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산주의자의 편지

*** 다음은 멕시코 시에 사는 한 미국인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약혼자에게 약혼을 파기하며 쓴 편지이다 ***


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재난으로 고난을 겪소. 총에 맞기도 하고, 교수형을 당하기도 하며, 린치에 처하기도 하고, 엄벌을
받기도 하고, 투옥당하고, 비방을 받으며, 일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오. 온갖 방법으로 수난을 당하는 그런 사람들이오. 우리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소. 우리는 궁핍하게 살고 있소. 우리는 번 것중에서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 돈은 모두 당에 바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주 영화관이나 연주회에 갈 시간도 없고 돈도 없소. 또
아름다운 집과 새 차를 살 돈도 없소.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르오. 그렇소. 우리는 광신자들이오. 우리의 삶은 오직 한
가지 궁극적인 것의 지배를 받소. 그것은 바로 세계 공산화를 위한 투쟁이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인생
철학을 갖고 있소.

우리는 뭔가 목숨을 걸 만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소. 인생의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있소.
우리는 인류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개인의 하찮은 정체성을 던져 버린다오. 그리고 개인 생활이 고되다할지라도 또 당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가 상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오. 비록 매우 작은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인류를 위해 새롭고 좀더 나은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하면 말이오.

내가 진심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이오.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은 나의 생명, 사업, 종교, 취미, 애인, 아내, 여왕, 낙과 즐거움이오.
낮에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꾼다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더욱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사로잡히게 되오. 그러므로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내 삶을 지배하는 이 힘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친구나
연인과는 사귈 수 없으며 대화조차 나눌 수 없소. 나는 사람과 책과 사상과 행위를 그것들이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끼치는 영향과
또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평가하고 있소. 나는 이미 내 사상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도 갔다 온 적이
있소. 또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있소.


How dedicated are you to what you believe in?

존 화이트, 헌신의 댓가, IVP 에서 퍼옴.

“반윤리적” 기독교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크리스천 청년의 때에 읽어야 할 책들

IVF의 성향을 많이 띄고 있지만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크리스찬 리더들의 필독서 들입니다~
저도 반정도밖에 읽지 못한 것 같네요…

IVP 주제별 권장도서

I. 복음의 기초
1) 하나님과 창조
하나님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 CLC)
창세기의 시공간성(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2) 죄와 구속
기독교의 기본진리(죤 스토트, 생명의 말씀사)
그리스도의 십자가(죤 스토트, ivp)

3) 예수님의 부활
부활의 증거(노르만 앤더슨, ivp 소책자)
예수님의 부활(마이클 그린, 생명의 말씀사)
누가 돌을 옮겼는가?(프랭크 모리슨, 생명의 말씀사)

4) 믿음과 신앙
편견없이 기독교를(죤 알렉산더, ivp 소책자)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죤 스토트, ivp 소책자)
복음이란 무엇인가?(김홍전, 성약)
하나님의 열심(박영선, 새순)

5) 복음에 대한 확증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박영덕, ivp)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이래서 믿는다(폴 리틀, 생명의 말씀사)
순전한 기독교(C. S. 루이스, 홍성사)

6) 기본적인 신앙생활
균형잡힌 신앙생활(챨스 라이리, 생명의 말씀사)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갓프리 로빈슨 외, 성서 유니온)
신앙 생활 지침(죤 화이트, 생명의 말씀사)
신앙의 도리(김홍전, 성약)
영혼을 위한 10가지 비타민(알리스테어 벡, 두란노)
중생자의 생활(김홍전, 성약)

7) 구원의 확신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두란노)
그리스도인의 확신(죤 스토트, 엠마오)
회의에서 확신으로(알리스터 맥그래스, ivp)
구원 그 이후(박영선, 새순)

8) 교리 기초
복음주의자는 무엇을 믿는가?(ivp)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하워드 마샬, ivp)
기독교교리 핸드북(브루스 밀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기독교신앙 핸드북(패커 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II. 균형 잡힌 제자로서의 삶
1. 하나님과의 관계
9) Q. T.
조용한 시간(프랭크 호튼, 생명의 말씀사)
묵상의 시간(윤종하, 성서 유니온)
경건의 시간(ivp)
나의 주 나의 하나님(송인규, ivp)

