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0)

이번에 나는, 내가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많이 요청을 받았다. ^^

내 아내는 내가 이번에 인디 다녀온 사진들을 보더니, 참 많이 신났네~ 라며 나를 놀렸지만, 

(뭐 사실 신났던 건 사실이긴 하다 ㅎㅎ)

그렇지만 여러가지일로 참 큰 부담들이 있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이 내게는 고통스러웠다.

현장에 가서도, 뭔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특히 지금까지 내게 큰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목요일 저녁 전체 기도모임 인도였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하는 calling을 하라고 부탁을 받았다.

가면서, 간사들이 시키는건, 내가 physically 불가능한게 아니라면 다 하겠다고, 두말 다시 토달지 않고 무조건 기꺼이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갔던 터여서, 그것 역시 SURE~ 하며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그건 내게 큰 마음의 부담이었다.

집회 내내, 복음의 기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내용이, 적어도 전체 집회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터였다.

결국 나는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난 후에 무대에 올라가, 약 10분이 좀 안되는 길이로 짧게 ‘복음을 소개’하고 그것에 응답하라고 초청을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개떡같은(!) 초청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일어섰다.

그중에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신앙이 없는데 지금 코스타에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하며 나와 상담을 했던 여학생의 그 남자친구도 있었다. (나는 악수례 시간에 그 남자친구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큰 마음의 부담은,

내가 그렇게 짧게 소개한 복음의 내용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빠져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heart가 잘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뒤끝 길고 소심한 사람에게는….

이런거 정말 오래 간다. -.-;

아, 결국 내가 복음을 짧게 설명하고자 했을때 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었구나…

코스타를 섬기면서 늘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가시는 방법은 내 사역의 완벽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셨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참 많이 울게 하셨고, 많이 뉘우치게 하셨다.

또 다시 하나님께 많은 빚을 졌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9)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많이 망가진 시대에 해야하는 중요한 일은 다음의 몇가지가 아닌가 싶다.

1. 

그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좀 더 경험한 세대가, 포기하지 않고 그 스토리, inspiration, standard, passion을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성실하게 전하는 일이다.

그것이 그 다음 세대의 변화를 guarantee 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그 세대에게 pace setter가 되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보여주는 일을 해야 한다.

2. 

깊이있는 연구와 사색을 통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큰 흐름이 없을 때에는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소수에 집중하며, 그들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도록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맺어진 통찰의 열매들은, 혹시 후에 있을 다른 ‘부흥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부흥의 시대가 얼마나 부정적인 부작용 없이 건강한 영향력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런 침체기에 이루어진 통찰의 열매들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망가져 있음을 뼈아프게 아파해야 한다.

이대로 괜찮다. 그냥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된다. 는 식으로 기준을 낮추지 말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이 현저하게 compromise 된 시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remind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KOSTA는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다.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학생들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을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역시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 손 붙들고 이야기하는 강사님들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계속 더 엎드려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시도록.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8)

수요일 아침,

화요일 설교자 교회에서 오신 부교역자 한분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좀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으로부터 “그 교회 자랑”을 많이 들었다. ^^

뭐 이런 세팅에서, 자기 교회 자랑하는 강사들을 많이 보았으므로 대단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 교회 이야기는 들으면서 참 부러운 것들도 많았다.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direction들도 있었지만. ^^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께 물었다.

지금 그 교회의 모델이,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되는 모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M 목사님 자리에 다른 누가 와도 그 보델이 작동할까요?

그분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M 목사님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pace-setter (페이스를 셋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그 말은, 내 머리를 띵~ 하고 때렸다.

정말 띵~ 하고, 아주 쎄게 때렸다.

pace setter라.

그래,

비록 그것이 pseudo revival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신앙의 깊은 경험을 한 사람이 해야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pace-setter가 되는 일이겠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번 언급하긴 했지만,

내게는 깊은 목마름이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그냥 미적지근하게 하나님을 믿는게 불가능한데.

삶에서 compromise를 하면서는 정말 뼈가 녹는것 같이 아파야 하는데.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목마름이 자신을 바짝바짝 말려야 하는데.

