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아저씨

내가 지금 있는 직장은,

Lenovo가 acquire한 start-up company 이다. 

7년전 자금 흐름이 여의치 않아 문을 닫았다가, 7년만에 Lenovo가 그 기술을 이용하려고 acquire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룹에는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추어온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R 아저씨이다.

우리 그룹에서 “사무”를 담당하고 계신 분인데…  60대인 인도 아저씨다.

사람은 참 좋다. 늘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아저씨 스타일하고 잘 안맞는다. -.-;

회사에서 정말 일이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으면, 와서 주말은 어떻게 지냈느냐, 자기는 손녀와 함께 잘 쉬었다…는 식의 인사를 10분씩 하고 간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어서 아무래도 빠릿빠릿한게 많이 떨어진다.

뭔가 사무관련된 일 하나를 부탁하면 제때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꼭 내가 두번 세번 가서 다시 확인해야한다.

단순한 것도 몇번씩 설명을 해 드려야 겨우 이해를 하신다.

최근에는, 독일로 보내야하는 중요한 sample 하나를 홍콩으로 보내는 바람에, 내가 완전히 panic이 된 일도 있었다. 분명히 내가 이메일로 그 package는 독일로 가능하면 빨리 보내야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아저씨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걸 홍콩으로 보내버렸다. -.-;

덕분에 거의 3만불 정도를 날려버릴 뻔 했는데… 내가 이리로 저리로 전화를 해가며 겨우 겨우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완전히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아니, 도대체 왜 이 회사는 저런 아저씨를 계속 데리고 있는 걸까. 더 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말이야. 저 아저씨가 일을 조금만 더 잘하더라도 우리 그룹의 productivity가 훨씬 더 좋아질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이렇게 극도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더듬거리며 일하고 있는 이 아저씨를 조금 더 품고 있어줄 여유가 없는 걸까.

정말… 나는…

결국 이런 아저씨는 효율성이라는 이름하에 퇴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 아저씨보다 더 일 잘하고 성실한 젊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놔두고 이 아저씨가 버벅거리는 것을 참고 있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뭐 내가 이 아저씨를 어떻게 할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이 아저씨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R 아저씨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Christian hospitality의 issue가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주의?

최근 한국에서, 

한 극우 언론인이 총리 후보로 낙점 되었는데, 이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고 기독교인들 모임에서 이야기했다가 완전히 인터넷에서 뒤집어 지고 있다. -.-;

(어제 그분이 자신 사퇴를 함으로써 이 일이 일단락지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우선,

나는 이 극우 언론인과는 정치적 견해를 대단히 달리 한다.

나는 이 사람이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뜻’ 이라는 것을 쉽게 ‘들이댄’ 것에 대해 몹시 마음이 불편하다.

아니… 그 정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신앙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건가 싶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게다가 소위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문 모씨 지지하며 살려내기에 총력을 하다는 모습은 안쓰럽기 까지 하다. 아니… 그 양반들이 왜 그렇게 되셨을까…

그.런.데.

약간 생각을 바꾸어서 보면,

이 극우 언론인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이 극우 언론인을 사정없이 ‘디스’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지극히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혹은, 다소 좁은 민족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나는 신학적 견해가,

평화주의의 입장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제3의 목소리’를 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보이지/들리지 않는 걸까 하는 것이 궁금하다.

‘Generosity’에 대한 아땅님의 글

지난 금요일, 아땅님이 댓글을 써서 올리셨는데, 함께 생각해보기에 좋은 내용인 것 같아 허락을 받아 올립니다. ^^

===

시카고 코스타 주강사님들 마르바 던 교수님과 김병년 목사님 말씀 기대합니다. (참석은 못하지만 음성파일로라도 들을 수 있기에^^)

근데 두분 글들을 읽으며 들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에게 책임이 돌려지는 ‘약함의 문제’였습니다

마르바던이나 김병년 같으신 분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 개인에게 귀책되지 않는 사유로 약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적 육신의 질병, 그리고 가족의 아픔으로 찾아오고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아픔의 일들이었죠. 이런 것들은 제럴드 싯쳐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우워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분들도 비슷한 상황을 걸어갔고 그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나눠주셨던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가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개인으로 책임을 돌리는 문제들에 대해서, 그것에 귀인한 약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말씀하신 게으름과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사유는 니가 책임져야 하는 consequence예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요?

