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되지 않는 것을 물어본다면

수학에서는,
0.9999999999999…. 는 1과 같다.
얼핏 생각해보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은데 그렇다.

수학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이걸 증명하는 방법도 알고 있는게 있고,
그 논리에 따르면 0.9999999…가 1과 같다는 걸 외워서 알고 있긴 하지만 개념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0.999999….. 가 정말 무엇인가 하는 이해가 부족하고, (혹은 무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일수도 있겠다.)
양쪽이 같다는 정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문득 하게 된 생각.
내 동기들중 수학을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심지어 그 중 한명은 지금 현재 MIT의 수학과 교수다!
그런 친구들이라면 내가 어리버리하게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엄청 수학 잘하던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지도 좀 되었고, 이런 사소한거 하나 물어보려고 30년만에 그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뭐하고.

마찬가지로,
나는 내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내 신앙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것이 많고 질문도 많다.

어떤 것은 그냥 딸딸 외워서 그냥 그런거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기본적인 것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모든 학생이 다 수학을 배우지만 수학을 엄청 잘하는 재능은 사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게 아니다.
역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살지만 막상 그 믿음을 더 깊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정말 깊은 사색과 고민이 그 삶속에 담겨있는 현인으로부터, 그 지혜를 더 배워보고 싶다.

I’m lost

Lent가 시작되었고,
뭔가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싶은데…

  • 나는 여러가지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있고
  • 그 어떤 것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심한 자책감이 시달리고 있고
  •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가 유난히 심하게 나를 다스리고 있고
  • 뭔가 하겠다고 약속한 것들은 많은데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회의가 가득하다.

예수님은 멀리 있는 것 같고,
나는 홀로 남은 것 같고,
기도는 막혔고,
내 삶은 바쁘게 돌아간다.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저내랴…

사순절 이틀째의 생각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번 사순절에 읽기로 결심한 책.
나는 저자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책에 대해서도 별로 알지 못하지만 제목이 좋았고 출판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서문에 나온 짧은 단락이 완전히 좋았다.

성직자 후보생을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한 면접관은 후보생들에게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사람이 “부활이 무슨 뜻인지 설명 좀 해보시오. 버스가 오려면 3분이 남았으니 그 시간 안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지를 물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면접관에게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자, 면접관은 답했습니다.
“저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정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당신은 버스를 지나쳐야 한다고 말이지요”

근본없음

나는 딱 이 사람으로부터 믿음에 관한 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이야기할만한 어떤 한 사람의 선배가 없다.
나는 대학교때 회심경험을 했는데, 내가 다닌 학교는 지방에 새로 생긴 학교였고 물어볼 수 있는 선배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기독교 관련 서적을 잔뜩 사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의 기본에 대해 어느정도 배우게 되었다.
물론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내용이 있었고,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니 그런 내용들에 많이 익숙했지만, 그렇게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마침 그때 한국의 기독교 서적이 막 많이 나오기 시작하던 때여서 감사하게도 그 도움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나서 혼자서 많이 찾아다니고, 알아보면서 여러 경험들을 했다.
좌충우돌 성경공부도 따라다녀보고, 책읽기 모임, 찬양 집회, 약간 신비주의적 기도모임 등등 여러곳을 따라다녀보았다.
그것 말고도 책에서 배운 것으로 여러가지를 해 보았다.
개척교회에서 청년부 만드는 일도 해 보았고, 후배들 모아서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도 만들어 보았고, 과 선후배들과 성경공부/책읽기 모임도 해 보았고, 직장에 가서는 직장내 성경공부 모임도 만들어 보았다.
누가 가르쳐준것 없이 그냥 그런거 해보자… 해서 아주 무식하게 달려들어서 했던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그분들로부터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그중 어떤 딱 한분이 내 영적 스승이라고 이야기할만한 분들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예수님만이 내 유일한 스승이라고 (교만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20대에 내가 만났던 예수님, 30대에 내가 보았던 예수님, 40대에 나와 동행해주셨던 예수님, 50대에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조금씩 다른분이다. ㅠㅠ
예수님이 바뀌신것 아닐테고, 내가 바뀐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뭐 딱 근본이 없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는 흔히 대화 상대가, ‘아 이 사람은 나와 생각이 비슷하구나’라고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런 이유가, 아마도 그분의 현재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생각을 나도 어설프게 알기도 하고, 동의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근본도 없고, 깊이도 없지만,
나름 이렇게 예수님 믿는 것도 가능한것이겠다…

전쟁과 정의

나는 전쟁을 겪어본 경험이 없다.
우리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간접적 경험, 책이나 영화, 혹은 TV 다큐멘터리 등에서 배웠을 뿐이다.

그럼에도,전쟁은 끔찍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끔찍하다.