그래서 더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나도 더 그렇지 못하고,

내가 주변에서 접하는 크리스천들중 많은 이들은, 아예 그런 것에 관심조차 갖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는, 그렇게 너무 유난스럽게 하지 말라고 내게 충고를 하곤 한다.

아니, 어떻게 다른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밍기적 밍기적 사는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질 않는 걸까?

아니, 어떻게 대충 헌신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질 않는 걸까?

저들이 경험한 하나님과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은 다른 분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 내가 해답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준이 있다면,

나는 그 기준을 가지고, 아직 그 경험과 이해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어도 어떤 특정한 영역에 관한한,

pace setter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 시리즈의 첫번째 글에서 이야기한 외로움의 문제가,

이런 일단의 만남과 생각을 통해 많이 정리가 되었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7)

이런 얘기를 쓰면,

나를 아는 사람은 또 저 얘기한다며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진심으로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에도,

그 부흥에 대한 소망 때문에 아침에 한시간씩 땀을 뻘뻘 흘려가며 기도를 했었다.

이번에 인디에서 만난 학생들의 상태를 보면서,

과연 이런 상태의 학생들을 다시 우리 힘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들때,

정말 하나님께서 다시 이 흐름을 뒤집어주시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부흥이 필요하다는 갈망이 깊어졌다.

흥미롭게도,

이번에 강사로 오신 분중,

소위 old reformed 계열에 계신, 청교도 신앙에 대한 연구를 많이하신 한 목사님과 부흥에 대해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분은,

소위 new reformed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Tim Keller 같은 분 조차도 충분히 reformed 스럽지 않다고 불편해하시는 분이시다.

Tim Keller가 이야기하는 Christ-centered preaching 이라는 것이, 복음의 본질을 많이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셨다.

내가 청교도신앙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청고도 신앙, 그리고 마틴 로이드-존스 라인의 부흥 신앙등에 비추어 생각해볼때, 아하~ 하고 이해가 많이 되었다.

이분이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설교의 모델에 대해 들으면서,

설교와 teaching에서 narrative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 이지만,

한편 아… 이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그렇게 보실 수 있겠구나 싶어 참 흥미로웠다.

나도 내 나름대로 부흥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분과 나누었고,

또, 나름대로 내 경험들도 그분과 나누었다.

그리고 또한 화요일 저녁 설교로부터 부흥에 대한 어떤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지 하는 것도 이야기나눌 기회가 있었다.

예전에 조나단 에드워즈 식의 청교도 부흥이 답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으로부터 지금 나는 좀 더 진화해 있다.

청교도시대의 부흥의 모델은, 부흥의 한가지 형태이지, 부흥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내 생각이 모두 다 같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분과의 그 대화는 내 생각을 참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겪었던 pseudo-revival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부흥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그 경험은, 제 안의 부흥에 대한 갈망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설명했더니 그분도 많이 공감하셨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우리를 꽤 오랫동안, 상당기간 지탱해 주는 것임을 또한 공감했다.

화요일 설교자가 겪은 그 pseudo-revival이 그 설교자와 그 시대의 사역자들을 평생 지금까지 붙들어 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6)

학생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더더욱 내게는…

과연 이런 상황이 우리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는 회의가 밀려온 것이 사실이다.

약간의 희망의 틈이 보이긴 했지만,

과연 이 작은 희망의 씨앗이, 이 거대한 sinking boat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학생들의 작은 변화에 감격해 하다가도,

이런 회의나 의구심이 밀려오면 가슴이 막막해져서 혼자 그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보기도실보다는 침묵기도실을 더 찾았다.

한번은 침묵기도실을 갔더니,

청년사역자로 섬기는 멘토 가운데 한분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아, 저 분도 나처럼 이렇게 막막한 마음에 와 앉아 계신 것일까.

그런데 한주 내내 내 마음에 남았던 것은, 화요일 저녁 설교 message 였다.

화요일 저녁 설교는, conference design 상으로는 별로 잘 align된 message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그 설교의 어떤 면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반복되는 한 구절.

‘예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내 귓전에 남았다.