10) 기도
기도 걸음마(스티븐 크로츠, ivp)
기도(O. 할레스비, 생명의 말씀사)
기도(리챠드 포스터, 두란노)
예수님의 기도(존 맥아더, 생명의 말씀사)

11) 예배와 찬양
예배란 무엇인가?(죤 맥아더, 두란노)
찬양의 생활(데렉 프라임, 생명의 말씀사)

12)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설복(박영선, 크리스챤 서적)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죤 스토트, 아가페)
구원의 그 즉각성과 점진성(박영선, 새순)

13) 헌신
헌신(하의진, ivp 소책자)
희생(하워드 기니스, ivp)
헌신의 기쁨(죤 화이트, ivp)

14) 주되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앙리 누앙, ivp)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죤 스토트, ivp)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죤 스토트, ivp)

15)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폴 리틀, ivp 소책자)
하나님의 인도(올리버 바클리, 개혁주의 신행협회)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게리 프리슨 외, 생명의 말씀사)

16) 영성
진정한 영적 생활(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인간 하나님의 형상(레널드 맥컬리 외, ivp)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기독지혜사)
헌신(앤드류 머레이, CLC)

2. 자신과의 관계
17) 자아상
자존감(조안 로이드 게스트, ivp 소책자)
상한 감정의 치유(데이빗 시멘즈, 두란노)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 신앙(안토니 후크마, 총신대출판부)

18) 영적 침체
그리스도인과 정서의 성숙(필립 스위하트, ivp)
영적 침체(마틴 로이드 죤스, 새순)
침체로부터의 자유(돈 베이커 외, 비젼북)

19) 자기 관리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챨스 험멜, ivp 소책자)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고든 맥도널드, ivp)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자세(죤 알렉산더, 생명의 말씀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테판 코비, 김영사)

20) 시간사용
그리스도인의 삶과 시간 관리(조 베리, 생명의 말씀사)
크리스챤의 우선순위(그랜트 하워드, 순 출판사)
크리스챤의 시간관리(테드 엠스트롬, 보이스사)

21) 신앙과 지성
그리스도인의 사고활용과 성숙(죤 스토트, ivp)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해리 블레마이어, 두란노)
이성에서의 도피(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22) 재물 사용
섹스, 돈, 권력(리챠드 포스터, 두란노)
사람과 돈(쟈끄 엘룰, 보리)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래리 버켓, CUP)

23) 성 문제
성 더럽혀진 하나님의 선물(아가페)
올바른 삶을 위한 성(나비, 루이스 스미디스)
크리스천의 성(루이스 스메디스, 두란노)

24) 성령의 은사
영적 은사를 발견하려면(오데이, ivp 소책자)
은사란 무엇인가?(마이클 그리피스, 엠마오)
성령의 은사와 교회 성장(피터 와그너, 생명의 말씀사)

3. 이웃과의 관계
25) 대인관계
까다로운 사람 상대하기(레스 패로트 3세, 요단출판사)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고든 맥도날드, ivp)
사랑과 우정의 비결(맥기니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인간관계지능(슈테판 F. 그로스, 청년정신)
친구 만들기(엠 그리핀, 선한 이웃)

26) 공동체적 생활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게파 세팡기, ivp 소책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송인규, ivp)
신도의 공동 생활(본훼퍼, 대한 기독교서회)
그리스도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로핑크, 분도 출판사)

27) 가정 생활
사랑하는 엄마 아빠께(추아 위 히안, ivp)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보이스사)
가정이란 무엇인가?(에딧 쉐퍼, 생명의 말씀사)
좋은 아빠 되기(고든 맥도날드, 비젼북)

28) 이성교제
그리스도인의 데이트(스코트 커비, 생명의 말씀사)
파란 불꽃(월터 트로비쉬, ivp)
데이트와 사랑의 미학(죠이스 허기트, ivp)

29) 결혼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양은순, 두란노)
결혼 건축가(로렌스 크랩, 두란노)
그리스도인 부부와 행복한 성(허버트 마일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월터 트로비쉬, 생명의 말씀사)
생애의 반려자(추아 위 히안, ivp)
결혼과 사랑의 미학(죠이스 허기트, ivp)

30) 교회 생활
현대교회와 평신도 훈련(죤 스토트, 엠마오)
기억 상실증에 걸린 교회(마이클 그리피스, ivp)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죤 스티븐스, ivp)

