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4)

복음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고,

청중에 따라서, 때로는 강조해야하는 포인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에 대한 헌신을 강조해야 할수도 있고,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강조가 자칫 독이 될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를 할때는 청중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 나는 말하자면 그 청중을 꽤 많이 오해하고 message를 준비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assumption은 이것이었다.

(1) 이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이고 원색적인 복음 (하나님, 인간, 죄, 깨어진 세상, 하나님 나라)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오히려 잘 못 들었을 것이다.

(2) 대부분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이야기는 꽤 많이 익숙할 것이다. 오히려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많이 함으로써, 세상을 닮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3) post-modern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음대생이 거의 90% 였다.)

그런데,

이런 assumption은 무엇 하나 적중하지 않았다.

사실 수양회 message를 준비하면서, 그곳의 학생 리더로 부터 그 학생들의 상황, 최근에 했던 성경공부 내용 등등을 듣기도 했고, 어떤 expectation이 있는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나는 꽤 많이 잘 못 짚었다.

우선,

첫번째 것은 맞았던 것같다. 결국 사람들이 많이 반응한 point도 그것이었다. 도대체 십자가 이야기를 별로 들어보지도, 생각도 못해봤는데… 뭐 그런 반응이 참 많았다. -.-;

두번째, 이원론의 문제냐 세속화의 문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청중이 많이 나누어져 있었다.

아주 top leader들은 많은 경우, 세속화의 문제보다는 이원론의 문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지나치게 종교적이었다. 그 정도가… 아주…. 아주… 심했다. 

그런데 그보다 약간 연륜이 짧은 사람들은, 세속화나 이원론문제 자체를 다룰 준비가 아예 되어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 그러나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이원론보다는 세속화 쪽이 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예 생짜배기들… 아예 교회경험 자체가 짧은 사람들은, balance된 고민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던지는 질문도 아주 좋았다.


세번째, post-modern할 것이다라는 assumption 역시… 꽤 많이 빗나갔다. 이쪽 실리콘밸리 쪽에서 만나는 ‘공돌이들’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생각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생짜배기’들의 생각은 여전히 유연했다. 고민의 scope도 더 넓고.


왜 그럴까?

(다음 글에서 좀 더 다루어보겠다.)




Leaving the Big A (9)

Apple에서는,

정말 ‘좋은’ 엔지니어들을 엄청 뽑아간다.

다들 ‘자존심’이 대단하다.

똑똑한 사람이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라고 생각하는 성향이다.

이건, 똑똑한 사람들에게 독과 같다.

건강한 정신, 건강한 분위기, 건강한 문화 등등에 의해 이런 성향이 절제/정화 되지 않으면,

똑똑한 사람들이 전체에 미치는 나쁜 효과는 대단히 크다.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 내가 너보다 더 똑똑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남이 하는 것이 늘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러다보면 남이 하는 것에서 흠집을 잡고, 공격하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런 문화 속에서, 그렇게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게 된다.

내가 있었던 분야의 사람들과 조직은, 이런 독(poison)에 빠져 있었다.

보통 미팅을 하면,

서로 남들의 흠을 잡고, 자신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로는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미팅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그렇게 남을 많이 까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소위 ‘visibility’가 높아진다.

(사람들 눈에 잘 띄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중요하게 되고… 점점 discussion의 방향은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처한 ‘문제’를 meeting에서 드러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S 장로님은 자신의 조직에 있는 사람들을 micro-manage해가며 control하기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은 자신과 자신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냥 내 상상인데…

전에 Jobs가 있을때, 그리고 조직이 훨씬 더 작았을때에는…

이런 ego-centric한 분위기의 논쟁을, Jobs의 카리스마로 잠재우고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이제는 그런 카리스마도 조직 내에서 찾기 어렵고, 게다가 조직이 너무 커져서 몇사람의 카리스마 만으로는 그것이 control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Apple이 잘 안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Apple의 ‘internal system’은 대단히 잘 만들어져 있다.

