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해 포기하지 않기

내가 존경하는 어떤 형의 이야기.

이 형이 1년동안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을 떠나 다른 지방에서 지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형은 신문에 나거나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학문의 세계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알수 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진 정도의 사람이다.

이 형이 임시로 있어야하는 그 지방에 있는 어떤 대형교회에 1년동안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도, 이 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형이 1년동안 다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아주 치우친 번영신학의 message를 반복해서 이야기하였다.

처음 몇번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쳤는데,
나중에는 매우 힘들게 그 message들을 들었다고 한다.

이 형은 그 교회의 젊은 부목사님들과 대화하면서,
우선, 그 젊은 부목사님들이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동의하는지 조심스럽게 여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번영신학의 message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 부목사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그 목사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당신의 job security를 포기하고서라도 그 목사님에게 고언을 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그 목사님이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고는 둘째 치고라도, 그 고언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후에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형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진정으로 사랑어린 충고를 결국은 하였다. 그 목사님을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그 목사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신앙의 도움을 학생때 받았는지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목사님의 현재 message가 치우쳐져 있다고. 목사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목사님의 message를 매우 안타깝게 들어왔다고.

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마는 듯 하다.
그냥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냥 거기서 멈추어 더 이상 어떤 노력을 하려 하지 않는 듯 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고언하고 충고하는 그 형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끄러웠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

자신을 정당화 하는 윤리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대단한 괴로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해보이는 일을 할때 사람들은 늘 그 상황을 정당화하려고 노력을 하기 마련이다.
시간을 허비한 것에대해 그래도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고 정당화를 한다.

그렇지만 삶은 꼭 보내고 견뎌야만하는 무의미한 시간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숭고한 가치고 포장하는 일을 해서 자기최면을 한다. 그래야만 그 무의미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

내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21세기 지금 내가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 살아가는 기독교적 의미를 찾고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소위 기독교 세계관에 천착하는 이유이고, 여러가지 정보를 습득하며 공부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혹시 그냥 이것이 무의미한 것인데 내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다.
괜히 내 일상을 glorify함으로써 이 무의미함을 견디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실존주의가 병립 가능할까?
기독교화 허무주의는 병립 가능한 것일까?

운전면허 없는 사람이 운전연수 강사 하기

운전면허가 없고, 운전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 운전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것은 우스운 일이다.

세상(context)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성경(text)에 대하여도 왜곡되거나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하는 책, 글, 강의들을 접할때 가끔은…
아… 차라리 저분들이 그냥 예수 잘 믿으라는 얘기만 해주면 좋겠다 싶을때가 있다.

그 예수 잘 믿는 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하는가 하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민하고 찾아서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음악

한때 나는 음악을 참 좋아했었다.
대학때는 영화음악에 빠진적도 있었고,
당시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나온 돌비 카세트 테잎을 사서 클래식 음악을 미친듯이 들은 적도 있었다.
동물원, 장필순, 김광석, 박학기 CD를 사서 열심히 들었고,
여러 찬양 음악들을 수집하듯 혼자 편집해서 나름 편집한 카세트 테잎을 몇개씩 가지고 있기도 했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처음 산 것 가운데 하나도, 카세트 더블 데크와 CD 플레이어가 포함된 ‘스테레오 시스템’이었다.
기숙사 방에 들어오면 처음으로 하는 일이 음악을 트는 일이었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때까지 음악을 듣지 않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부할때도 음악을 들으며 할때가 많았고, 당시에는 고가의 오토 리버스 워크맨을 가지고 꼭 어딜가든 가지고 갔다.

그렇게 늘 듣던 음악을 덜 듣기 시작한건,
결혼을 하고 민우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였던 것 같다.

또 점점 습득해야하는 정보들이 늘어나면서,
음악을 듣는 시간에도 나는 뭔가 내 performance에 도움이되는 것들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해서 무조건 talk radio를 들으며 보내기도 했고,
각종 오디오북에,
설교 tape에,
최근에는 podcast 까지.

음악의 도움을 얻어,
내 바쁜 호흡을 좀 slow down 하고 싶다.

효율적으로 일하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이다.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이제 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도태되어버리고 퇴출된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는 사람을 쉽게 짜르지는 않지만, 내가 이 직장에 2년 반 가까이 일하면서도 일을 잘 못해서 짤린 사람들이 좀 있다. 농담도하고 잘 지냈는데 하루 아침에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니 짤렸다는 거다.