31) 지역교회
교회의 이중구조(랄프 윈터, ivp 소책자)
그리스도의 공동체(하워드 스나이더, 생명의 말씀사)
혁신적교회갱신과 웨슬레(하워드 스나이더, 대한기독교출판사)

4. 세상과의 관계
32) 전도
개인전도(죤 스토트, ivp 소책자)
빛으로 소금으로(레베카 피벗, ivp)
이렇게 전한다(폴 리틀, 생명의 말씀사)
전도의 동기와 방법(죤 스토트, ivp 소책자)
초대 교회의 전도(마이클 그린, 생명의 말씀사)

33) 해외선교
당신과 해외선교(마이클 그리피스, ivp 소책자)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송인규, ivp)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왜 되어야 하는가?(허버트 케인, 죠이)

34) 직업과 소명
그리스도인과 일(밴 패터슨, ivp 소책자)
그리스도인이 본 노동(해리 안토니데스, ivp)
내 맘에 쏙 드는 직업(케빈 내레모어, 비젼북)
소명(오스 기니스, ivp)
직업과 소명(데이빗 필드, ivp)
직업과 소명(김재영, ivp)

35) 사회참여
누가 나의 이웃인가?(죤 스토트, ivp 소책자)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김세윤, ivp)
복음전도,구원,사회정의(로널드 사이더, ivp)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쟈크 엘룰, 대장간)

36) 윤리적 삶
행하는 자라야(기윤실, ivp)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크리스토퍼 라이트, ivp)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올리버 바클리, ivp)
현대 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죤 스토트, CLC)

37) 신앙과 학문
신앙과 학문(이원설, ivp 소책자)
기독신앙과 전공과목(케네스 헤르만 외, ivp)
신앙의 눈으로 본 학문 시리즈(ivp)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아더 홈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38) 기독교 세계관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송인규, ivp)
그리스도인의 비젼(브라이안 월쉬 외, ivp)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제임스 사이어, ivp)
창조,타락,구속(알버트 윌터스, ivp)
지성의 제자도(제임스 사이어, ivp)

39) 그리스도인과 문화
복음과 문화(조종남, ivp)
기독교 문화관(로버크 웨버, 엠마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프란시스 쉐퍼, 생명의말씀사)

40) 영적 전투
그리스도인의 영적전투(마이클 하퍼, 두란노)
영적 전투(티모씨 워너, 죠이 선교회)
기도는 전투다(피터 와그너, 나눔터)

Ⅲ. 교회지도자를 위한 주제
1. 리더의 자세
41) 지도력
지도자가 되려면(호스트, 성서 유니온)
기독교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죤 스토트, ivp)
열정적인 사역자입니까(게일 맥도날드, 비젼북)
영적 지도력(샌더스, 요단출판사)
영혼이 성장하는 리더(고든 멕도날드, 비젼북)
오늘을 위한 성경적 리더쉽(추아 위 히안, ivp)
이야기로 푸는 예수님의 리더십(빌 하이벨즈 외, 두란노)
탁월한 지도력(죤 화이트, ivp)
최고경영자 예수(로리 베스 존스, 한언출판사)
함께 일하는 지도자(찰스 스윈돌, 생명의 말씀사)

42) 제자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제자도(탐 사인, 두란노)
제자도(데이빗 왓슨, 두란노)
나를 따르라(본 훼퍼, 대한 기독교서회)
가난한 자들의 친구(비브 그릭, ivp)

43) 전기
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크리스토퍼 캐서우드, 엠마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조나단 에드워즈 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불타는 세계비젼(봅 포스터, 네비게이토)
세계를 변화시킨 믿음의 거인들(조이스 브라운, 베다니출판사)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김수진, 홍성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정부흥, CLC)
하나님의 사람 칼빈(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나단)
허드슨 테일러(로저 스티어, 두란노)
헨리 마틴의 생애와 일기(존 사전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 리더와 성경 연구
44) PBS 방법론
창조적인 성경연구(에이더 럼 외, ivp)
효과적인 성경공부(마갈릿, ivp)
성경 연구 핸드북(자료개발부, ivp)

45) 성경해석 방법
성경을 아는 지식(스프로울, ESP)
성경 해석의 원리(노튼 스테렛, 성서유니온)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고든 디 피 외, 성서유니온)
성경 해석학(버클리 마이켈슨, 크리스챤다이제스트)