나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pacifist)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 쉽게 어떤 전쟁을 의로운 전쟁 (just war)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들에대해 몹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정말, 정말, 아주 극단적인 어떤 상황에, 전쟁이 필요할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전쟁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지난주 있었던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사이의 말싸움이 큰 뉴스가 되었다.
나는 복잡한 국제정치도 잘 모르고, 외교 그런 것도 모른다. 그런것에 수싸움을 계산할만큼 통찰이 있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1.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것은 잘못이다.
  2.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사력과 국력을 가지고 있다.
  3. 서방세계가 러시아를 징계하는 모든 행위들이 충분히 잘 작동하고 있지 못하다. 러시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4. 지금도 그 전쟁 속에서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고 있다. 그중에는 북한사람도 있다.
  5. 우크라이나의 요구를 러시아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러시아의 침략이 잘못되었고 어쩌고를 다 감안하고 생각해 보아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깝겠지만 손해를 본 상태로 정전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의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으로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지난주에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그렇게 모욕한 행위는 여러가지로 비판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정말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지금 사람이 계속 죽어가는 전쟁을 마무리지을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러시아는 나쁘고,
트럼프도 나쁘고,
우크라이나는 불쌍하지만…
어쩌면 트럼프가, 그가 공약한대로, 이렇게 전쟁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그건 정의가 아니라고, 그건 옳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당연히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엄청난 러시아의 국력과 군사력 때문에 그 정의가 구현될수 없는걸 어쩌랴.
이렇게라도 전쟁을 멈추어서 사람이 더 죽지 않게는 해야하지 않겠나…
뭐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Drifted away, Sojourner

나는 박사를 비교적 ‘전통적인’ 쪽에서 했다. –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 분야다.
말하자면 아주 시대를 잘 타는 분야라기 보다는, 그 분야가 만들어진지도 좀 오래 되었고, 그래서 그쪽의 산업도 비교적 많이 성숙해진 쪽이다.

내가 대학교때 이쪽을 하겠다고 했을때엔 이게 매우 ‘hot’한 분야였다. 그런데 내가 박사를 마칠때쯤에는 그렇게 ‘hot’한 분야는 더 이상 아니었다.

박사라면 그래도 뭔가 나름대로의 ‘이론’같은거 하나쯤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한다는 나름대로의 고집이랄까 그런게 있었고, 그래서 나는 박사과정이 오래걸리긴 했지만 막판에 그걸 정리해서 논문으로 쓸때는 매우 재미있었다. 혼자 수식을 풀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그걸 실험결과와 맞추어보면서 무릎을 치고 좋아했다.

그렇게 어떻게 보면 살짝 ‘시대에 뒤떨어지는’ 분야의 박사를 하게 되었는데,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실험실에 많았다.

그래서 얼마전 나와 함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모두 다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 제일 많은 쪽은 반도체 회사다. 모두 다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지금은 그래도 조금씩 높은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고 한번도 회사를 옮기지 않고 그렇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대단…)

그리고 일부 연구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 교수가 되었거나 미국 내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쨌든 학생때도 논문의 질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또, 내가 졸업할때 전후로, 컴퓨터 시물레이션같은 것을 써봤던 사람들중 일부는 Wall street으로 갔다. 혹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 후에 골드만삭스 부사장이 된 사람도 있고, 요즘도 가끔 반도체 관련 주식 해설을 하는 사람으로 TV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wall street이나 컨설팅을 거쳐서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출신 친구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학생때부터 빠릿빠릿하게 뭔가 챙겨먹을거 잘 챙겨먹고, 흐름 분석 잘하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 남는것 보다 아예 돈 왕창버는 쪽에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이 사람들이 돈은 제일 많이 벌고 있는 듯 하다)

많지는 않지만 정부쪽에가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하나 있고,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처럼 졸업후 그 분야와 크게 관계없이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ㅠㅠ 그러니 우리 실험실출신들과 나는 졸업후에 다시 만나는 일도 별로 없게 되었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했던 분야도 이제 지금은 그 후 더 많이 발전했을테고, 내 지식은 예전 지식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전공하지 않은 일들을 한지 이제 벌써 15년쯤 되었다.
그러면서 그쪽 전공하고, 그쪽 일을 오래 한 사람들과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재미있느냐….
박사과정때 했던 그 일들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쪽분야에서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걸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한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중 하나였다. 어디가도 나만큼 이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아마 그것은 거의 사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전문가가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은 나는 전문가가 아닌데 전문가인척 해야하는 상황도 있다.
그렇게 drifted away해서 여기까지 와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9)

야곱은 자신의 삶을 ‘떠돌았던’ 삶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세월이 험악했다고 회고했다.
떠돌아 살았다는 표현을 NASB에서는 living abroad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로는 ‘마구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sojourning place라고 번역하는 명사다.

