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뻤던 순간들, 가장 슬펐던 순간들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각각 20개씩 추려서 정리하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가 summarize 될 것이라고 하셨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나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을 각각 20개씩 정리해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하자면 어떤 순간들이 있을까?

음….

머리 속이 멍~ 해지면서 아주 막막해졌다.

나는 어느순간부터인가… 

손에 꼽을만큼 기쁘고 슬픈 일들이 없었나보다.

그건,

내게 기쁘거나 슬픈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 물론 아니다.

왜 그런 일들이 없었겠나.

물론, 나는 삶에서 소소한 기쁨과 슬픕을 경험하고 산다.

가령, 아내와 민우와 함께 장난을 치고 산책을 하는 순간이 참 감사하고 기뻤다.

하이디를 입양해와서 아내와 민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뻤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많이 슬펐다.

‘아빠’를 생각하며 우는 아내를 보며 참 많이 슬펐다.

그런데,

그런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내게 기억될 순간으로 남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벤트’를 만드는 방식이나, ‘성취’를 해 내는 방식이나, ‘목표’를 이루어내는 방식 등이 아니라…

연속된 시간 속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이 더 건강한 것일까?

음… 글쎄… 잘 모르겠다.

이야기 하나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자집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집에는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집 주인은, 동네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란 저래야해” 라며 동네 사람들이 그 부자집 주인을 칭송했습니다. 부자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늘 자비를 비풀줄알고,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머슴은, 자신의 주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머슴에게 주인은 점차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머슴이 성실하게 일하기도 했을 뿐더러, 머슴 역시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이 머슴에게 점점 더 일을 많이 시킨 것은, 주인이 다른일로 바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마을에도 땅을 크게 사서 거기에서도 소작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소장농들에게도 자비롭게 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인은 땅을 넓히고 너 많은 사람에게 자비로운 소작을 베푸는 영역을 넓혀 가면서, 막상 머슴들이나 소작농들에게 이상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머슴들이 소작농을 막 다스리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쟤가 저래도 일은 잘하잖아. 저렇게 좀 하다가 나아질꺼야 하면서 악한 머슴들을 허용했습니다. 

기존에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예전에는 나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을 탐한다거나, 사기를 치는 집사, 머슴들도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이게 사업이 커지면서 어쩔수 없는거야. 그래도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라며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원래 주인을 따르던 머슴은, 주인이 버려두다시피한 땅을 더 잘 일구고, 소작농들과 더 잘 지내며 풍성한 수확을 내는 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뜻이 맞는 머슴들을 모아서 함께 먹고 사는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가끔, 주인이 보낸 집사가, 엉뚱한 짓들을 했습니다. 

토양에 맞지 않는 화학비료를 뿌려 땀흘려 지은 농작물을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악한 집사가 나타나 소작농들을 괴롭히고는 사라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머슴은, 그런 속에서도, 

이제는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잘 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땀흘려 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한 소문들이 들렸습니다.

주인을 따르던 집사들, 머슴들이 자꾸만 나쁜 짓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해가며 기존에 헛간을 버리고 더 큰 헛간을 짓고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부려서 자신의 왕국을 만든 집사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원래 좀 터프하게 아랫사람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던 한 집사는, 자기 밑에 있는 계집종을 건드려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말… 그 주인이… 그렇게 존경하던 그 주인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이 커지면서 그 주인의 태도가 정말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주인의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 만으로 머슴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놈도 그 주인이랑 같은 놈일꺼야.

그래, 저놈도 결국 계집종 건드리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그러는 놈일꺼야.

그 와중에 주인이 농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아래 사람들이 이렇게 사고치고 다니는걸 보니,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다 뭔가 싶다. 허무하다.”

머슴은 정말 억울했습니다.

머슴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한 혜택이 가도록 노력해서 그래도 농업 공동체도 그럭저럭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신과 자신의 일부 추종자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머슴이 한 일조차도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슴은 속이 많이 상합니다.

함께 땀을 흘린 동료 머슴들, 그리고 함께 노동 공동체를 이룬 소작농들을 생각하면 이 땅을 휙 버리고 떠날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사람들과 좋은 공동체를 만든 것이 잘못일까요.

