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법 (3)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늦게 읽는 편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책은 한번 읽어서 잘 이해도 안된다. -.-;
뭐 독서, 공부 이런거에 잘 어울리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많은 책을 읽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하는 책은 많다.

그래서 내가 쓰는 방법은,
“흐름잡기” 이다.

가령, 독자가 읽는 속도보다 더 빨리 책을 써 낸다는 N. T. Wright의 예를 들어보자.
사실 N. T. Wright의 방대한 분량의 책을 다 읽기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그럴 시간도 없다.

나는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생각을 대표할만한 한권을 뽑아서 정독한다.
이렇게 하는 책은 두꺼우면 안된다. 얇으면서도 그 사람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책이어야 한다.
음.. 불행히도 N. T. Wright의 경우에는 그런 책을 찾지 못했다. -.-‘;
이 사람의 사상이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N. T. Wright의 사상과 저작을 분석해서 정리한 문서나 강의들을 열심히 찾았다.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Univ. of Virginia의 Center for Christian Studies에서 4주짜리 시리즈 세미나/강의를 한 것이 있었다. 그야말로 N. T. Wright 개관이었다.
나는 그 강의를 여러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렇게 N. T. Wright 사상의 줄기가 무엇인지 우선 좀 감을 잡았다.

그리고 나니, N. T. Wright을 읽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심지어 어떤 것은 설렁설렁 읽으면서 아… 여기선 이 양반이 이 얘기를 하는구나…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가령,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경우…
이 분도 역시 이분의 사상을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책을 찾지 못했다. 사실 처음 접한 책이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인데, 어떤 의미에서 그분 생각의 개관을 이 책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분의 경우에 내가 했던 접근은, 이분의 신학적 입장이 어떤 ‘라인’에 서 있는지를 파악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뭐 간단한 인터넷 서치로 해결된다.
찾아보니… 요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평화주의자라고 나온다.
아하… 평화주의자구나.
그런 관점에서 이분의 책을 읽어나가니, 이해가 빠르고 쉬웠다.

물론, 이런 과정은 feedback을 거쳐야 한다.
가령 N. T. Wight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한 처음 강의를 통해서 N. T. Wright의 사상을 소개받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 N. T. Wright의 사상을 접하면서 그 처음 개관강의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그럴 경우, 독서를 해가면서 내 나름대로의 N. T. Wright 개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의 독서법 (2)

조직신학, 교회사, 성서신학 등과 같은 ‘기초 신학’ 과목들은 좀 예외가 되겠으나…
그 외에 내가 책을 읽는 방법은 철저히 저자중심이었다.

소위 어떤 사람 한 사람은 ‘꽂히면’ 그 사람을 정신없이 파고드는 방법을 잘 취했다.
뭐 그렇다고 그 사람의 책을 다 읽는다거나 그렇게 한건 아니다. 택도 없다. ^^
그렇지만… 아… 이 사람의 생각과 사상의 범위와 한계가 이렇게 그려지는구나 하고 깨달아 질 때까지 그 사람의 저작들을 읽었다.

대표적으로,
존 스토트, 프란시스 쉐퍼, 김교신 등은 내가 20대에 정신없이 파고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에도,
자크 엘룰, 마틴 로이드-존스, 최근에는 N. T. Wright에 이르기까지… 나는 철저하게 저자 중심으로 책을 읽었던것 같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렇게 한 저자의 사상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큰 그림을 빨리 잡는데 유리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잘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Holy Week 묵상 –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금요일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사람들은 절망했다.

악이 마침내 궁극적 승리는 거둔 듯 했고, 하나님은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금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이 오고 있었다.

금요일의 처절한 절망과 패배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일요일이 오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은, Tony Campolo이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role model로 여기고 있다고 할수도 있겠다.

그분의 설교중 꽤 유명한 설교가 있는데, 그것은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이다.

(다음의 링크에서 그중 일부를 들을 수 있는데, video가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들을수 있다.)

그렇다.

아직 금요일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우리는,

충분히 절망해야 한다.

여전히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이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기력해 보이고,

여전히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때…

우리는 그 무기력함과 절망감과 아픔을 쉽게 떨쳐 버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금요일의 무거움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그 금요일의 어두움을 삶에서 겪어 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다가올 일요일에 대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Tony Campolo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Holy Week 묵상 – 소망

처음 십가가의 의미를 깨달았을때,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아니 왜…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고,

내 삶의 모든 영역은 그 십자가의 가치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매년 이 시즌이 될 때마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가 얼마나 shallow한 수준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이 땅을 살면서, 과연 그 십자가의 신비를 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싶지만…

이렇게 그 영광의 끝자락을 조금 잡는 것 만으로도,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소망을 준다.

…..

옛날에 황 간사님이 어느 세팅에서 설교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Charles Templeton은 복음전도자였다. 빌리그레함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가뭄 끝에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잡지에서 보고,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라는 질문을 하다가 결국은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되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만드는 신이라면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래서 쓴 책이 Farewell to God 이다.

반면,

Mother Teresa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을 향해 compassion을 가지다가,

결국 그 안에 들어가 평생 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들을 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며 그 사람들을 섬겼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고통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편안한 자리에서 사진을 보고 하나님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여기고 함께 고통에 동참하며 그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에게 소망의 논리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소망의 삶의 방식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한다.

…..

십자가를 바라보며,

처절하게 우리 구주께서 그 위해서 피 흘리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그렇게 하셨나)’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사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명한 대답이 주어지는 것 같다.

