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단상들 (7)

사랑의 표지가운데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린자녀 둘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는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그 어머니는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때문에 그 아이들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 책임을 진다.

그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갖은 수모와 모욕을 참기도 하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할때, 그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 희생하고, 그 아이들의 생존에 책임을 진다.

물론, 연약한 어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가지는 사랑은, ‘책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책임을 회피하는 매우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는,
‘남탓’을 하는 것이다. – 아, 물론 남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게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늘 ‘남탓’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아닌가 싶다.

열이나서 칭얼거리는 어린 자녀가 있는데도,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냥 픽 자버리는 어머니라면,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고, 사랑이 없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구 누구 때문에 이것 못해먹겠다… 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면,
그 속의 정말 문제는 사랑의 부재일 수 있다.

끊임없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늘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억측과 오해를 동원해서 자신을 보호하려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악’이나 ‘적’으로 규정하여 그것에 대한 증오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는 것 역시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런 모든 자세들은… 사랑없음의 모습이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6)

내가 보기에 복음은,
하나님께서 깨어진 세상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심판이나 정죄나 바로잡음(correction)이 아니라, 사랑이 그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counter-intuitive하다.
그리고 사람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반응은 흔히 분노/미움에 가깝지, 사랑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증오, 분노, 정죄 등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highly polarized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의의 이름으로 반대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관계 속에서도,
분노나 증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결국은 사랑이 진리다.

그러므로,
깨어짐 속에서 가장 아파해야하는 것은,
내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에 대한 깊은 자각과 인식,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이있는 통회가 아닐까.

사랑에 대한 단상들 (5)

사랑은 당연히 희생을 요구한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 vulnerable 해진다.

어찌보면 대단히 간단한 원칙인데,
사실 이것이 사랑을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이나 vulnerable 해지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궁극적 희생은, 따라서 궁극적 사랑은, 그래서,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4)

사랑을 이야기할때,
보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한다.
진보는 ‘이웃 사랑’을 많이 강조한다.

둘 다 신앙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항목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어느쪽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다.

헌신, 사명, 비전, 변혁 등등을 이야기하는 속에서,
정말 그 모든 행동의 core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담겨있어야 함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주권 아래에 회복하시는 때가 오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완성이 되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해 목말라 하는 그 목마름도 해갈이 되려나.

여러가지 많은 소음들 속에서,
그저 가만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내어뱉는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싶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3)

사랑은 진리를 이야기하는 도구에 지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그러진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그러진 세상에 대한 대안이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그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자.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렇지만,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그 자체가 목적이되어야 한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2)

진보도 보수도 모두 사랑을 잃어버렸다.

진보는 사랑을 이웃 혹은 약자에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자비로 치환해버렸다.
그래서 사랑의 궁극적 근원에 대한 foundation이 약화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보수는 사랑을 종교화 시켜버렸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감동을 이야기한다.
혹은 감동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종교적 감흥과 감동을 추구하긴 하지만, 그 사랑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추구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 (1)

예전에 Love is 라고 해서 연재(?)되는 만화가 있었다.
그림도 귀엽고 내용도 참신해서 내가 어린 시절 보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금년 코스타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지난 20년간 그래왔듯이, 올해도 코스타 주제를 놓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그래서,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끔 혹은 자주 한번씩,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사실 정말 사랑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참 없긴 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내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에대해서 할말이 많기도 하다.

가능하면 이번 여름까지는 한번씩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생각중이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10)

Hyper Calvinist들이 주장하는 극단적 예정론이나,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는 구원파적 구원론 같은 것들은 모두…
성경 전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빠지는 오류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같이,
물리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깊이 해보면,
그런 비뚤어진 생각들이 얼마나 shallow한 것인가 하는 것이 조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 같은 geek의 묵상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뭐 적어도 내겐 이런 생각이 참 많이 도움이 된다. ^^)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9)

산상수훈에 대한 이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산상수훈이 도덕/행동 강령이냐 아니면 다다를수 없는 이상을 이야기한 것이냐 하는 논쟁과 관련해서…

내 생각에 산상수훈은, 그냥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에 대해서 뭉뚱그려서 설명을 하고 있는 설교이다.
그래서 그게 언제 이루어지는 건데? 하는 것은 그 산상수훈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는 따라야할 행동윤리로 이해해야 더 적절할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는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 되기도 한다.

혹은 산상수훈의 어떤 부분은 지금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가 하면,
어떤 부분은 도저히 지킬 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하나님 나라 백성됨을 이야기한다.

깍두기와 콩나물국이 다 합쳐저서 저녁식사가 되듯이,
A(t1), A(t2), A(t3),… 등등이 다 합쳐저서 A라는 사람의 삶이 되듯이 말이다.

뜬금없는 geeky한 생각 (8)

나는 가령,
회심은 천당을 가는 ticket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 후의 성화 과정은 optional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이라던가…
성화 없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은 너무나도 이런 시간 개념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기술되는 것들이 참 많다.
특히 예수님은 아주 짤없고도 강력하게 행함에 대해 많이 말씀하신다.

아니 그럼… 성화를 이루어야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성화 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가나?

뭐 이런 유치한(?) 걱정과 고민을 해보게 되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A(t1)부터 A(t2), A(t3)… 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래서.. 어디까지 해야 구원을 얻는건데? 믿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것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뭐 이런 식의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에 따른 설명이지만…

성경의 관심사는
‘구원’ 전체를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그 안에 회심, 성화 등등의 내용들을 다 설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읽다보면,
어떤때는 믿기만하면 구원을 얻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어떤때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이신칭의냐 행위구원이냐의 논쟁을 하는 것은,
결국 시간 개념은 너무 평면적으로 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다른 예를 들지만,
내가 저녁식사를 하는 ‘event’를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내가 저녁 식사를 할때 어떤 시점에서 콩나물국을 떠 먹었고, 어떤 시점에서 깍두기를 먹었는지 하는 것이 저녁식사를 기술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그 저녁식사에는 깍두기와 콩나물국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