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위한 삶과 소명을 위한 삶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조롱당하시면서…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을 묵상해보면,

그것처럼 unfair 한 재판이 또 있을까 싶다.
창조주께서 피조물로부터 공평하지 못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런 부조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순간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 ‘부조리한(absurd)’ 상황을 받아들이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의 자신의 ‘권리(right)’보다 ‘소명(calling)’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는 지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문화인 것 같다. 특히 미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인가!

그런 사회 속에서,
소명을 위해 권리를 포기하면서 사는 삶은…
또 다른 Contra Mundum (세상에 대항하여) 의 한 모습이 아닐까…

구호와 노래와 깃발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함께 외칠 구호가 없고,
함께 부를 노래가 없고,
함께 흔들 깃발이 없다고.

그래서 이들이 방황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런데,
복음 안에서는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흔들 깃발도 모두 있지 않은가!

정말 이것을 위해 내 삶을 완전히 다 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으리라.

Risk-taking faith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risk-taking 하는 측면이 있다.

므나의 비유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밑천을 그냥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낸 종들을 책망한 것은,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는…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한 것에대한 책망의 성격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하고,
risk taking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이 책망한 것이다.

내가 주위에서 보는 많은 ‘지식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아주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이지!)

안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과감함’을 포기하는 자세.
정말 ‘믿음’을 가지고 risk-taking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고 재고 따져보다가 결국 ‘안전함’을 선택하는 자세.

오늘 아침 말씀 묵상에서,
주님께서 내게 하신 책망이자 격려였다.

이해하는 삶과 경험하는 삶

‘삶’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20대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삶을… 나는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든… 절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지난 10여년 동안 참 깊이 경험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그런 모델이 아닐까.
그분이야 ‘알기’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테지만,
우리에게 그런 삶의 자세와 모델을 보여주시려고.

나의 가치, 나의 행복

내가 스스로 매우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록,
그것만큼 나를 무가치하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무가치 함을 가슴깊이 인정할 때야만 비로소 내가 가치있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행복함을 추구할수록,
그것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스스로 superficial한 행복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품으면,
비로소 내가 행복해 지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얼마나 내가 성숙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 가운데 어떤 쪽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95% 이상의 관심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지만,
점점 성숙해 가면서 그것 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길까 하는 것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

내가 보는 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

1. 내 professional field에서
나는, 내 지도교수가 나를 underestimate 한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지도교수가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는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의 성향과 내 성향의 차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내 지도교수에게 (아니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100% convice 시키지 못하면 정말 많이 답답하다.

2. Christian environment 에서
사람들이 나를, 실제 나보다 훨씬 더 괜찮게 본다.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Christian들에게는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문화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포스트모던 세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소위 ‘신세대’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특징은 포스트모던적이고.

오랬동안,
나는 내 모더니즘식 접근법이 ‘정공법’이고
포스트모던적 접근법은 ‘꽁수’라는 생각을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tool은 모더니즘식 논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복습

요즈음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배웠던’ 기초 개념들을 복습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나 내가 그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고 있는지 깜짝깜짝 놀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것,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조절하셔야 내가 안전하다는 것,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것…

내 삶이 나를 지치게 만들때,
내가 돌아가 휴식할 유일한 ‘그곳’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자꾸 깨닫는다.

그것 없이… 세상을 뒤집겠노라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 하겠노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겠노라고… 방방 뛰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1990년에 나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바로 그 모습을 꼼꼼하게…
‘복습’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