거의 Idiot-proof 하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이 엉뚱한 짓을 하더라도,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review와 비판 등등을 통해 웬만하면 그것들이 잘 걸러지게 되어 있다고나 할까.

과연 이런 문화 속에서 Apple이 얼마나 더 승승장구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참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이다.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3)

둘째날 아침에는, ‘하나님 나라’ 강의를 아주 쉽게 풀어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내가 흥분(?)해서 약간 어려운 내용까지도 cover하는 실수를 좀 범했다. 그래서 시간 조절을 잘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청년부의 리더들, 그리고 목사님이…

내가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거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영원한 통치의 회복이 있겠지만,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그 시작이 되었다.

뭐 이런 내용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충격이었다.

아니, 하나님 나라 라는 건… 이제는 다들 받아들이는 개념 아니야? 아직도 그냥 죽어서 천당가는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거야?

결국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근거한 이원론적 천국 개념으로부터 한 걸음도 더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냥… 여기에서 결론을 낼 수 없겠다 싶어… 물러났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뭐가 남을까? 그래도 여전히 내가 믿는 신앙이 지금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들과 나는…

과연 같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같은 신앙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Leaving the Big A (8)

대부분의 apple 직원들이 vendor의 직원들을 다루는 태도는 매우 혹독하다. -.-;

많은 사람들이, 꼭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나는 과도한 power가 사람들에게 주어졌을때 사람들이 망가지는 전형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정말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가며 일하는 vendor의 직원들도 많이 봤다.

아니… 그럼 그거 더러워서 안해, 하고 때려치면 되잖아?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특정 기술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거대기업의 횡포를 견뎌내면서 하지 않으면 아예 그 바닥에 붙어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가령,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어떤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생각해보자. 이 회사는 apple, 삼성, 모토롤라, LG 등등의 회사 이외에는 다른 choice가 없다. 이 회사들이 다 하청업체 직원들을 막대하는 분위기라면… 게다가 막 대하는 회사들이 다들 ‘잘나가는’ 회사들이라면… 이런 회사들의 직원은, 그 모욕을 견디어가며… 일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며, 아주 적은 이윤에 만족하며, 게다가 새벽이고 주말이고 쏟아지는 거대기업 직원의 요청에 다 친절히 대답해가며…

apple에서,

나는 끊임없이 이 vendor 직원들을 쥐어짜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어떻게든,

이런 환경 속에서 이 vendor의 직원들이 쥐어짬을 덜 당하도록 노력을 많이 했었다.

심지어는 덜 중요한 경우에는 대충 그 사람말에 속아 넘어가주기도 했고, 주말에는 가능하면 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또… 나는 ‘아시아’에서 만난 vendor의 직원들과,

좀더 ‘인간적인’ 대화를 해보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그 나라의 문화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인생의 목표, 삶의 가치, 무슨 꿈을 꾸고 사는 지 등등..

그리고 가끔은 아주 바보같은 농담도 하고…

상전과 노예, 지주와 소작농… 뭐 그런 비슷한 관계로 설정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를 만난 vendor의 직원들은, 더 혹독하게 쥐어짜는 사람을 만난 경우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렇게 쥐어짜지 않으면… 결과가 제때 나오지 않을 때도 많고, 그러면 그 피해가 결국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도 하였다.

apple의 직원이 micro-manage 해가며, 쥐어짜는 것에 그냥 익숙해져버려서… 이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깨어진 시스템 속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렇게 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면 아예 안되는…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

후배들 화이팅~ ^^

그래도 나름대로 KOSTA를 열심히 섬겼었다.

KOSTA 생각하며 기도도 많이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기쁨도 컸다.

KOSTA일 제대로 못해내는 악몽도 많이 꿨고 ^^

생각해보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전수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늘부터,

후배들이 KOSTA 사역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

뉴욕에 벌써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늘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 하나 가득이다.

함께 하는 것도 미안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우리 섬기는 후배들을 생각하며,

가슴 찡~ 하지  않게 되는 때가 언겐가는 올까?

우리 후배 간사들 화이팅!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2)

자평하건대, 나는 선동가로서의 소질이 많다.