올해 여름, 나는 미국에 온지 30년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drifted 해가며, 그렇게 sojourning 해가며 살았구나 싶다. 그냥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려니…

좋은 사람

아무아무개가 참 선한 사람인데 고집이 좀 세서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더라도 그 아무아무개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신중하고, 사려깊고, 노력도 하고, 또 똑똑하기도 하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니 다른 사람이 해주는 좋은 충고를 왜 잘 듣지 않는걸까. 그렇게 좋은 사람이.

그건,
결국 그 ‘좋은 사람’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요소 중에서,
그 사람에게 결여된 것이 겸손함이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착한 자세’로 그냥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일수는 있지만,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될수도 있겠다.

그냥 한가지 예 이지만,
매우 자주 내 삶에서 내 한계를 규정짓는 것은 결국 내 약점이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잘 하더라도, 한가지가 심하게 부족하면 그것 때문에 늘 나는 더 이상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

대화를 하다가 금방 대화가 죽어버리게 되는 일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말을 많이 하는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만 계속 하게되는 경우다.

내가 사랑이 없고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만났을때 내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과는 그렇게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엄청 과장을 한다거나, 어떤 주제가 나와도 별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길게 자기 썰을 풀어내는 사람과의 대화는 대개 피곤하다.

이게 함께 일하는 사람과 며칠 오래 출장을 가보면 잘 드러난다.
회사에서는 함께 하는 일이 있으니 만나서 늘 일 이야기를 하지만,
함께 출장을 가서 한동안 공항에서 함께 기다려야 한다거나, 운전을 하고 가면서 대화를 하거나, 저녁시간에 식사를 할때는 어쨌든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럴때 그 사람이 조금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자기이야기를 하는 극단이 소셜미디어인것 같다.
별것도 아닌 자기 근황 엄청 뽀샵해서 올리는거… 음… 뭐 난 그렇게 별로 관심도 없고, 솔직히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블로그는?

리더, 구성원, 조직

여러 회사에 그래도 꽤 다닌 시간이 있으므로 나름대로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이 있다.
내가 갖게된 생각 몇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리더가 엉망이면 구성원이 아무리 좋아도 그 조직은 안된다.
  2. 리더가 좋으면 구성원이 아주 엉망이 아니면 조직은 어느정도는 된다.
  3. 리더가 좋더라도 구성원 전체가 엉망이면 그 조직은 잘 안된다.
    다만 좋은 중간리더가 있는 일부의 하부조직이 전체를 먹여살리게 되거나,
    결국 병들어있는 다른 조직들을 제거해야 전체가 살아나게 된다.

자, 요즘 교회를 생각해보자.
만일 목회자를 리더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교회라는 조직은 대부분 거의 희망이 없다고 본다.
한국교회라는 큰 조직(?)을 섬기고 이끄는 소위 리더들을 보면, 앞이 깜깜하다.

그 속에서 조금 더 잘 믿으며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좋은 구성원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만 힘들 뿐이다.

만일 목회자를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그 리더인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다만 좋은 중간리더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좋은 목사님들이 없지 않다. 존경할만한 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훨씬 더 많은 목회자들은 수준/자격미달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전체가 살게되는 일은,
결국 그중 좀 건강하게 서 있는 일부 ‘조직’이 전체를 먹여살리게 되거나,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조직’들이 제거되어야만 가능하다.

나는,이제는 적은 수의 건강한 그리스도인과 건강한 목회자들이 전체를 살릴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그 병들어 있는 이들과 결별하는 것만이 그나마 살아 있는 조직을 살려내고 구해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얼마전 돌아가신 Tony Campolo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적’ 믿음을 복음주의(evangelical)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복음주의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적 표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신앙 그룹을 red letter 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영어 성경중 많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빨간 글씨로 써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게 빨간 글씨로 쓰여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다.

정말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뉴스에서 보여지는 한국과 미국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는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망해가는 회사 속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다.
지금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마치 그렇게 느껴진다.

죽음이라는 contents

비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기독교인들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그런 이야기 별로 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인간의 죽음과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에 대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기독교인들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때,
비기독교인들은 거기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표현을 한다.
명복이라는것은 불교언어이고, 사후세계 명부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받지 말고 복을 받으라는 표현이다.
그러니 가만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때 거기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별로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도 있고 하니…
거기에서 하나님, 은혜 그런 말을 쓰기는 뭐할 수는 있더라도,
최소한 그냥 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한다거나, 가족들 마음의 평안을 빈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는 비종교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표현을 그냥 늘 하는 것은 왜 그럴까

그건,
그 사람들의 문화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소화해낼 contents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되는 그 event에대해 그저 의미없는 말 말고는 따로 할 말이 없는 것.

나라고 다를까?
죽음에 대해 비기독교인들과는 매우 radical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정말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