 애기같은 모습이 힐끗힐끗 민우에게서 보인다.

민우가 방학이 되어 집에올때면 공항에 픽업을 나가서 멀리 민우가 보일때부터 나는 껑충껑충 뛰어서 민우에게간다. 그냥 그렇게 사랑스럽다. 뭐 이유 그런거 없다. 그냥 사랑스러운거다.

민우가 늘 아빠가 최고의 아빠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우는 아빠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면 얻게되는 bonus이자 penalty는 아빠를 ‘영원히’ 알고 지내게 된다는 것이라고 민우가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럼 나는 민우에게 이렇게 얘기해줬다.
You’re stuck with me forever, literally.
그럼 민우는 어휴… 그러면서도 그렇게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는 나를 한번 꼭 안곤 했다.

성인이 된 딸아이를 둔 아빠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내가 민우를 사랑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긴 한걸까?
아니면 전혀 차원이 달라서 감히 그렇게 비교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사랑인걸까?
하나님께서 아버지/아빠의 이미지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그건 지금 이 시대의 아빠들이 갖는 이미지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서, 자칫 하나님 = 아빠 로 등치시키면 하나님에대한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되는 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게 느껴질때

나는 신앙의 성숙은 꾸준히 일정한 속도록 쭉~ 높아지는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성숙은 훨씬 자주, 어떤 순간에 쑥~ 하고 올라가는 경험(혹은 깊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런 어떤 기간들을 지내고나면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된것처럼 많이 성숙해지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대개 그럴때는 성경말씀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성경 한페이지를 그냥 넘기지 못한다.
성경 한페이지의 무게가 마치 100Kg정도나 되는 듯, 그냥 그 묵직함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성경공를 할때 가지는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그런 모습을 매번 그려보는건,
그런 성경공부를 자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성경을 접하는 경험의 신비가 너무나도 놀랍기 때문에.

Excited? Worried?

흥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동일한 상황속에서 가질수 있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때 많이 걱정하고 움츠려들고 자책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이 새로운 길이 열리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상황에서 기대하고 흥분하기도 한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예상치못한 상황을 맞닥드렸을때 걱정하고 움츠려들고 자책했다.
그렇게까지 쫄지 않았다만 조금 힘을 내어 그렇게 까지 힘들어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볼수도 있었을텐데, 그냥 당황하고 힘들어서 움츠려들기만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느낄때,
한편 그분의 은혜로 다른 길들을 열어주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막다른 골목이라고 당황하여 패닉하고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허술한가 하는 것도 보여주셨다.

이런 경험이 반복될마다,
(1) 한편으론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길을 내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수도 있겠고,
(2) 다른 한편으론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바보같이 퍼져있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울수도 있겠다.

혹은 (1)과 (2)를 모두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
사실 용기를 가지려면 하나님에대한 신뢰가 깊어져야만 가능할수도 있겠지.

내가 예전에 그렇게 당황하고 힘들어했던 나를 만날 기회를 갖게된다면,
나는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

그런데… 아마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움츠려있어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거지.

회사에서 갑자기 전에 해보지 않던 일을 하나 더 하게 되었다. 일복이 넘쳐서..
그 일을 마주하고 살짝 두려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해온 시간중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했던 나를 찾아보았다.
그러다 이런 저런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