예전에는 manipulative한 나쁜 동기를 가진 선동가의 모습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적어도 내 선동이 나쁜 동기에서서 비롯되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manipulative한 모습은 여전히 내게 다분히 남아 있다. 때로는, 내가 대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manipulation인지, 진정성있는 passion인지 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도 애매할 때도 많다.

이런 선동적인 내 성향은, 나를 대단히 위험한 설교자가 되게 한다.

대중의 상태를 보아가며, 그들을 감정적, 이성적으로 선동하여, 

genuine transformation이 아닌 superficial excitement를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선동적 성향을 가져서 그런지, 내 눈에는 그런 선동가들이 참 잘 보인다. 그리고 그런 선동가들이 대개는 많이 불편하다. 내가 그분들의 선동에 manipulate 된다는 기분 때문일까.

이번 수양회 설교를 하며, 참 많이 흥분했다.

내 아내는 떠나기 전에 “소리 지르지 말라”고 내게 주문했는데, 막상 학생들을 보고 message를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몹시 흥분이 되어 땀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며 때론 울먹이며 열정적으로 message를 하게 되었다.

종교적 엑스타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꽤 많이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이것에 관해 더 다루어 보겠다.)

….

선동적인 성향을 가진 나도, 막상 설교를 마치고 나면,

내가 단상에서 보였던 모습이 manipulative한 선동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genuine한 passion을 표출이었는지 하는 것을 분별해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분별이 잘 되질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의 눈물이… 내 manipulation의 결과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였는지 잘 분별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호텔방에 돌아와서는, 한편 감사하고, 한편 뿌듯했지만… 또 한편으론 몹시 마음이 괴로웠다.

Leaving the Big A (7)

Apple은, 정말 막강한 권력을 가진 회사이다.

뭐 결국 그 권력은 Apple이 가진 막대한 돈에서 나온다.

Apple의 직원은, 보통 자기보다 두직급 정도 높은 사람을 상대한다.

말단 엔지니어가, 다른 회사의 부사장 급과 맞장을 뜰때도 있다. -.-;

그렇기 때문에, Apple에 다니면서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Vendor (하청업체)들이 소유한 기술의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도 요구하면 다 알려준다.

물론 처음부터 다 잘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Apple이 들들 볶고 볶고 또 볶아서… 거의 모든 비밀을 다 말해주도록 만들고야 만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해야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 vendor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다 알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람들을 ‘control’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pple은 vendor들의 기술만을 control 하는 것이 아니다.

가격, 심지어는 profit margin 까지도 control 한다.

가령,

Apple에서 마우스를 만든다고 하자.

그러면 Apple에서 design을 한다. (이것도 이걸 잘 하는 vendor와 함께 할때도 많다.)

A 라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vendor로부터 플라스틱에 관한 모든 기술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B 라는 반도체 chip을 만드는 vendor로 부터 마우스에 들어가는 chip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C 라는 레이저 기술 vendor로부터 마우스에 쓰이는 레이저 기술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D 라는 마우스 조립 회사로부터 조립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그리고 나서는,

Apple이 서로 그 회사간의 정보교류, 적정 가격 책정, 기술 교류 수준 모든 것을 다 control 한다.

대개는, Apple이 모든 기술 정보를 다 가지고 있고, 나머지 회사들은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갖는다. 기술적으로 종속되기 싶상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vendor들에게 아주 작은 폭의 (쥐꼬리 만한!) profit margin이 남도록 가격을 책정한다. 

그리고서 Apple은 30%의 profit margin을 남긴다.

그야말로 기술로, 돈으로, 거의 모든 것으로…

vendor들을 자기 밑에 종속 시키고,

자신은 막대한 이윤을, vendor들에게는 아주 소폭의 이윤을 분배해준다.

현대판 지주와 소작농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일을 즐겼을까? No way…

내가 이런 일을 잘 했을까? Oh… Yes…

나는 그런 내가 몸서리치게 불편했다.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1)

이 블로그에서 쓴 것과 같이, 지난 주말, 미국 중부의 어느 교회의 청년부 수양회에 강사로 다녀왔다.