46) 성경 개론
성경의 권위(죤 스토트, ivp 소책자)
성경연구 입문(죤 스토트, 성서 유니온)
성경 연구 가이드(시릴 브리지랜드, ivp)

47) 성경 신학
성경 교향곡(마크 스트롬, ivp)
복음과 하나님 나라(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복음과 하나님의 계시(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3. 리더와 재생산
48) 일대일 양육
영적 갓난아이를 격려하려면(마이클 그리피스, ivp 소책자)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알리스 프라일링, ivp)

49) 제자 만들기
일대일 제자 훈련(마이클 베슬러, ivp)
제자 삼는 사역의 기술(리로이 아임스, 네비게이토)
주님의 전도 계획(로버트 콜먼, 생명의 말씀사)
예수님의 제자 훈련(챤다필라, ivp)

50) 소그룹 운동
소그룹을 인도하려면(마이클 위베, ivp 소책자)
소그룹 리더 핸드북(자료 개발부, ivp)
소그룹 운동과 교회성장(론 니콜라스 외, ivp)

51) 그룹 성경 공부
성경공부의 모든 것(짐 나이퀴스트, ivp)
성경 공부 인도법(네비게이토)

52) 상담
격려와 책망(고든 맥도날드 부부, ivp)
격려를 통한 상담(로랜스 크랩 외, 나침반)

53) 치유 제 3의 바람(피터 와그너, 임마누엘)
치유(프란시스 맥너트, 무실)

4. 리더와 복음주의 학생 운동
54) 복음주의
학생운동과 세계 복음화(데이빗 하워드, 생명의 말씀사)

55) 복음주의 학사운동
IVF 학사운동 핸드북
성서한국을 꿈꾼다(이승장, ESP)
일상 생활 속의 그리스도인(로버트 뱅크스, ivp)

5. 리더를 위한 신학적 주제
56)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최낙재, 성서유니온)
하나님 나라의 신학(죤 스토트 외, 한국 로고스 연구원)
하나님 나라(헤르만 리델보스, 엠마오)

57) 복음주의 신학
변론자 그리스도(죤 스토트, 성서 유니온)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버나드 램, 생명의 말씀사)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자유주의자와의 대화(죤 스토트, 여수룬)

58) 성령론
성령 충만(챨스 험멜, ivp 소책자)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죤 스토트,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성령을 아는 지식(제임스 패커, CLC)
성령 세례(마틴 로이드 죤스, CLC)

59) 종말론
미래, 미래, 미래인(빔 리트께르끄, 호도애)
개혁주의 종말론(안토니 후크마, CLC)
마지막에 될 일들(죠지 래트, 엠마오)
천년 왕국(로버트 지 클라우스, 성광 문화사)

60) 여성학
여성 그대의 사명은(폴 투르니에, ivp)
성경적 여성관(메리 에반스, ivp)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역할과 위치(제임스 헐리, 여수룬)
일곱가지 여성 콤플렉스(여성을 위한 모임, 현암사)
여자, 여성, 그리고 여인들(송길원, 한국문서선교회)

<참고>
이 필독서는 한국기독학생회(IVF) 멤버들이 들어야 할 기본적인 강의 주제 60개를 self-study 할 수 있도록 만든 목록을 기초로 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동이 있음을 느낀다. ‘서른 세 살의 젊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아가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을 가져온다. 사실 그 것을 그냥 감동이라고 표현하자면, 어쩐지 그것을 너무 폄하(貶下)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요즈음 청년부의 모임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열정이 식었다는 말도 들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기도가 부족하다, 말씀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여러 지체들의 사랑 가득한 충고와 해결책들도 자주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모임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 청년부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20년,
3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치를 순식간에 포기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열정과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어느 지체의 말대로 그야말로 매주 금요일이 수련회가 되는 모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에 걸맞는 자유, 평화, 화평, 사랑, 안정감 등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이전에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하덕규 집사의 ‘자유’의 가사가 과연 우리에게도 풍성하게 느껴지는가? 오히려 해야할 일들만 더 늘어난 채 ‘종교생활’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소모적인 일인가?