주인이 나가서 딴짓하는 동안, 땀흘려 열심히 일한 것이 잘못일까요.

가끔 주인이 이상한 화학비료를 보내고 나쁜 집사를 보내서 노력한 것을 허물어 놓아도 그것을 극복해왔던 것이 잘못일까요.

그러다 머슴은 문득 생각합니다.

아, 그래… 비록 주인은 ‘맛이 갔어’도…

우리 나라님이 계셨지.

우리 나라님은, 모든 이가 칭송하는 성군이시지.

그래, 내가 우리 나라님의 나라에 사는 한, 

내가 이렇게 땀흘린 것은 가치 있는 것인게야.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이제는 그 주인을 떠날때는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잠깐 해 봅니다.

정말 함께하는 사람들과 소작농들을 살리기 위해선,

주인을 떠나야만 하는게 아닌가 말입니다.

미주 뉴스앤조이 (뉴스 M) 에 실린 양재영 기자의 글에 대한 반박

일본 코스타 대표인 김규동 목사와 관련된 뉴스가 나온 이후,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떠돈다.

갑자기 ‘내가 코스타를 잘 아는데, 코스타는 이게 문제야’라는 식의 진단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중에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지적들이 많이 있지만, 또 그중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많다.

미주 뉴스앤조이 (혹은 뉴스M)에 실린 양재영 기자의 기사는, 내가 보기에 후자에 해당하는 기사이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130

몇가지 양재영 기자의 글을 읽으며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해서 적어본다.

1. 지금 코스타 강사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한 것들이 문제가 되어 이 discussion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앤조이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오정현 목사의 논문표절, 그리고 김규동 목사의 폭행과 성추행이 대한 것이다. 

그런데 양재영 기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코스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복음전도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양재영 기자가 이야기한대로, 코스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채 복음전도만을 이야기했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심지어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도대체 코스타 강사들의 도덕적 이슈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전통적 신학적 debate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평소 거친 운전습관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의 잘못된 운전습관으로 말미암아 사고를 일어켰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을 보면서 ‘저 사람은 평소에 발을 잘 씼지 않았다. 그래서 무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며 지적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지적일까?

‘코스타 관계자들’의 도덕적 문제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 도덕적 문제가 왜 그렇게 반복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고민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그러나, 도덕적 문제가 생긴 김에, 저들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해보자 라는 것은 심각한 논리의 비약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반복하지만, 양재영 기자가 이야기한대로, 코스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이야기하는 assessment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debate의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2. 양재영 기자는, 코스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가령, 국제본부과 각 지역의 코스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코스타 프로그램과 강사는 각 지역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등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것을 알고 있다면, 일본에서 벌어진 일과, 13년전 미국 코스타를 ‘자아비판’하면서 쓴 우종학 박사의 글을 한꺼번에 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우종학 박사는 미국 코스타의 간사 였다.)

가령, 오정현 목사가 코스타 인기 강사였다고 했는데, 미국 코스타에서 오정현 목사가 강사로 섰던 것이 언제였는지 양재영 기자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이야기이지만 코스타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진단은 어떻게 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때 3천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나 이제는 1천명도 모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지역의 코스타를 두고 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서는 한번도 3천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적이 없었다. 참석 인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코스타 출신 목회자들의 비리를 외면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못한 코스타의 본질적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다”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분석과 supporting logic이 필요하다.

전 세계 코스타중에서, 일본 코스타만이 3천명 넘게 모이는 집회였고, 일본 코스타의 참석인원은 전 세계 코스타 집회 중에서 가장 많다. 오히려 ‘코스타 강사출신 목회자들의 비리’가 터진 후에도 일본 코스타의 참석 인원은 줄지 않았다.

나는 참석인원이 많은 것이 건강함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석인원과 건강함의 연관성이 그렇게 높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양재영 기자는, 코스타가 계속해서 엘리트주의와 탈정치주의를 고집하며 시대를 외면한 ‘방주집회’로서의 역할만 고집한다고 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조금 더 밝힐 필요가 있다. 