참 오랜만에 그런 세팅에서 설교를 했는데, 나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A 회사’를 떠나는 내 transition에 관련된 시리즈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주말 수양회 설교를 하면서 느낀 점들이 많아, 

두가지 시리즈 글을 한꺼번에 써보기로 하겠다.

우선 내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은 이것이었다.

‘무조건 기본적인 것을 다루자’

그래서,

그쪽 교회 청년부에서, Vision, Calling and Life 라는 주제로 이야기해주었으면 하고 부탁했을때,

‘Calling’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대한 내용으로

‘Vision’은 이 땅에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대한 내용으로,

‘Life’는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내용 (Lordship)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었다.


내 나름대로,

적어도 내 생각에,

내 신앙의 기본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룬 셈이다.


순전히 나타난 ‘결과'(?)들만을 보면,

설교의 방향도 잘 잡았던 것 같고, 

사람들의 반응도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그 청년부에서 여러 리더들이 마음을 많이 쓰면서 복음을 소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수련회 마지막날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로 영접하겠느냐는  초청에 참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너무 자의적인 신앙 생활에 매달려 있다고 고백/회개 하고, 새롭게 신앙을 재정비 하겠노라고 일어서서 헌신하였다.

message를 마치고, 눈물 범벅이 된 청년들이 내게 찾아와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마치고 난 지금,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Leaving the Big A (6)

장로님 S씨를 접하면서, 나는 참 여러가지 질문이 생겼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질문이 생겼다기 보다는 있던 질문이 깊어졌다.)

1.

과연 S씨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S씨는 과연…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죽어서 천당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좀 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그 큰 scale의 내용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복음, 신앙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정말 그런 복음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2. 

많은 경우, 우리는 ‘악인’을 규정하고 그 악인을 정죄하는 것으로 신앙적 행동을 define하곤 한다.

그런데, 이토록 심하게 깨어진 세상 속에서, ‘악인’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한 걸까?

시편에 그토록 나오는 ‘악인’에 대한 정죄와 절규는 이런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좀 더 많이 stretch 해서, 히틀러는 악인일까? 스탈린은? 김일성은? 

그런 사람들과 나 사이에 과연 어떤 간극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3.

무능함/무지함은 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S씨가, 정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지해서, 복음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하자. 그래서 나름대로의 의도는 선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남기는 일들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S씨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는, 결국 악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일종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악함’이라고 define 하는 것은, 대단히 초실용주의적 어긋난 접근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수양회 설교

참 오랜만에,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전 직장에 다니면서 여러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기회에 적극적으로 involve 하지 않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신앙/신학적 고민이 나름대로 깊어, 마음을 담아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는게 자신이 없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 수양회 강사로 가는 이 교회로 부터는,

작년 수양회에 한번 초청을 받았다가 거절했는데,

이번에 또 한번 부탁을 받아 정말 딱 잘라 거절하기가 많이 어려웠다.


작년 11월에 부탁을 받고, 정말 많이 많이 망설이다가, 

순전히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가기로 약속을 했다.


이번 수양회 message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힘들었다.

12월 마지막주말까지 설교 개요와 소그룹 성경공부 discussion 자료를 보내주기로 했는데, 결국 deadline을 넘겨야 했다.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아주 막막하게 느껴지는 기간이 아주 길었다.


결국, 복음의 개인적 차원, 복음의 거시적 차원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헌신함 이렇게 세번의 message를 하기로 가닥을 잡고, 정말 막판까지 message 준비를 하고… 

이제 오늘 저녁 message를 시작으로 수양회를 시작한다.


가끔, 아주 자신있게 message를 준비하고 갔다가 그야말로 영~ 별로인 경험을 하기도 하고,

혹은 별로 자신없이 준비하고 갔다가 하나님께서특별히 함께 해 주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이 심겨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참 오랜만에,

정말 자신없이… 설교하러 떠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긍휼함을 베풀어 주시길…


(시리즈 글은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