우리 청년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유대주의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모습에서 제하여 나갔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성경에 대한 통찰력 없이 나름대로 ‘말씀을 적용’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도저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일 길을 여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이 곳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주관적 ‘느낌’이 자칫 성경의 계시적 증거를 묻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그 말씀을 우리 모임에 잘 적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바로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다. 멋있는 피아노와 최고의 연주자와 영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면 그 곳에 계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까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본다.
찬양을 할 때에도 분위기에 맞추어 곡을 골라야 하고, 가능하면 인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더욱 감동이 된다. 피아노 반주자는 최고의 솜씨로 연주를 하고 선곡된 찬양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고 가끔은 통성 기도를 하는 시간과 묵상기도를 하는 시간을 두어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절대로 찬양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찬양을 매우 좋아하고, 특히 우리 청년부의 찬양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목사님의 message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야하고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은혜가 된다’. (이것도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런 message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우리
목사님의 message가 정말 이런 message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필자 개인 영성의 부족으로 자칫 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공부 조장은 충분히 준비를 해와서 모르는 것을 대답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시간을 주어야 역시 ‘은혜를 받는다.’ 기도는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몇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뻥뻥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주어야 나도 ‘은혜를 받아 기도가 트인다.’
만일 위에 열거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필수 요건이라면 우리는 중국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중국 오지의 선교사님들이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을 훨씬 더 앞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상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내려져야 하고 잊혀져야 한다. ‘세상 학문’을 보다보면 믿음이 떨어지기 쉽고 은혜를 막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이성에 관계없이 믿는 대상이므로 나는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과연 ‘고지를 정복하는’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우리 청년부가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기 받은 은사에 따라서는 중국, 아프리카, 일본, 무슬림 지역에서 진정한 대안적 기독 지성이 길러지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말씀의 깊이’와 ‘훈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말씀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그 감격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의 깊이 없이 성경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얻는 감동이 ‘물방개점’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자극을 받으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핵심과 근본에 대한 바른 통찰력 없이 매우 ‘자극적인 것’만을 구하다보면 자칫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게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감격과 열정이 충분히 표출되어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좀 더 말씀의 깊이와 훈련에 몰두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성장의 수단이지만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하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세워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의 모임을 ‘느끼는’ 모임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찾는 것과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난 1월호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을 지내신 KAIST 윤완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 믿음을 강조하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한 열심
– 구원을 강조하되 그것만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 목적 없는 신앙
– 하나님께서 우주 대신에 교회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 편협함
–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 가두고 성공의 이념으로 나머지를 채우는 이원론적 신앙
– 순종보다는 제사를 드리려는 제사 종교
–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성경 공부
– 순종하려 하면서 계시를 묻지 않는 어두움
– 계명은 없고 사명만 있는 청년적 신앙
– 바울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와서 들어도 감탄할 오묘한 해석
– 감격으로 시작하지 않는 윤리,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
– 정열에 들떠 방향을 잃은 사람들, 방향을 잡느라 정열을 잃은 사람들

* 구체적인 이야기가 후에 더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1부)라고 제목 뒤에 달았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권오승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권오승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텔레토비는 사탄적인가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화 속에서 뉴에이지, 혹은 사탄 문화의 성분을 구별해 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때 저도 우리가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이 얼마나 사탄적인가에 관하여 여기 저기에 기고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열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도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직은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이 “already but not yet” 선포된 이 세계에서 문화는 어찌되었건 ‘사탄적’인 것에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전체를 싸잡아서 ‘사탄적’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령 아무 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음악, 미술작품 어떤 것이든지 뽑아 그 안의 ‘사탄적인’ 것들을 찾아내자고 해서
잘 ‘짜내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또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사탄적인 것을 찾아내라고 해 봅시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사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낮은울타리 식의 연구와 분석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뉴에이지고 식의 몰아세우기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를 분리시켜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화속에 숨겨져 있는 잘못된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에 (정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식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디에서 한마디 들은 것으로만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듭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레토비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더 많이 있다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텔레토비
자체를 ‘사탄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수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수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를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텔레토비로부터, 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성경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라고 해도 역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점이라던가.)


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되고, 청각장애인이 듣게되는… powerful한
복음입니다. 왜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악마적이라며 피해야만 합니까? 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더 성경적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살고있는 미국 보스턴 근교에는 Salem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초기에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
‘영적 순결함’을 찾고자 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마녀 박물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Haloween이 되면 각종 마녀 관련
행사들이 치루어지는 ‘마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문화를 마녀로 몰아세울때, 문화는 영영 사탄의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