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자아비판의 오류

나는 자아비판을 즐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매우 성숙한, 자기 성찰을 잘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내가 자아비판을 즐기는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음을 본다.

1. 자기 방어이다.
내가 내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다른이가 나를 비판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소 치사한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2. 게으름이다.
겸손, 혹은 자기성찰 이라는 건강한 가치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나와 내 주위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 스스로 건강한 가치를 지킨다는 자긍심도 지키게 되고 스스로의 만족감도 느끼면서 부지런히 나와 내 자신을 살피는 귀찮음도 피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지이다.
최근 어떤 형과의 대화를 하면서, 내가 그 형에게 내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거짓이 많은지, 나의 manipulative한 성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작하여 만들어낸 사역의 열매가 많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자 그 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그렇게 맺으셨는데… 과연 네 능력으로 심지어는 아주 얄팍한 수준의 사역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하나님의 일하심을 덮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릇된 자아비판은 아닐지…

참… 벅차다.

잠을 설쳤다.
설잠을 자다가, 전화로 뉴스를 확인하다가 하면서 지난 밤을 보냈다.
한국과 미국 뉴스 app에서 ‘속보’ notification이 계속 울려댔다.

밤에 깨어 생방송 동영상을 보다가 울고,
그러다 깜빡 잠이들고…

이 블로그에 뭔가를 더 쓰기에는 워낙 좋은 생각들과 글들을 많으니 내가 여기에 생각을 적는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늘상 쓰던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이렇게.

몇가지 완전 잡생각
오늘의 많은 detail은, 몇년 뒤 대입시험에 괄호 넣기 문제로 나올 것 같다.

또 한가지 재미 있는 것.
온라인에서 JTBC는 다른 모든 매체를 완전 압도한다!
JTBC 시청자는 6만명 수준인데 반해,
KBS가 1만명 조금 넘고,
나머지는 몇천명 수준.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3)

그런데 지금은 침체의 시기임이 분명하다.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하면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약을 먹는것과 같다.
예전에는 그 약만 먹으면 바로 팍팍 효과가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혹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주 희미하다.
심지어는 그 약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전도를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공동체는 성장하지 않고, 사람들의 헌신이 그쳤다.
헌금은 줄어들고, 찬양의 소리는 작아지고, 기도는 짧아졌다.

내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사역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2)

내가 속한 공동체의 경험이나 내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내가 부흥의 시대를 살았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가지 다른 생각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부흥의 시기를 거쳤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나는 정말 아주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었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그런 경험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게 그저 내가 속한 공동체만의 현상이 아니라 한번도 접점이 없던 다른 공동체에서도 그런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아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복음을 전하’고 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사방에서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선교사로 삶을 드리는 사람도 많았고, 자신의 커리어 선택을 급격하게 변경하는 사람들도 정말 흔했다.
교회 안에서 평생 그 복음을 가지고 살고, 복음 안에서 성장하면서 살고, 그 복음을 전하면서 살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그때는 그게 그냥 당연한 것인줄 알았다.

정말 기도하고 성경공부하면 복음을 모르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예수를 믿는 것이 당연한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기도하고 헌신해서 어떤 공동체를 시작하면, 그 공동체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삶을 정말 제대로 드리고 온전히 헌신하는 것 이외에 다른 option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지, 그저 듣기만 하면, 제대로 이해만 하면 당연히 줄줄이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경험들이 그러 했으니까. 내 80년대와 90년대의 경험은 정말 그러했으니까.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1)

교회의 역사는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를 거친다.
여기서 부흥의 시기라 함은, 양적 팽창이 많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이야기하고,
침체의 시기라 함은 양적 수축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단순화 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부흥의 시대’에 내 20대를 보냈다.
그렇게 ‘부흥의 시대’를 보낸 것은 내 신앙과 신학에 당연히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실제로 별것 아닌 말을 가지고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들을 경험했고,
아주 서툰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쑥쑥 성숙해가는 일을 경험했다.
참 별것 아닌 설교에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것을 통해 헌신하는 것도 보았고,
아주 작은 모임이 순식간에 몇배, 몇십배로 커지는 일들도 경험했다.

그런데,
지금이 ‘침체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그것은 한국 교회도 그렇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의 한인교회도 그렇고, 미국교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부흥의 시대를 젊은 시절에 경험한 사람으로서,
침체의 시대를 사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내 기도는 끊임없이 lamentation이다.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기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나보다 열등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사람을 위해서 slow-down 하면서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합당할까.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해봐라… 하면서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성취한 유익들을 그 사람과 나누겠다는 마음과 목표로 살아가야 할까.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스스로가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한 열등감에 이미 빠져 있거나,
헛된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면..?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남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
경쟁구조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쉽지 않지만,
더불어 가고자 해도 어떻게 해야할지 하는 것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운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엄청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버릴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

극심한 경쟁구조는,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모두 망가뜨리는 듯 하다.
경쟁구조 속에서도 건강한 영성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 물론, 내가 열등한 사람일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은… 이것과는 다른… 또 다른 커다란 묵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두가지 고민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지난주는 이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뭔가 내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독백하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을 가졌다는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정말 아팠다…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부모가 되었건,
선배가 되었건,
목회자가 되었건,
단체의 리더가 되었건,
선생님이 되었건,
직장 상사가 되었건 간에…

누군가를 이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boundary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boundary로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게 된다.

그 risk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이끌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노화는 병일까?

Medical device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면서 일을 하다보면,
‘노화(aging)’와 관련된 여러가지 병들에 대한 치료나 관리에 대한 일들에 연관을 맺게 된다.

그런데 참 흥미롭게 느끼는 것은,
이쪽 industry에 있는 사람들중 아주 많은 사람들은 ‘노화’를 ‘병’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특히 Alphabet/Google 소속의 Calico 라는 회사는 아예 그 회사의 목표 자체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노화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다루어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다…

Bill Hybels 도…

Bill Hybels 에 관해 제기된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는 모양이다.
그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가운데 하나는, Nancy Ortberg의 포스팅이다.

보아허니, Hybels가 심지어는 Nancy Ortberg에게도 ‘부적절한 접촉’을 했던 모양이다.
허…참…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결국은 ‘목사’라는 자리가주는 ‘power’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 power가 없는 혹은 그런 power를 스스로 가지지 않는 목사님들이 계시다.
그러나 목사라면 가지는 일정한 power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KOSTA 등에서 만나는, ‘건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젊은 목사님들과 만날때도 나는 너무나도 자주…
그분들이 power에 쩔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제 40대의,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 목회자들도,
대화를 하다보면 그분들에게서… ‘아… 목사로서의 권위를 잡는구나…’하는게 확~ 느껴질때가 많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내가 그분들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그분들을 ‘높여’드리면… 그분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걸 홀딱 받아 드신다.

그것에 예외인 목사님을 정말 거의 만나지 못했다.

나는 목회자들을 무조건 까거나 그분들을 불신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러가지 면에서 존경하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러나,
현대교회에 마련되어 있는 ‘목사’라는 자리는,
혹시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