가령, 지난 10년, 혹은 지난 5년동안 미국 코스타에서 어떤 message가 present되었는지 양재영기자는 아는지 궁금하다. 지난 10년동안 소위 ‘코스타 주제문’ 혹은 ‘코스타 취지문’이라는 것을 읽어보았는지 궁금하다. 최소한 코스타 주제 취지문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기사에서 지적한것과 같이 ‘카더라’ 식의 비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기사에서, 논리적 비약과 사실의 왜곡을 여러군데 볼 수 있었으나, 그것을 다 열거하고자 하는 것은 내 이 글의 의도는 아니다.

3. 양재영 기자가 이런 기사를 쓴 의도와 열정은 높이 평가한다. 양재영 기자의 입장과 내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에대한 주장을 펼 때에는, 좀 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 주장의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

예전에 K 운동을 하면서, 받았던 pressure들이 있었다. 

뭐… 솔직히… 많이… 많이… 많이… 있었다. 

대개는 ‘강사’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도무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강사인데 그런 사람을 모셔야한다는 pressure 들이었다.

그 중에는,

지금은 홍대쪽에 계시는 J 모 목사라던가,

서초동에 크게 새 사업체 확장을 하신 O 모 목사 같은 분들도 있었다.

최근 몇년 동안에는,

일본에서 하는 K 집회를 가서 많이 배워라, 거기가 최고다… 뭐 그런 얘기들도 많이 들었었다. 

그런가 하면,

저런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며 어떤 강사가 왔으니 나는 K 랑 관계 끊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많이 당해봤다.

“저런 사람은 다시 부르면 안된다”며…  휘튼 식당에서 벌받아가며 혼나기도 했었다.

위와 같이 좀 ‘극단적인’ 예 뿐 아니라,

사실 여러가지 압력은 정말 많았다.

다짜고짜 나 회사에서 일하는데 전화해서 어떤 사람 모셔야 한다고 나를 훈계하고 꾸짖는 분들도 계셨다. ㅎㅎ  

밤이면 한두시간씩 어르신들 전화 받아 ‘혼나 드리고’… 정말 내 cell phone을 부셔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다. -.-;

그뿐 아니다. 소위 ‘대중’의 요구도 무시하기 어려운 적도 있었다. 무조건 무슨 무슨 목사님은 모셔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요즘 아마 간사들이 그런거 다 견디어 내느라 많이 힘들 것 같다.)


그러면서 아, 그래… 뭐 그런 분들도, 결국은 나와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다 복음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잖아? 그러니까 좀 타협하면서 그렇게 가야지…

그래서 각종 욕을 들어먹으며 나도 대단히 불편한 분들을 강사로 모신적도 많았다.


한편,

뭐 실명(?)을 거론해서 뭐 좀 그렇지만, 

ㄱㄷㅇ 간사님 같은 경우에는, 이런게 참 더 자연스러우셨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건 정말 죽어도 안된다고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계셨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유연한 입장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뭐 ㄱㄷㅇ 간사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잘 알지만, 이분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정말 놀랄만큼 consistent 한 분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으실 수 있을까… 싶다. 내가 그분을 알아온 것이 이제 15년이 더 되어 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분이 보여주셨던 강경한 입장, 유연한 입장들은…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어떤 원칙에 따른 것이었지, 그때 그때 ad hoc으로 반응하셨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떤 단기적 화평을 위해서 타협했것 보다는,

조금 더 딱딱하고 거칠더라도 원칙을 지켜냈던 것이 더 옳다고 드러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최근,

일본에서 터진 큰 사건(!)을 접하며,

그리고 그 뉴스에 반응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다음주에 열리는 일본의 집회를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보면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외로움

얼마전, 

어떤 사람과의 대화중에, 그 사람이 자신은 외롭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사람의 상황을 보아, 그렇게 느낄만 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사랍의 입장이되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과연 나는 외롭지 않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음…

나는 외롭지 않은걸까?

사실 할 일은 늘 많이 널려 있다.

그래서 참 바쁘다.

그리고 계속 일이 떨어진다.

그래서 참 바쁘다.

그런데,

바쁘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음… 나도 외롭다. -.-;

나를 활용해서 무언가 일이 되게 해보겠다는 사람들,

나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를 보며 어설프게 훈수를 두거나 비판을 하는 사람들,

등등은 있는데…

정말 내 생각과 고민과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정말 참… 잘 없는 것 같다.

