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더 깊어지고?

Christianity Today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내었다.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eanings/2015/november/pew-rich-in-faith-get-richer-2015-religious-landscape-study.html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것은,
1. 2007년과 2014년을 비교했을때, 전반적으로 종교적 affiliation을 가지는 비율이 그리 크게 감소하지는 않았다는 것.
2.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종교적 practice를 하는 사람의 비율은 오히려 늘었다는 것. (성경읽기, 기도하기, 전도 등)
3. 개인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하는 비율도 높아졌고(거의 모든 age group에서)

그리고 또 주목해볼만한 것은,
낙태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은 그리 변하지 않았는데,
동성애를 받아들이자는 의견은 크게 증가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지난번에 내가 이 블로그에서 포스팅한, 한국의 청년-학생들의 현황에대한 연구조사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 연구 조사에서는, 크리스찬의 비율이 줄어든것과 함께, 헌신된 크리스찬의 비율의 감소가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변화는 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적어도 이 두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New Job Transition (25)

오퍼를 하나 받았다!
전 직장에서 lay-off 통보를 받은지 거의 3달이 되어서 받게된 offer이다.

우리집에서 자전거타고가면 30분 정도 가는 거리에 있는 동네회사이다.
차로는 한 15분 정도 걸리려나. traffic 감안하더라도.

내가 꽤 관심이 많았던 회사이고,
마침 내가 그쪽으로 분야를 좀 바꾸고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차인데, (medical device쪽 일이다.)
감사하게도 그 회사에서 offer를 주었다.

맨날 display나 sensor 같은것만 하다가, 갑자기 medical device 관련된 일을 하게되니, 좀 뜬금없다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뭐 하는 일은 내내 비슷할 것 같다. ^^

거의 두 주쯤 전에 대충 offer를 받게될 것 같다고 감지를 하고서는 그동안 인터넷을 무쟈게 뒤져서 대충 나 정도면 어느 정도를 받게되나 하는 data를 많이 모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excel spreadsheet을 만들어서,
내가 이전 회사들에서 받았던 월급, 주식, 보너스 등등을 적고,
이번에 이 회사에서 받았으면 하는 compensation package를 나름대로 적어보았다.
– 받았으면 좋겠다는 희망 compensation
– 이 정도 받게 될것 같다는 예상 compensation
– 이 이하라면 다른 직장을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walk-away compensation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서 적었다.

이 회사에서는, 대충 내가 생각했던 ‘예상 compensation’ 정도를 주었다.

실업자인 나로서는, 당연히 땡큐~ 여야 하는데… 음… 약간 좀 아쉽다.
이것보다 조금 더 줄수는 없었을까. 참 생각이 간사하다.
(사실 받은 offer도 상당히 generous한 것인데…)

아..참… title이랑 소위 ‘레벨’도 내가 생각했던것보다는 한 단계 정도 더 낮다.
그런데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보니 내가 생각했던 레벨은 그렇게 쉽게 주지를 않는다고…
전반적으로 이 회사는 title deflation이 좀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title이나 그런건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job transition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다.
내가 지난 금요일 밤에, counter offer를 보냈고, 그쪽에서는 오늘 논의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으로 봐서는, 빠르면 다음주 월요일부터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lay-off 통보를 받은지 정확하게 3달째 되는 날이다.

뭔가 multiple offer도 없고, 지난 몇주는 새롭게 apply 할 수 있는 job 조차도 많이 고갈되었었다.
내가 뭔가 잘나서 job을 비교적 금방 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쌍해서 job을 하나 연결시켜주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 알아듣고 있는 중이다.

참 감사하다…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1.
토니 캠폴로가 신학교에 다닐때였다.
설교학 실습 시간이었는데, 학생들이 각자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하고 교수가 그것을 평가해주는 시간이었다.

토니 캠폴로는 아주 훌륭하게 설교를 해 내었다. (아는 사람을 알지만, 토니 캠폴로는 아주 뛰어난 설교가이다.)
다른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고, 토니 캠폴로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교수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설교가 훌륭하긴 했는데, (훌륭한 말솜씨, 적절한 예화, 정확한 본문 분석 등등) 너무 ‘훌륭한 설교자’가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2.
내 스스로를 판단해 보건데,
나는 다른이들로부터 칭찬과 칭송을 많이 받는 편이다.
(실제로 내가 괜찮은 수준보다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또 큰 문제는, 내가 그것을 매우 즐긴다는 것이다.
나는 대표적인 people-pleaser이다. 다른 이들이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을 매우 줄기는 사람이다.

