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었으나, 지금은 쓸 수 없는 글

사실 지난 1년여동안,

나는 내 정치적 색깔이 확연하게 약해졌다.

여전히 내 정치적 선호는 꽤 분명한 편이기는 하지만,

예전과 같이 어느 특정 정치세력이나 집단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게 되었다.

왜 그런 변화가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시간을 내어 좀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그 글을 쓸 수 없다.

지금은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정치적 균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goodness)이, 어느 한쪽 정치집단에 있지 않음을 계속 기억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

87년, 대학교 1학년일때, 나는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 모든 가치는 성공과 성취에 있었고, 

공의, 정의, 민주, 인권 등의 개념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89년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가 가장 후회한것은, 그 결정적인 pivotal point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

세상을 바라보며, 역사를 바라보며, 민족을 바라보며, 그리고 신앙 앞에서…

또 다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수는 없겠느냐는 기도를 해본다.

지진!

지난 주일 새벽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6.1이면, 그래도 꽤 큰 편인데…

우리동네 사람들도 새벽에 흔들림에 잠이 깬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내도 새벽에 침대가 흔들려서 깨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땅’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

그래서 땅을 기준으로 사람들은 기초를 세우고 경계를 정하고… 등등의 일을 한다.

그런데,

그 땅이 움직이니 정말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땅도, 때로는 움직인다.

땅은 우리가 의지할 reference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고집도 마찬가지이다.

내 모든 관념체계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쌓아놓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전제 자체가 흔들리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심치않게… 이런 일들을 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꼭 붙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심하게 흔들어, 그것에 기댈 수 없도록 만드신다.

땅도, 내 신념도, 

그것을 reference point로 삼을 만한 것이 못된다.

지진은, 

혹은 내 신념을 흔들어 놓는 인생의 경험은,

나를 겸손하게 한다.

그래서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든다.

지진을 간접경험하며, 잠깐 해본 생각이었다. ^^

회사 일을 limit 하기, 하나님을 신뢰하기

한달 쯤 전,

회사에서 10시간 있지 않기.

회사일 하루에 12시간 이상 하지 않기.

이렇게 두가지를 결심했었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다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후로 대충 잘 지켰던 것 같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렇게 하면서도 일을 크게 빵꾸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8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는 날이 꽤 있었지만, (사실 이번주는 거의 매일 그랬지…)

가서 처음 40분 정도는 혼자서 말씀 기도,

점심시간에 한시간 뛰고…

뭐 그렇게 했으니… 

그런데,

그렇게 일의 양을 줄인다고 해서, 내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 깨닫고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해야하는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고,

한밤중에 깨어서 ‘다른나라’에서 날라온 이메일들을 보고 있고,

무리하게 계획을 짜고서는 그걸 해내야한다는 pressure를 받고 있다.

하나님을 그래도 이만큼 믿어 왔으면,

좀 하나님을 척 잘 믿어야 하는거 아닐까.

도무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카타굼의 헌아식(?)

카타굼에 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한번 생각해본다.

그때 유아세례를 했을지 잘 모르겠지만… 

혹은 요즘 교회에서 하는 것 처럼 헌아식 뭐 그런걸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그런걸 했더라면, 그렇게 어린아이를 두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 아이도, 이렇게 하나님 백성으로 자라도록 드려지게 되는데…

그럼 이 아이도 이 지긋지긋한 카타쿰에서 살겠구나.

저 화려한 로마의 세상 속에서, 출세라는 것은 평생 꿈에도 꾸지 못하고, 겨우 사자밥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살겠구나.

시저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것과 같이 평생을 살게 되겠구나.

주님,

이 아이가 그렇게 평생 고생하면서 살게 될거라는거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삶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드립니다.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정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신앙의 비장함을 잃어버린 세대 속에서,

비장한 신앙을 생각해본다.

또다시, 뉴스 M의 기사에 대한 반박 글

뉴스M (미국 뉴스앤조이)에서 원래 글에 대한 변호의 글을 올렸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

그래서 나는 또 거기 아래에 답글을 달았다. -.-;

=====

양재영 기자의 응답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여전히 비판과 그 변론의 논리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1. 저는 여전히 일부 목회자의 도덕적 문제가 복음전도-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문제제기와 논리의 흐름이, 적어도 제게는 충분히 convincing하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2.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급했던 것 같이,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양기자님의 원래 글이나, 이번에 쓰신 변론의 글 모두,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가정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글에서는 그 점을 매우 explicit하게 쓰셨고,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에둘러서 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하려면, 코스타가 이야기했던 message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전 반박 글에서 썼던 것 같이, 코스타가, 적어도 지난 10여넌동안 담아내고자 했던 주제와 그 주제문을 읽어본다면 그 비판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금년에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 전체집회에서 나누어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 적어도 일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총론과 거시는 옳은데, 각론과 미시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제가 반론 글에서 적고자 했던 것은, 그 총론과 거시의 관점에 헛점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총론과 거시의 내용을 정확하게 포괄하려면,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급한 data들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건 참 잘 만든 자동차입니다. 다만 강판이 좀 약하고, 브레이크에 약간 문제가 있을뿐” 이라고 한다면, 잘 만든 자동차라는 거시적 선언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양기자님이 지난 글에서 언급한 코스타 비판의 총론은 이렇습니다.