정말 내 생각을 가감없이 깊이 나누고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냥 이 외로움은 어쩔수 없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를 이해시키려면 내 생각의 궤적을 다 설명해주어야 하고, 그 과정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상대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작업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 같다.

외로운 것이 힘들지는 않지만,

때로… 만일 내가 외롭지 않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나는 검소하지 않다!

민우는 늘 내가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다고 놀린다.

그러면서, 내가 늘 무언가를 사는 기준은 ‘싼거’ 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런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정말 ‘싼거’를 좋아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비싼거를 별로 즐기질 않는 것 같다.

내게는 50불짜리 스테이크나, 5불짜리 햄버거가 뭐 그냥 거기서 거기다. ㅎㅎ

15불짜리 청바지, 10불짜리 티셔츠만 입고 다녀도, 불편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돈 쓰는게 뭐 별로…

그렇게 보면 나는 검소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럴까?

얼마전에 내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래도 사고 싶은 거 다 산다”고.

음…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가령, 최근…

나는 무선 마우스 하나가 꼭 같고 싶었다.

쓰고 있는 마우스가 고장이 나서 잘 안되었는데… 그나마 집에 돌아다니고 있는건 뭔가 손에 잘 맞지 않아 영… 불편했다.

한 2-3일 견디다가…

어느날 퇴근 길에 Fry’s에 들려, 20불짜리 무선 마우스 하나를 턱 샀다.

뭐 물론 비싼거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품도 아니다. (꽤 마음에 든다. ㅎㅎ)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나는 내가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불과 2-3일을 버티지 못하고 사질러 버렸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식인게 많다.

내가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게 별로 비싼 것들이 아니어서 그렇지,

대개 사고 싶다고 생각되는게 있으면 그리 오래 참는 것 같지 않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결코 검소하지 않다.

절제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이 들 수록 몸에 배어야 하는데 말이다.

신학의 부재일까, 경건의 부재일까

복음주의의 위기, 

한국 교회의 몰락…

뭐 이런 거창한 이야기 하기 이전에…

내 신앙이 이토록 엉망인건,

도대체 신학의 부재일까, 경건의 부재일까.

대개,

주로 말씀 많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부재라고 이야기하고,

주로 기도 많이 하나는 사람들은 경건의 부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결국 모든 신앙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결국 모든 신앙의 위기는 경건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내게 부족한건 신학일까, 경건일까.

조금 더 확장 시켜서,

내 가족을 놓고 보았을때,

우리 가족에게 부족한건, 신학일까, 경건일까.

내가 속한 공동체는,

신학이 더 필요할까, 경건이 더 필요할까.

미국 내 한인 교회는?

코스타는?

한국 교회는?

내가 속한 신학 노선(복음주의)는?

한동안 나는 이 모든 문제를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은, 이것이 혹시 경건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악질?!

옛날 김교신 전집을 읽으면서 계속 마음에 남았던 구절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소위 성서조선사건’을 통해 김교신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서 그들에게 한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99% 그냥 평범하더라도,

내가 가진 신앙은 결코 내 일상과 내 바운더리에만 갖혀 있을수 없다.

내 신앙은,

세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보기에,

내가 정말 ‘악질’인가?

믿음이 쉬운 길?

예전에 들었던 소위 ‘gospel presentation’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었다. (뭐 지금도 이런 얘기 많이 듣는다.)

인간은 죄에 빠졌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얻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제 힘들게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쉬운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음….

뭐 대충 맞는 얘기이다. – 한가지만 빼고.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행위로 구원얻는 것보다 ‘쉬운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서 struggle하는 불가지론자들과 대화해보라.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걸 믿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게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믿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믿음은, 쉬운 길은 분명 아닌 듯 하다.

행위로 얻는 구원이 가진 기본적인 concept은, 초월적 존재를 비초월적 방법으로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가진 기본적인 concept은, 초월적 존재에 초월적 방법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요체가 아닐까 싶다.

믿음이 쉽지 않다는 것은, 평생 교회에 다녀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지금도, 오늘도, 내 믿음없음과 싸운다.

과연 이런 믿음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리고, 구원이, 믿음의 완벽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함에 안도하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