3.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내가 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만 목매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깊이 복음의 감격에 빠져 있을 때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나도 내가 주목받게되는 것을 몹시 불편해하면서 피했었다.
심지어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좋은 일’ 인것같아 보이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내가 드러나는 것 같으면 그냥 그 ‘좋은 일’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마음들이 많이 무너지고,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 자꾸만 다시 올라왔다.
사역의 need가 크니까, 내가 좀 드러나더라도 일단은 이걸 좀 해야하지 않겠나.
내가 이걸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하기가 어려운데, 일단은 눈을 질끈 감고 내가 드러나는 일을 해야하지 않겠나.

그러면서 점점 내 자신도 ‘내가 드러남’에 대해 둔감해졌고. 어느순간 내가 드러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사람들이 내게 ‘칭찬’을 할때에도,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드러나셨는가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말을 잘했나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4.
고린도전서 말씀이 나를 깊이 찌르고 있다.
내가 드러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다.

찬 바람이 부니 연극이 보고 싶다

우리 동네도 이제 꽤 쌀쌀해졌다.
아침 저녁으로는 난방도 잠깐씩 하고 있다. 게다가 민우가 초저녁에 자고 밤 늦게 공부하는 패턴을 최근 유지하고 있어서, 밤에 난방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늘상 바쁘게 지낼 때라면야… 그냥 조금 더 도톰한 외투를 꺼내 입고는 하던 일 열심히 하면서 지내겠지만,
요즘 그러질 않으니, 찬 바람이 실제로 느껴진다.
아… 여기도 가울/겨울 시즌으로 접어드는구나 하는 것도 인식하게 되고.

그런데,
이 찬바람에, 꽤 뜬금없이 연극이 보고싶다.
사실 내가 한국을 떠나온지 20년도 더 되었고, 한국에서 연극을 본것도 역시 그 이상 되었는데…
한국의 작은 소극장에서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그래도 꽤 비싼 연극표를 사서 보았던 기억이 새삼난다.

그나저나, 요즘 민우가 연극연습이 한참이다.
이 바쁜 와중에, 하루에 4시간씩 시간을 들여가며 연극연습을 하고 있다.
이번 오늘부터 학교 강당에서 연극공연을 한단다.

민우가 이번이 벌써 4번째 공연인건가.
연극을 그토록 즐기면서 재미있어하는건 참 나를 닮았다. 참 신기하다. 나는 민우에게 연극에 대해서 한번도 이야기해본적도 없는데 말이다.

한국의 작은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을 좀 보고 싶긴 하지만,
내 사랑하는 딸내미가 하는 연극이니, 그걸 보면서 내 연극관람 충동욕구를 좀 채워봐야할 듯 하다.

수염

한동안 수염을 길렀었다.
아마 본격적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던 것 같다.
그 이전에도 휴가기간 동안 수염을 깎지 않고 지저분하게 놔두었다가 휴가 끝날 때 깎곤 했었는데…

거의 매년,
여름에는 더워서 수염을 깎고 살다가,
겨울에는 thanksgiving 휴가를 지내면서 기르기 시작해서 다시 여름철까지 기르곤 했었다.

아내가 여자친구가 보통 수염을 기르겠다고 박박 우기는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당신은 조인성이 멋있어, 김흥국이 멋있어?”

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조인성같이 멋있는 사람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김흥국 같이 들이대는 스타일의 사람도 아니니…
내가 수염을 깎는다고 조인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수염을 기른다고 김흥국이 되는 것도 아닐것.

내가 수염을 기르는 이유들을 들자면…
– 약간 더 나이 들어보이는 효과가 있다.
– 머리 숱이 적어지면서 어떻게든 얼굴에 붙어있는 털의 총수를 유지한다는 위안이 된다.
– 무엇보다도, 매일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나는 수염을 기르더라도 깔끔하게 단장을 한다거나 수염을 잘 길러서 멋을 내기 보다는,좀 지저분하게 보일때가 많이 있다.
지금 수염을 기르지 않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job interview를 할때 좀 더 깔끔하게 보이고 싶어서 이다. ^^

혹시 조만간 job을 찾게된다면, 이번 thanksgiving에는 다시 게으름을 피워볼까 생각중이다.
음… 다시 곧 수염을 좀 길러볼 수 있으려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의로부터 얻어졌으면 하는 것들

나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한다.
하지만, 이 사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좀 일어나면 좋겠다.

1. 더 이상 ‘속지 말기’ 결심을 좀 하면 좋겠다.

나는, 김대중-노무현이 비판받았던 것과, 이명박-박근혜가 비판받는 것을 좀 잘 비교해보면 좋겠다.