코스타는 처음부터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복음전도만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규동 목사의 이런 문제도 생긴 거다.

실제로 보면 코스타는 이러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여태껏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그대로다.

저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했습니다.

코스타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민중의 아편을 외면한것과 일부 목사의 도덕적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지금 코스타의 모습을 보면 제시한 ‘코스타의 문제점’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저는 제 논지가, 양기자님의 총론과 거시에 대하여 충분히 근거있는 반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4.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에 대해.

이것은, 양 기자님의 글에서도 지적하셨던 것 같이, ‘통계의 적확함’이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리적 거부감’이 정확하지 못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라면, ‘편견’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지난 5년간,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 미국 코스타 강사들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정말 돈많은 목사들만 찾아올 수 있는 집회였는지.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고 있다.

– 코스타의 메시지와 정신이 자본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data가 충분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을 지지하는 데이터들을 더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 관한한 말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 코스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5. 비판의 촛점이 자꾸만 옮겨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김규동 목사의 성추행의 문제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는 신학적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코스타는 자본에 덫에 걸려 있다. 돈이 많이 들고 스타강사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라고 옮겨갔습니다.

처음 비판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대로 반론을 폈고, 이번 두번째 양기자님의 글에 대해서도 역시 정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론을 씁니다.

6. 코스타가 완벽하다고 항변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아닙니다. 코스타의 한계가 명확하게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를 향해 하고 싶은 비판의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답글과 이번 답글을 통해서 쓰고 싶은 것은, 그 비판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 기자님이 써주신 변론의 글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셔도 좋았을 한 독자의 답글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자세히 변론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양기자님의 의도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차 한잔 마시면서 좋은 대화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야 미국 한 지역에서 그냥 회사다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서 저 같은 사람도 더 배우고 자라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귀에 잘 들어오는 설교

우리 교회 목사님은,

정말 오랬동안 알고 지냈다. ^^

30대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렇게 함께 많은 것을 share했다.

그렇지만, 매주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렇게 오래 함께 했던 분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이번주,

목사님의 설교가 유난히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설교의 내용은 ‘죄’에 대한 것이었는데…

음…

그 내용이 나와 유난히 더 relevant해서였던 것 같지도 않고 (아, 물론 나는 죄인이지만서두 ㅎㅎ)

목사님의 그날 설교가 좀 다른 format을 취했다거나 했던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특별한게 없었는데, 그렇게 귀에 쏙 들어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뭐 딱이… 목사님이 설교를 이상하게 하신 것 같지 않은데, 

도무지 그 설교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남지도 않고 이해도 안되는 날이 있다.

이게 순전히 내 영적 상태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유난히 설교가 귀에 잘 들어왔다고 느낀 날에는 목사님도 ‘이번건 잘 했다.’고 느끼신 날일까. ㅎㅎ

한번 여쭈어봐야 겠다. ^^

카톨릭 신자가 되라!?

프란시스코 교황, 참 마음에 많이 든다. 

어찌보면, 예수를 믿는다면 누구든 당연히 해야할 이야기들과 행동들인데, 

그 말과 행동들을 보면서 감동받고 환호하게되는 현실이 참 마음 아프다.

그럼에도, 

프란시스코 교황은 참 멋지다.

요즘 같아서는,

새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신교로 오지 말고 카톨릭으로 갈 것을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수가 없다.

물론,

나는 도저히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할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들이 참 많이 있으므로, 내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신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냥 ‘흔한’ 개신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저 목사의 왕국 신민이 되어,

그저 자기 욕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추구하면서, 반지성적 비이성적 행동만을 따라가게되는 것보다는,

조금 ‘잘못된’ 신학의 입장을 가지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정말 처절하도록 절망적인 생각 때문이다.

뭐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카톨릭 쪽에서도…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 한국 카톨릭의 제일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둘다 별볼일 없긴 만찬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

정말 예수 잘 믿어야 겠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겠다.

예수 잘 믿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야겠다.

짜증이 나는 것과 짜증을 내는 것

살다보면 짜증나는 일들이 없을 수 없다.

뭐 하루에도 몇번씩 그런 일들이 있다.