————

제가 가지는 첫번째 포인트는, 흔히 우리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개인의 consequence로서의) 약함이 진짜 개인의 책임으로만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머리 나쁜 사람에게 “넌 머리가 나쁘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한다, 머리 나쁘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 넌 머리가 좋으니까 잘먹고 잘사는 것이 당연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고 나쁜것이 바꿀수 없는 선천적 요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바꿀수 없는 생래적 요소에 대해서는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물을 수 없다라는 것이 어느 정도 합의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어떤가 생각해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넌 게으르니까 니가 그 결과를, 그 짐을 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게으르니까 가난하게 살아라” 음…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동의합니다. 그걸 부드럽게 말하면 ‘각자가 뿌린 씨앗의 consequence니까…’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게으름 혹은 삶의 태도는 은연중에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고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언제든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에 그러한 이야기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짜 그럴까? 이런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도 개인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산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가운데 처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삶의 목표나 동기도 주어지지 않는 가운데 있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굳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개인에게 “니가 책임져야해, 넌 게으르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가 그런 게으름 때문에 약함 가운데있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약함의 신학”에서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거든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막 머리속을 돌아다닙니다. 

(물론 저도 모.든. 못남과 어그러짐을 사회나 시스템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모든면에서 뛰어나고 탁월한 분들이 격는 ‘약함’을 들으며, 

혹시 이 약함의 고백이 사실은 (저자들이나 강사님들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또다른 강함을 추구하는(보여주는) 메세지로 들리지 않을까

 (e.g. 이런 분들 스토리는 TV에 나와도 정말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줄 것 같거든요. 

##(개인이 가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와 노력과 인격으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아무개… 그분 참 훌륭하다.)

또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과는 어디서 접점을 찾을까 고민하다가 대답도 없는 곳에서 해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탁월하지 못하고 제가 격는 많은 약함들이 저에게 귀인하거든요…-.-; )

Generosity

가상의 이야기.

몇년 전이었다.

오영이는 꽤 빠듯한 재정을 아껴가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청바지는 10불-15불짜리 사서 입고, 티셔츠도 20불이 넘지 않는 것만 사서 입었다.

점심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하루에 점심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돈이 $2불이 넘지 않도록 정말 알뜰하게 쌌다. (도저히 회사 식당에서 사먹을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어쩌다 밖에서 뭘 먹으면 좀 양이 많은걸 시켜서 집에 싸와서 한끼를 더 먹기도 했다.

완전 구두쇠로 살았다.

그때,

경제적으로 사정이 어려운, 그리 가깝지 않는 어떤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고민하던 끝에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크지 않은 (그러나 오영이의 경제 수준에서는 꽤 큰) 돈을 그 사람에게 주었다. 그 사람이 부담갖지 않게 하려고 많이 노력하면서 그렇게 주었다.

다행하고 감사하게도 그 사람은 그 돈을 감사하게 잘 받았다.

오영이는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전해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는 오영이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루 2불이 넘지 않는 점심을 먹으며 아껴서 그 사람을 그렇게 도운 것인데,

그리고 정말 직장에서 스트레스 왕짱 받아가며 힘들게 번 돈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 돈으로 값비싼 기호식품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영이는 한달에 한번 어쩌다 스타벅스 드립 커피 사 마시는 것도 벌벌떠는데, 그 사람은 매일 그것보다 더 고급의 커피를…

그냥 그 기호식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영이는 거의 가지 않는 비싼 음식점에 자주 간다거나, 꽤 비싼 전자제품을 사는 등, 자신보다 너 높은 spending을 하는 것이었다.

또 화가 나는 건, 오영이는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보냈는데, 그 사람은 늘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며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음…

도대체 이건…

며칠동안 많이 마음 불편해 하다가, 그 사람과는 연락도 뜸해졌고, 다시 또 그 사람을 돕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을 못본지 오래되었지만, 요즘도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때 불편했던 감정도 생각이 난다.