김대중-노무현은, 그들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를 속이지 않았다. 물론 김대중은 DJP 연합을 통해서 노무현은 후보단일화를 통해서 보수층을 안심시키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대북정책, 경제정책등에대해 계속 일관된 스탠스를 유지했다.
말하자면, 김대중-노무현에대해 대중이 비판하게 된 것은, 나는 노란 옷을 사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입어보니 생각했던 것 만큼 좋지 않네…
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물론 일부 진보진영에서는, 샛노란 색인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색이 좀 흐릿하다고 비판을 했었다.

반면,
이명박-박근혜는, 자신이 취하고 있는 스탠스를 속였다.
마치 중도인 것 같이 포장을 하고 실용, 혹은 국민 통합을 할 수 있을 것 같이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결국 집권을 하고나서는 본인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하자면, 나는 노란 옷인줄 알고 샀는데, 사고보니 파란색이네… 뭐 그런 것이다.

대북정책에 대해 강경책이 더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록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경제에 대해서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비록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자신의 노선을 밝히고, 그것을 가지고 건강하게 토론하고 논쟁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들이 좀 있으면 좋겠다.

이상돈, 김종인 등등이, 나 이럴줄 몰랐어… 라고 이야기 하는데,
정말 몰랐을까?
이럴줄 알았지만, 그냥 한자리 기대하고 지지했는데 그냥 팽당한건 아닐까.

2. 제대로 된 논의와 토론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면 좋겠다.

나는, 미국의 오바마 케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었다. (뭐 나는 미국에서 투표권이 없으므로 내가 지지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그런데, 오바마 케어를 도입할 당시, 미국의 대중적 지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오히려 오바마 케어를 지지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그 다음 선거에서 대거 낙선을 했고, 민주당은 의회 의석을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오바마는 “이것이 내가 대통령이 된 이유다” 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밀어붙였고, 장렬한 민주당 의원 전사자들을 남긴 채 결국 입법하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박근혜 정부가, 비록 지금 국정화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높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내가 대통령이 된 이유다” 라고 생각하고 한국 역사교육의 틀을 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라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정말 그렇다면, 미국에서 오바마 케어가 도입될 때 했던 것 같이, 대통령을 포함해서 그 행정부의 추진세력이 광범위하게 토론에 참여하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이분들이 토론이나 설득 그런걸 잘 하는 분들이 아니므로 그것에 자신없어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걸 박근혜 정부에서 이루어 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 리더를 뽑을 때는, 수첩보고 읽는 것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실용 혹은 중도의 탈을 쓴 극우 정치인을 좀 구별해내는 방향으로 사회가 진화나가면 좋겠다.
지금 국정화 논의에 대한 싸움도 물론 할 가치가 있지만, 좀 더 장기적으로… 상식과 논리와 토론이 통하는 정치, 사회를 추구하고 기대하는 일들이 나오면 좋겠다.

3. 좀 훌륭한 보수 지도자가 한명쯤 나오면 좋겠다.

Arguably,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좀 더 개혁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정치가로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presence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그에 견주기 어렵다.
비록 나 같은 사람이 동의하기 어려운 정책을 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좀 제대로된 보수 정치 지도자가 나와서 그 입장을 효과적으로 대변하고 설득하는 일이 한번쯤 있으면 좋겠다.
맨날 자기 뜻에 반대하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그런 유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철학을 가지고 설득하고 토론할 줄 아는 사람.
만일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나는 비록 그 사람의 정책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치 발전을 위해서 그런 사람에게 투표할 의향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진보-보수의 싸움보다도, 상식-비상식 혹은 논리-억지의 싸움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진보-보수의 싸움으로는 진영논리 밖에는 남지 않게 되어 통합이 불가능하지만, 상식-비상식의 구도가 형성되면 진보와 보수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민우의 학업

어제는 민우의 생일이었다.
이제 민우가 벌써 17살이 되었다!

민우는 유난히 얼굴이 어려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ㅎㅎ)
그래서 도무지 17살 같아 보이질 않는다.

최근 민우는,
학교의 workload가 커서 많이 힘들어했다.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일주일씩 보내야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 우리 부부가 step-in 해서, 민우의 aggressive한 class schedule을 좀 쉽게 만들어주었다.
Honor class 하나를 regular class로 낮추었다. (학교 교장선생님에게까지 사정사정 부탁을 해서 겨우…)

지난 9월에 첫 ACT를 보았는데, 처음 본것 치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

그렇지만, 적어도 학업에 관한한,
나는 민우가 자기의 능력에 꽉 차는 (혹은 넘치는) high ranking의 학교에 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우가 A급의 학교에 갈 능력이 되면, B+급의 학교 정도에 갔으면 좋겠다.
혹은 B급의 학교에 갈 능력이 되면, C+ 급의 학교에 가면 좋겠다.