화요일 설교에서, 설교자께서는,

자신이 경험한 ‘revival’을 언급하시면서, 그 revival의 결과로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열매로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우선,

나는 그분이 경험한것이 부흥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분이 그분의 시대에 경험한 일들은, 지금 이 20대가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일들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부흥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pseudo-revival (유사부흥)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유사부흥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렇게 세워진 사람들은 오랫동안, 때로 평생동안, 다른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학생들의 세대가 이렇게 지리멸렬한 것을 이 학생들의 책임으로 돌릴수만은 없다.

‘유사부흥’의 시대를 겪은, 세대가, 이 학생들에게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수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사부흥’의 시대를 겪은 것은… 바로 지금 내가 속한 세대이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5)

이번 집회를 통해 바라본 우리 학생 대중의 현주소는 정말 절망적일만큼 안타까웠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과연 이 아이들이 믿고 있는것도 기독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해있는 반지성적 모습,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 종교화/화석화되어 있는 지역교회 속에서 abuse에 가깝게 소모당하고 있는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복음이 아닌 종교로 해결하려는 모습, 세속적 욕망을 종교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모습…

도대체 이걸 어디에서부터 손을 보아야하는 걸까 하는 암담함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이런 학생 대중을 우리가 복음으로 섬기는 일은,

거대한 산을 숟가락으로 옮기려는 시도처럼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학생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종교지도자들에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몇가지 희망을 보았다.

첫째,

그런 와중에도, 소망을 둘 수 있는 아주 소수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능하면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을 많이했는데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런 대화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소수가 분명히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든 이 어그러진 세대에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둘째,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생각과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가능성을 보았다.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므로, 조금 direction을 제시해주면, 영향을 받는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을 그냥 다시 돌려보내려니 정말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째,

이런 학생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부서져라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구석에서 그 파란조끼들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이 한두번 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마구 따지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섬기는데, 이 학생들을 그냥 이 상태로 두시렵니까.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강사님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가슴뛰게 하는 일이었다.

20년 코스타를 참석해오신 내 룸메이트 강사님(ㅎㅎ)이, 학생들 사진을 열심히 찍으시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한때는 머리 숱도 많으시고 훨씬 파릇파릇하셨는데… 정말 한결같으신 분이시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진통제를 먹어가며 섬기시는 분도 만날 수 있었다. 목요일쯤 되어서는 눈에 피로가 가득해졌음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시는 분들을 보는 것은 분명의 소망의 한 자락이었다.

역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므로, 찬양의 열기가 달랐다.

그야말로 방방 뛰며 찬양을 하면서도 지칠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맨 뒤에 서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또 다른 세대를 그냥 보내실수는 없습니다. 이 친구들을 꼭 붙들어 주십시오. 이 친구들이 이렇게 뜨겁게 찬양하는 것 처럼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세워주십시오.

이 친구들 그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꼭, 꼭, 꼭… 좀 붙들어 주십시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4)

나는 방언으로 기도할때가 있다.

그러나 보통 그 방언기도를 많이 누리거나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방언기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령, 혼자서 기도를 할때 방언기도를 하는 경우는 참 드물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보니, 최근에는 방언기도 자체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나는 방언기도를 추구하는 그런 스타일의 신앙인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걸 추구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방언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내 기도가 많이 메마르고 있다는 표지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외로움과 관련되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KOSTA 집회에 참석해서 간사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참 오랜만에 방언으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방언기도에 대해 아주 무지한 사람이므로,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가 내게도 의미있는 집회가 되게 하시려나보다”

앞에서 쓴대로,

영적 메마름과 영적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소위 뜨거움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그 많은 생각들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자신이 없지만, 적어도 내 외로움의 내용과 근거, 그리고 해결책에대한 작은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3)

이번에는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를 해야 했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사실 이미 다른 세팅에서 했던 것이었으므로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full script를 다 써가며 말씀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큰 줄기만을 잡아놓고, 청중의 반응과 상태를 보아가며 내용과 방향을 조절하는 스타일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얼굴을 보고 만나기 전에는 ‘발동’이 안걸리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contents에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맛 없는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내어놓아야 하는 주방장같은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증상은 이번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월에 신시내티의 한 청년부 수양회 말씀 준비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다 준비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이 내 마음에 담기질 않았다.

