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희망 (22)

희망을 갖게되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질까?

한편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한편 상황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서,
한편 감정적 동요를 일으켜서…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모두 가능하지만,
나는 희망을 갖게되는 것도 역시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설명할수도 있을 것 같다.

희망을 분명하게 확보하려면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어 존재해야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는데에는 희망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심각하게 결어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믿음’을 어떻게 갖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갖는데에는 논리, 객관적 사실, 감정 등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히지만,
이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믿음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희망은 늘 up-hill battle 이다

대안적 희망 (21)

가령 예를 들어서,
Rodney Stark의 The Rise of Christianity를 보면 2세기 로마에 닥친 역병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나와있다.
역병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병자와 도시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병자를 간호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보다 더 높게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를 보면 꽤 일관되게 나오는 theme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던 사도바울도 있고.

그런데,
현대에는 그런 신앙이 어디에 있을까?

신학적 우파쪽에서는 신앙이 개인화되어버려서 그냥 내가 죽어서 천당간다는게 다인 모습이고,
신학적 좌파쪽에서는 현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너무 커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theme 자체가 그 신학 체계내에 존재하기 어렵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도 역시,
신앙의 초월성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대안적 희망 (20)

내가 생각하기에 대안적 희망으로 또 한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초월성’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있을때마다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은 묵시문학이었다.

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미래,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새로운 세상,
이런 것들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초월적 희망이 현대 기독교에서 사실상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초월적 희망이란 사실 보수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바랄만한 내용인데,
보수 신학진영이 전체적으로 세속화되면서 초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초월성이라고 하는게,
랄랄라 따따따 방언하는거나,
기도가 용한 사람에게서 기도를 받아 살림살이 나아지는것 같은 수준이니, 그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몰트만이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낙관주의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낼 수 있는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낙관주의는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다.
낙관주의의 미래는 현재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희망의 초월성을 아주 잘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안적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건강한 초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것이 아닌가…

대안적 희망 (19)

나는 하나님의 통리라고 설명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세상과 내 삶을 해석해내는 가장 근본적 기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것 같이,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초월성의 배제한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월성이 배제되어버리면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도 우리의 ‘의지력’과 ‘행동력’이 얼마나 강한가에 의해 좌우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더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렇게 설득된 사람들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제대로 execution 해내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결국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나라 운동은 엘리트 운동이 되어버린다.
논리적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강한 의지,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안적 희망 (18)

영적 침체에대하여 내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던 책은 마틴 로이드-존스의 ‘영적침체'(spiritual depression)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 나와있는 여러 아야기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깊게 남아있는 말은 이것이다.

“Don’t listen to yourself, Have yourself listen to you”

네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아라. 너 자신으로하여금 너의 말을 듣게 하라.

이게 영어로는 조금 더 말이 되는데, 한국말로 번역을 하고 아니까 조금 이상하긴 하다.

그러니까, 마틴 로이드-존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다.
영적 침체에 빠져있을 때 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일은, 나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라는 거다.
네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 시편에 나와있는 것 같이, 나 자신에게 호통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당연히 쉽지 않다.
나도 역시 영적침체를 여러번 겪어본 사람으로서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은 정말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 powerful한 조언도 내겐 별로 없었다!

희망을 잃어버린채 영적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조언이긴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의 희망을 주는 조언이 아닌가 싶다.

“Don’t listen to yourself, Have yourself listen to you”

대안적 희망 (17)

예수님을 주로삼고 산다는 것은 늘 그렇게 다루기 쉬운 주제는 아니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이 문제로 평생을 씨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그 차원이 정말 다른 것 같다.

최소한 자기 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대는,
어렵지만, 자기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있음을 발견했을때 적어도 그 가치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당위라는 것은 인정했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덕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큰 가지기준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가치를 제공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게 좋긴 한데, 내가 왜 그것에 헌신해야하느냐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왜 disaster인가, 왜 더 큰 가치기준에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 희망을 제공해주는가 하는 길고 지루한 설득과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대안적 희망 (16)

절망의 상태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또 다른 key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닐까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치판단의 중심을 ‘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좋은 것, 내게 맞는것, 내게 최고의 것이 최선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 꿈을 이루는것, 내 자아를 성취하는것, 나를 위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은 내 꿈을 이루며살지 못한다. 어설픈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내가 소중하다고 지정해 놓은 것들, 내 관계, 내 소위, 내 지위, 내 성취 등에 내가 다다르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잃어버릴때 사람들은 삶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메시지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에 의해 정의될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나는 정말 이것을 가능하게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Lodship'(주되심)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의미를 상실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를 주로 삼으라는 메시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와 희망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대안적 희망 (15)

토니 캠폴로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쉬운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너무 쉬운 도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없게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에서 희망을 찾고,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쉬운것이 아니었다.
삶을 왜 저렇게 살아야만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의미로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 의미는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다.

대안적 희망 (14)

찰스 템플턴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빌리 그레이험과 함께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다. 기독교계에서 매우 주목받는, 총망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날 자신의 집에서 라이프 잡지에 나와있는 아프리카 기아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사람들의 이 처참한 모습을 가만 두시는가…
결국 그는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

마더 테레사가 있다.
이 사람은 인도에서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 어려운 삶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왜 찰스 템플턴의 질문이 없었겠나.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시는 걸까.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볼때, 나는 그 사람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한 사람은 자신의 편안한 집에서 잡지를 뒤적이다가 고통과 절망의 사진을 보고 신앙을 떠났고,
한 사람은 그 고통과 절망의 중심으로 자신을 던져서 살면서 그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의 눈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했다.

어떤 모습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가?

대안적 희망 (13)

희망에 있어서 사랑이 제공해주는 또 하나 중요한 key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대교회에서 별로 듣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

기독교인들의 이야기에서 늘 넘치도록 나오는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맞추어 살아서 내가 잘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기독교야…

우리가 사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인거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다른 차원의 가치를 부여주기도 하지만,
내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이 역시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대한 이야기를 다시 좀 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