특히 나처럼 ‘까다로운’ 종류의 사람은 별의별일에 다 짜증이 난다.

나는 그렇게 쉽게 짜증을 느끼는 내가 참 불만족스럽다.

예수님을 믿으면 좀 뭐가 나아져야하는거 아닌가.

뭐 솔직히 말하면… 사실 많이 나아진게 이 모양이긴 하다.

내가 대학교 1,2학년때의 내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사람된거다.

그런데,

짜증을 느끼는것과 짜증을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짜증을 내는 것은, 자신이 짜증스럽게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왜 짜증을 내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짜증을 내는 행동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나의 감정 표현이, 나를 둘러싼 다른 이들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직접적인 선언인 셈이기 때문이다.

남들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내 감정을 일단 쏟아붓고 표현해야겠다는…

나는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일까?

음…. 아주 그런 사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예전에는 아주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짜증을 내는 행동을 하거나 기분나쁜 것을 숨기는 일을 잘 못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짜증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짜증을 내는 행동을 보는 것을 참 잘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구든 주변에서 짜증을 내면, 나는 그 모습에 심하게 upset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 때문이다.

“어쭈… 이거 봐라…. 아니, 그래서… 너는 네 감정 표현을 위해서 내 감정이 상하는 것도 괜찮다 그거냐?”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서, 대단히 당황하고, 마음 속으로는 많이 upset하고, 그리고는 아주 격렬하게 그것에 대항하던가 아니면 그것을 완전히 피해버리곤 한다.

(누구든 내게 한번 시험해보라. 내게 짜증을 내면, 나는 쟤가 왜 저러나 싶게 화를 내거나, 아니면 확 말이 없어지고 당신을 피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조금 더 내 생각의 흐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아니 나는 뭐 짜증 낼줄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짜증 내고 싶은데, 말 막하고 씩씩거리고 싶은데, 정말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거야. 너는 뭐가 잘났다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참고있는걸 맘대로 터뜨리는건데?”

결국,

내가 짜증 내는 것 보는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짜증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그 짜증을 아주 힘들게 억누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과 같은 훈련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야하는 것을 하고 싶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고싶지 않게 되는 근원적 변화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겉보기의 행동이 더 상냥해지는 것과 같은 superficial한 transformation이 아니라,

사람의 근원 자체가 변하는 일들이, 복음이 내게 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견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

A little bit too much?

한동안 회사일이 좀 manageable 하다 싶었는데,

최근엔 좀 심하다 싶어지고 있다. ^^

아침 7시 conference call부터 어제 밤에는 밤 11시 반 conference call까지….

지금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큰 activity 하나에 큰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밤에도 중간에 깨어서 이메일 확인하고, 잠도 잘 못자고…

어제는 출근길에,

내가 이렇게까지 회사일 하는게, 정말 의미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다.

물론 이렇게 해서 돈도 벌고, 그걸로 먹고 살고… 뭐 다 좋은데…

정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정도로 이렇게 일을 하는게…

Does what I do really matter?

결국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게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질문의 궁극적 종착점은,

내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인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반복해서 점검하고 다시 확인하는 일이 분명 꼭 있어야 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에는, 내가 지루하게 견디어내고 있는 일상이, 

그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크신 주권 아래에서 내 지루한 일상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지구를 구하는’ 일일 필요는 없다는 것.

등등을 인정하고,

내 지루한 일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소위 자신이 혼자 세상을 구원할것같이 달려드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너무나도 지루하고 지치는, 그리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것 같다.

가장 기뻤던 순간들, 가장 슬펐던 순간들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각각 20개씩 추려서 정리하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가 summarize 될 것이라고 하셨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나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을 각각 20개씩 정리해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하자면 어떤 순간들이 있을까?

음….

머리 속이 멍~ 해지면서 아주 막막해졌다.

나는 어느순간부터인가… 

손에 꼽을만큼 기쁘고 슬픈 일들이 없었나보다.

그건,

내게 기쁘거나 슬픈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 물론 아니다.

왜 그런 일들이 없었겠나.

물론, 나는 삶에서 소소한 기쁨과 슬픕을 경험하고 산다.

가령, 아내와 민우와 함께 장난을 치고 산책을 하는 순간이 참 감사하고 기뻤다.

하이디를 입양해와서 아내와 민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뻤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많이 슬펐다.

‘아빠’를 생각하며 우는 아내를 보며 참 많이 슬펐다.

그런데,

그런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내게 기억될 순간으로 남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벤트’를 만드는 방식이나, ‘성취’를 해 내는 방식이나, ‘목표’를 이루어내는 방식 등이 아니라…

연속된 시간 속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이 더 건강한 것일까?

음… 글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