=== 

최근,

초대교회 공동체를 비롯한 교회 역사 속의 공동체를 상상해 보면서…

과연 그런 공동체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가령,

하루 12시간 밭에 나가 일하는 소작농을 하며 어렵게 번 돈을, 여러 사람이 모아 한 동네 사는 다른 교인을 도와주었는데,

그 교인이, 아주 게으르게 산다거나 혹은 아주 그 돈을 낭비하면서 허비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공동체는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교회 지도자들은 그것을 불편해하는 교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은혜의 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어떤 면에서 이런 이슈를 다르게 다루어 낼 수 있을까?

요즘,

나도 회사 다니며 일하는게 힘이 들기도 하고,

아… 세상에 이렇게 빡세게 맨날 일해서 돈버는데… 정말 돈 벌고 먹고 사는게 쉽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시간이 워낙 없다보니, 내 소중한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정말 많이 아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내 마음이 각박해지는 것을 보면 그냥 사는게 많이 벅차고 힘든 모양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

살면서 

‘내가 틀렸다’ 라고 인정하는게 참 쉽지 않은 순간들을 만난다.

뭐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닌 경우에야, 쉽게 그래 내가 틀렸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꽤 큰 일에대해 그렇게 인정하는것은 사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듯 하다.

특히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름대로의 신념이 강화될수록 더 힘들어 진다.

가령, 80대가 되어서, 자신이 지난 6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꽤 큰 위안을 준다.

내가 반드시 모든 일에 옳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은, 내가 틀려도 괜찮다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종교는, 매우 자주,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의 신념을 강화시켜준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많은경우 대단히 불편하다. 그 사람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자세를 늘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는 그 사람을 옭죄고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당위에 붙들리게 된다.

나를 포함해서, 매우 자주… 

강한 신념을 가진 (혹은 대단한 고집을 가진) 크리스천들을 만나곤 한다.

도무지 자신이 결심한 것을 꺾으려 하지도 않고, 자신이 옳다고 한번 생각한것은 포기하거나 유보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변에 ‘잘 믿는’ 크리스천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참 많이 본다.

나는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모습.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반종교적 가르침이다.

시간이 지나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내 고집, 내 신념, 내 자존심을 점차 꺾을 수 있는 방법을 더 배워나가면 좋겠다.

내가 반드시 옳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

내가 틀릴 수 있는 세상임을 받아들일때에야 비로소 나와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책

20년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은,

에베소서였다. 

복음의 기초를 잘 다루면서도 개인적인 또 공동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잘 그려주고 있어 참 좋았다.

구약 성경에서,

한때 예레이야서를 참 좋아했다.

예레미야를 읽으며 가슴이 녹는 것 같이 그 말씀을 붙들었었다.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이 참 좋았다.

함축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 이방인과 marginalize 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을초대되는 장대한 scale 등이 마음에 들었다.

베드로후서에 꽃혀서 지낸 적이 있었다.

시저치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resident alien의 identity가 무엇인가를 보는데 아주 powerful 했다.

그후, 요한서신이 그렇게 좋았다.

요한이라는 사람이 바라본 예수, 그 예수가 바꾸어놓은 세상과 사람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요즘,

다니엘서를 가지고 QT를 하면서,

이게 완전 짱이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자세에 대하여,

디아스포라 백성의 아이덴티티에 대하여,

장래에 있을 소망에 대하여,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봄에 대하여…

아주 많은 내용들을 정말 멋진 스토리에 담아놓고 있다!

이런 본문이라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앉아 며칠씩 나누기도 하고, 설교도 하고, 설교를 듣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기도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다니엘서에 꽃혔다~ ^^

@ 가만 생각해보면, 3-4년전, 다니엘서를 읽으며 그렇게 완전 꽃혀서 좋아했던 기억이 나긴 한다. 나는 다니엘서를 그냥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인가보다 ㅎㅎ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0)

이번에 나는, 내가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많이 요청을 받았다. ^^

내 아내는 내가 이번에 인디 다녀온 사진들을 보더니, 참 많이 신났네~ 라며 나를 놀렸지만, 

(뭐 사실 신났던 건 사실이긴 하다 ㅎㅎ)

그렇지만 여러가지일로 참 큰 부담들이 있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이 내게는 고통스러웠다.

현장에 가서도, 뭔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특히 지금까지 내게 큰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목요일 저녁 전체 기도모임 인도였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하는 calling을 하라고 부탁을 받았다.