Holy Week 묵상 – 고통

어제, 

한국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탔던 배가 침몰한 뉴스를 들었다.


어찌나 가슴이 막막해지고 힘들던지…

아… 정말 몇번씩이나 탄식이 나왔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건 아닌데…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 건데…

아끼는 친구들의 힘든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뉴스를 들으며…

그리고 또… 내가 그런 힘든 상황을 지나기도 하면서…

예수께서 그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지셨음을 생각해본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두려워했을 아이들의 두려움 만큼이나 예수의 두려움이 컸을까?

그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만큼이나 예수께서는 아파하셨을까?

깊은 삶의 절망의 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두고 가지셨을까?

오늘은…

도무지…

‘고통’이라는 지점으로부터 조금도 생각이 더 움직여지질 않는다.

Holy Week 묵상 – penal substitution

소위 penal substitution이라는 개념을 마치 ‘옛날 식의 atonement theory’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만드는 key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희생으로,

내 죄값을 치루고,

내가 회복되었다는 말씀.

그래서 이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내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

‘역사적 예수’연구를 들여다보면,

사실 penal substitution에 관한 이야기들이 별로 나오질 않는다.

그리고,

1세기 유대교 배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오셨고,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fulfill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보면,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지만, 초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시다.

성경은 시간 속에 침투해 온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전히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내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서 사랑하는 대상이다.

내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고,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따를 내 주 (Lord) 이시다. 

Holy Week 묵상 – 개인적 복음

금년 초 였던가,

일본에 출장을 가 있었는데,

신깐센을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이 아니라 ‘나’ 말이야.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등등은 논리적으로 잘 파악이 되는데,

갑자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희미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괴로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사랑하시긴 하지만, ‘나’라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뭐 ‘나’라는 개인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께 크게 손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말하자면,

내가 모래성을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자. 

그 모래성을 참 좋아하고, 어쩌다 그것이 망가지면 안타까워할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안의 모래 한알 한알에 어떤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뭐 비슷한 논리였다. 


뭐 여러가지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름대로 성경 여기 저기를 뒤적이며,

그리고 내 개인적인 ‘체험’을 되새기며 그 의심이 많이 가셔지긴 했었는데…

그때 얻은 교훈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디 정말 중요하다.

성경을 사유화(privatize)해서 읽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성경읽는 방법이다.

그리고, 흔히 사유화해서 읽어내는 성경 본문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잘 못 해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주간에…

그런 사유화의 오류의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 깊이 마음에 담아보고 싶다.

예수께서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음을 마음에 더 담아보고 싶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Holy Week 묵상 – 복음, 역사성

복음이 그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복음의 nature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경전이나 이야기들의 실제 역사적 사실 여부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면,

그분의 십자가 처형,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그 모든 근거와 근본을 잃어버리게된다.

기독교가 이렇게 인간의 역사 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종교로 만든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news이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advice이다.

만일, 마치 예수에 대한 뉴스가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은,

‘내면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Holy week을 맞으면서,

복음이 역사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과,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뉴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나의 독서법 (1)

사실 한달에 한권 책 읽을까 말까 한 수준이므로,
내가 무슨 독서법 어쩌구를 논할만한 수준이 절대 못된다.
게다가 요즘은 그나마도 시간이 없어 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 내가 어떻게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에 한번 정리해서 써보기로 하였다.
뭐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니므로, 아마 이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
혹시 좀 도움을 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대학생때,
한학기에 6과목 정도를 들었고, 일년에 12과목을 정규학기에 들었다.
평균적으로 한달에 한권정도 text book을 보는 셈이었다.

그래서 대학생때 결심했다.
전공서적 한권당 신앙서적 한권을 읽겠다고.
그래서 한달에 한권 책읽기를 시작했다.

늘 잘 지킨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로부터 한 15년 정도는 꽤 지켰다.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 등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신학서적들도 읽었다.

조직신학, 성서 해석학, 교회사, OT/NT survey 등은 신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꽤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미국의 잘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교 M Div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를 혼자서 독학한 경우도 있었다.)

보스턴에 있을 때에는, 근처의 신학교 한학기 강의 tape 전체를 구해다가 들으며 공부를 한적도 있었다.소위 ‘인터넷 강의’가 많이 뜨고난 다음엔 거의 미친듯이 여기저기 강의들을 들었고, 그중에는 정규 신학교 강의를 도강(?) 하기도 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좀 공부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사실 많이 남는데… 아직 포기한건 아니다! ㅎㅎ 혹시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리고 소그룹에 대한 책, 경건생활에 대한 책, 그리고 고전들…
이럭 저럭 읽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던것 같기는 하다.

Not Being Excellent (4)

탁월함 중독에 걸리고 나면,

모든 것을 ‘효율’로 판단하게 된다.
효율에 거의 강박증이 있을 정도로.
탁월함 = 효율적 = 선
열등함 = 비효율적 = 악
의 등식을 부지불식간에 갖게 된다.
꼭 선,악의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효율성을 추구해야할때가 물론 있다.
그런데,
그런 효율성 강박증을 조금은 풀어도 될만한 상황에서도,
그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라던가,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때에도…
그 시간이 효율적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렇게 효율적이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불편해하다 못해… 
‘악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악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은 쉽게 마음 속에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왜냐하면, 탁월함 중독, 효율성 강박이라는 frame을 버리지 않은채 judge를 하는 것이므로)
아, 세상엔 왜 이렇게 악당이 많지?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수퍼히어로가 된듯이 행동하려고 하기도 한다.
이 모두…
내게서 자주 발견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발견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