그 말씀을 보아도 내 마음이 뜨거워지질 않았다.

막상 말씀을 나누는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보니 그 뜨거움이 일부 다시 회복되었으나,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현장에서 막 오바를 했다. 감정적으로 청중을 manipulate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내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아… 결국 이렇게 manipulate하는 싸구려 말씀을 전하고 말았구나 하는 자책이 나를 괴롭게 했다.

이번에 말씀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conference에 참석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그게 참 두려웠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담기지 않아도 좋으니 manipulative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여러번 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도 가능하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냥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나를 false manipulation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서,

이번에 내 기도를 잘 들어주셨다.

참 감사한 일이다.

정치는 세상을 바꾼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 시점(6월 3일 저녁), 아직 한국의 개표상황에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대충 중도우파쯤 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정부는 ‘나쁜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 나쁜 정부이거나, 대단히 무식한 정부라고 양보할수도 있겠다.

친일파-독재로 이어지는 그 흐름이 현재 한국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현재 한국 정치의 왜곡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2002년 대통령 선거때, 나는 정말 열광했었다.

물론 나는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였다.

난생처음 온라인으로 정당 site에 id도 만들고, 열심있는 fan이 되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때 나는 정말 세상이 바뀔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지나며 한국이 상당히 의미있는 발전과 성숙을 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보스턴에 방문하셨던 윤종하 총무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열광하고 있는 나와 같은 일단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열광하지 말아라. 그 사람이 대통령 된다고 세상 바뀌지 않는다… 라며 완전히 찬물을 끼얹으셨다. -.-;

허걱 이건 뭥미.

시간이 지나고 그때 그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본다.

나는 지금도 김대중이 한국 역사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낸것,

노무현이 한국 사회를 더 진보시킨 업적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역사의 후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의 민주주의, 대북관계 등등이 얼마나 많이 후퇴했는가.)

정치가 중요하고, 정치가 세상의 많은 것을 진보시킬 수도 퇴보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정치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가 궁극적 소망은 아니다.

정치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 한계가 있다.

세상이 바뀌는 방식은, 정권이 한번 바뀌는 것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벌어진 엄청난 참사를 보며,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현정부와 기득권 세력을 보며,

썩어빠진 언론, 검찰, 무능한 공직자들을 보며…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분노를 느낀다.

하루에도 몇번씩 심한, 아주 심한 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또한,

제발… 정말 제발…

한국 사회가 좀 깨어서,

적어도 박근혜나 이명박과 같은 사람을 리더로 뽑는 우는 범하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궁극적 소망을 두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결혼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싱글들은,

많은 경우 결혼만 하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문제가 결혼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대로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결혼생활을 통해서 더 아프게 드러나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정부를 바라보며,

악한 정치세력, 언론, 검찰 등등에 분노하며,

이 사람들이 어떻게든 청산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한국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치는 세상을 개선하고 바꾸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궁극적 소망은 아니다.

윤종하 총무님의 그때 말씀이 이제 다시 좀 생각이 난다.

아니, 좀 다시 떠올려보려고 노력한다.

요즘 정치뉴스를 보며 하도 많이 열을 받아서…. -.-;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2)

최근 나는 외로웠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내게 늘 가슴을 불타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의 flip side는, 내가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목마름이 내게는 늘 있다. 요즘 나는 이런 목마름이 더 깊은 상태였다. 왜 나는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만나는 Christian들은, 다음의 몇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

(2)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3)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 원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

(4)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 원하지도 않고, 내 신앙을 보며 우려하는 사람들

그런데 내가 만나는 Christian들의 빈도를 보면 대충 이런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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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을 나누면, ‘그건 그냥 네 스타일일 뿐이다’ 라는 반응을 참 많이 듣곤 했다. 심지어는 너의 그런 신앙은 문제가 많다는 반응도 참 많이 있었다.

정말 그런걸까.

이건 그냥 내 스타일의 신앙인걸까. 혹은 내 신앙은 문제가 있는 걸까.

이번 conference에 가기 전에, 

더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나마 내게 있던 그 불타는 마음이 식어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desire는 여전히 크지만, 막상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며 참 많이 마음이 무거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