나 자신이 비교적 ranking이 높은 학교들을 다니면서,
아… 저 친구가 이 학교에 오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행복했을텐데… 싶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가끔은 나 스스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정말 학교생활을 하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중요한 가치관들을 세워나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다행히도 미국은,
꽤 다양한 종류의 학교들이 있고, 그 학교마다 독특한 교육방침이나 커리큘럼등이 있는 경우가 많아,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지않을까 싶다.

현재 민우는, Liberal Arts college 같은 데를 가고 싶어한다.
가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한가지 문제는,
Liberal Arts 학교들이… 학비가 다들 많이 많이 비싸다. -.-;

New Job Transition (24)

새로운 회사에 apply를 하면, 많은 경우 그 회사에서 ‘reference’를 요구한다.
그러면 나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너를 reference로 넣어도 되겠느냐”고 묻고, 그 사람의 contact information을 지원하는 회사에 준다.

그러면 회사는 내가 이야기해준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권오승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물론, 나도 새로 job을 찾는 다른 사람이 나를 reference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연락을 받아서 “너 Paul알지? 걔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 job transition기간에, 당연히 reference를 부탁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감사하게도 기꺼이 그렇게 해주겠다고 응해주었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별로 득이 될것도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kindness를 보여주는게 참 감사하다.

기술의 윤리적 문제?

MIT의 technology review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다루었다.

(이미 읽은 분들도 있겠지만.)

소위, self-driving car를 만들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동차가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a)는 직진을 하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회전을 하면 한사람만(+운전자)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경우,
(b)는 직진을 하면 행인이 죽거나 다치고, 회전을 하면 운전자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
(c)는 직진을 하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회전을 하면 운전가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이다.

순전히 ‘공리적’으로만 생각하면,
a,b,c 모두 회전을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이야기하기 쉽다.
왜냐하면 더 적은 사람이 다치게 되고, 혹시 운전자가 다치는 경우라 하더라도 운전자는 차 안에 있으므로 부상의 정도가 덜 할 가능성이 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인위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다치게하는 것이 괜찮은 건가?
과연, 다른 사람대신 운전자가 죽거나 다치게되는 차를 소비자가 살까?
뭐 등등의 질문이 있게 된다.

Technology review에서 선택한 기사의 제목이 아주 자극적이다.
“Why Self-Driving Cars Must Be Programmed to Kill”

외로움과 은혜

사람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많이 오해하곤 한다.

가령, 사실 나는 정말 겁이 많다.
어릴때부터 정말 겁이 많았다. 어려서는 세발자전거가 무서워서 타지 못하고, 내 여동생보고 앞에서 타라고 하고 나는 뒤에 쪼글고 앉았었다.
그 겁많던 아이는 그러부터 40+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겁이 많다.
이번에 lay-off 되고서도 나는, 어떤 순간엔 정말 죽을만큼 두려웠었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그렇게 많이 두려웠다. (실제 두려워해야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게 겁장이 아닌가.)
이를 악물고,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어떤땐 그럭저럭 견디어 내었지만, 어떤 순간에는 무너지듯 마음이 힘들때도 있었다.

나는 직설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한다.
정말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꺼내서 이야기를 하려면, 몇번이고 머리 속에서 rehearsal을 하곤 한다.
심지어는 며칠, 혹은 몇주동안 고민할때도 많다.
어릴때부터 나는 그랬다. 가게에 가서 물건값을 물어보고 물건을 사는 것을 하지 못했다.
가게 어른에게 가서 물건 값을 물어보는 것이 두려웠었다.
그 소심한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소심하다.

나는 너그럽지 못하다.
아주 쉽게 삐지고 뒤끝도 길다.
속도 좁고,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해야한다. 많이 생각을 곱씹고, 많이 기도해야한다.
어떤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데,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할때도 많다.

몇가지 예를 들었지만, 사실 리스트는 무지하게 길다.
나는 게으르고, 화를 잘 참지 못하고, 대단히 악한 생각을 자주 하고,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다른이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 정말 싫고, 오해받는 것을 정말 잘 견디지 못하고, 여러가지에 많이 예민하고, 까다롭고, 의지가 약하다.

그런데,
내가 이렇다는 것을 아는 정말 잘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낀다.
그냥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이를 악물고 하고 있는 모습이 내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 같이 생각될때가 참 많이 있다.

가끔은,
겁많고, 소심하고, 속 좁은 나를 잘 알아, 있는 그대로 좀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런 사람이 없어 많이 외롭게 느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님께서 그런 나를 그렇게 받아주셨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는데도 나를 받아주셨다.
그리고 겁이 많은 내가 용기를 갖게도 해 주시고, 소심한 내가 용기를 갖게도 하시고, 속 좁은 내가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게도 도와 주신다.

내가 처음, ‘은혜’라는 개념을 접했을때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이유이다.
내가, 우리 주님께 붙어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