가면서, 간사들이 시키는건, 내가 physically 불가능한게 아니라면 다 하겠다고, 두말 다시 토달지 않고 무조건 기꺼이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갔던 터여서, 그것 역시 SURE~ 하며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그건 내게 큰 마음의 부담이었다.

집회 내내, 복음의 기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내용이, 적어도 전체 집회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터였다.

결국 나는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난 후에 무대에 올라가, 약 10분이 좀 안되는 길이로 짧게 ‘복음을 소개’하고 그것에 응답하라고 초청을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개떡같은(!) 초청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일어섰다.

그중에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신앙이 없는데 지금 코스타에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하며 나와 상담을 했던 여학생의 그 남자친구도 있었다. (나는 악수례 시간에 그 남자친구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큰 마음의 부담은,

내가 그렇게 짧게 소개한 복음의 내용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빠져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heart가 잘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뒤끝 길고 소심한 사람에게는….

이런거 정말 오래 간다. -.-;

아, 결국 내가 복음을 짧게 설명하고자 했을때 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었구나…

코스타를 섬기면서 늘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가시는 방법은 내 사역의 완벽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셨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참 많이 울게 하셨고, 많이 뉘우치게 하셨다.

또 다시 하나님께 많은 빚을 졌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9)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많이 망가진 시대에 해야하는 중요한 일은 다음의 몇가지가 아닌가 싶다.

1. 

그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좀 더 경험한 세대가, 포기하지 않고 그 스토리, inspiration, standard, passion을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성실하게 전하는 일이다.

그것이 그 다음 세대의 변화를 guarantee 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그 세대에게 pace setter가 되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보여주는 일을 해야 한다.

2. 

깊이있는 연구와 사색을 통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큰 흐름이 없을 때에는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소수에 집중하며, 그들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도록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맺어진 통찰의 열매들은, 혹시 후에 있을 다른 ‘부흥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부흥의 시대가 얼마나 부정적인 부작용 없이 건강한 영향력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런 침체기에 이루어진 통찰의 열매들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망가져 있음을 뼈아프게 아파해야 한다.

이대로 괜찮다. 그냥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된다. 는 식으로 기준을 낮추지 말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이 현저하게 compromise 된 시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remind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KOSTA는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다.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학생들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을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역시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 손 붙들고 이야기하는 강사님들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계속 더 엎드려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시도록.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8)

수요일 아침,

화요일 설교자 교회에서 오신 부교역자 한분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좀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으로부터 “그 교회 자랑”을 많이 들었다. ^^

뭐 이런 세팅에서, 자기 교회 자랑하는 강사들을 많이 보았으므로 대단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 교회 이야기는 들으면서 참 부러운 것들도 많았다.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direction들도 있었지만. ^^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께 물었다.

지금 그 교회의 모델이,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되는 모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M 목사님 자리에 다른 누가 와도 그 보델이 작동할까요?

그분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pace-setter (페이스를 셋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그 말은, 내 머리를 띵~ 하고 때렸다.

정말 띵~ 하고, 아주 쎄게 때렸다.

pace setter라.

그래,

비록 그것이 pseudo revival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신앙의 깊은 경험을 한 사람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pace-setter가 되는 일이겠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번 언급하긴 했지만,

내게는 깊은 목마름이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그냥 미적지근하게 하나님을 믿는게 불가능한데.

삶에서 compromise를 하면서는 정말 뼈가 녹는것 같이 아파야 하는데.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목마름이 자신을 바짝바짝 말려야 하는데.

그래서 더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나도 더 그렇지 못하고,

내가 주변에서 접하는 크리스천들중 많은 이들은, 아예 그런 것에 관심조차 갖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는, 그렇게 너무 유난스럽게 하지 말라고 내게 충고를 하곤 한다.

아니, 어떻게 다른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밍기적 밍기적 사는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질 않는 걸까?

아니, 어떻게 대충 헌신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질 않는 걸까?

저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은 다른 분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 내가 해답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준이 있다면,

나는 그 기준을 가지고, 아직 그 경험과 이해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어도 어떤 특정한 영역에 관한한,

pace setter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 시리즈의 첫번째 글에서 이야기한 외로움의 문제가,

이런 일단의 만남과 생각을 통해 많이 정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