대개는 할 수 있는 양보다 해야하는 양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효율성을 추구해야 어느정도 주어진 일들을 할 수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다들 똑똑하고 일을 잘 하기 때문에 함께 highly productive하게 일하는게 가능한 편이다.
그런데 가끔 그 중에서도 productivity가 살짝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bottle neck이 되어버린다.
직장에따라 좀 차이가 있지만, 지금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는 누가 bottle neck인지 확~ 보이는 구조다.
한시간 미팅을 잡아놓고, 그 안에 중요한 결정들을 해야하는데 누구 하나가 말을 제대로 못하고 버벅대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뒤쳐지게 된다. 그리고 그건 정말 생존의 문제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할때는 정말 최고의 productivity를 유지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최고의 productivity를 해치는 요소는 적극적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그런데…
그러다보니 나는…
말귀를 잘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답답해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번 얘기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면 바로 그 discussion 자체를 닫아버린다.
좀 참고 기다리는 일을 정말 잘 하지 못한다.
참고 기다리는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아주 많이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만한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그 정신줄을 놓고 하고 싶은대로 달려버리면…
나는 순식간에 폭주기관차같이 되어버린다.

요 며칠,
말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더 힘들게 느껴지고 있다.

내가 너무 많이 병들기 전에,
이 증상으로부터 회복해야한다.

리더쉽… self-realization

조직/모임/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리더쉽을 있다고 착각하며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조직/모임/공동체를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리더쉽을 없다고 부인하며 피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자신에게, 지금 이 시점에 주어진 리더쉽은 어떤 것일까.
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얻어 나 자신도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감당해야할 리더쉽을 회피하며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묵상을 하며, 회사 생활을 하며, 성경공부를 섬기며,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돌이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보는데…

일상과 Contra Mundum

일상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기독교적 접근이 나는 늘 불편하다.
나는 일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상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은채,
그 일상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적이지 않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했을 중세의 어떤 음악가는…
면죄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을 것이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했을 일제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신사참배를 정당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하는 이 시대의 어떤 사람은…
어떤 황당한 삶의 정황을 만들어내며 살게 될까.

Apathy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7:32)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으로는,
apathy는 신앙이 없는 것의 표징이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죄와 싸우는 처절함도,
나를 둘러싸고있는 시대정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다면…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apathy는 안타까워해야할 모습이지만 apathy 자체를 꾸짖거나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개선되지 않는다
apathy를 다루는 방법은 열정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Youtube HQ에서 총격 사건

어제 Youtube HQ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

1.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정말 아주 막 심한 욕을 해댔다. 아주 쌍욕을 했다. 그건 총격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향한 분노라기 보다는 그 evil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evil을 그대로 놓아두는 썩어빠진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 그런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2. Google 내의 Christian들의 메일링 리스트가 있다. 몇명이나 그 리스트에 있는지 보니 1520명이 들어있다.
그런데 Youtube에서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들중 소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주 나는 인상적이었다.
– 일단 계속해서 기도한다는 일종의 기도체인이 만들어졌다.
–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로 Google hangouts으로 만나는 ’30분짜리 기도미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함께 들어와서 기도하자고 요청을 했다.
–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런 시기에 Christian group 밖을 향한 기도를 하자고 요청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런 기도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목하자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성숙하면서도 신중하지만 매우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3. 나도 사방에서 괜찮느냐고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facebook에 나 괜찮다~고 포스팅도 했다…

출장이 힘든이유

나는 유난히 출장 기간에는 더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음…. 힘들어 한다고 하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

시차 때문인가,
뭔가를 짧은 시간에 이루어야하는 부담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일이 많아서 일까…

이번 출장은,
일본과 한국의 여러 도시들을 다녀야 했다.
그러니 일 자체가 많았기 보다는 기차나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쿄토에서 아침 6시 반 기차를 타고 쿄토에 가서 미팅을 하고,
바로 기차를 타고 와서 오후에 오사카에 가야하는 일정도 있었다.
식사는 왔다갔다 편의점에서 해결하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여러 도시들을 다니면서 미팅들을 쭈루룩~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게 왔다갔다 하는 게 많아서 그렇지,
이동시간이 많다보니 오히려 일하는 절대 양은 많이 적은 일정이었다. (의도적으로 좀 널럴한 일정을 짜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부담이 큰 미팅들이라기 보다는, 내가 관리하는(?) 회사들을 둘어보는 일정이었으니… 비교적 stress도 적었다.

그래도 뭔가 출장을 와서 눌리는(?) 기분은 그대로였다.
왜 그랬을까?

내가 이번 출장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인 것이다.
내가 introvert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보통 한 회사에 가서 미팅을 하면,
나는 혼자서 가고, 저쪽에서는 많으면 10여명, 적으면 5~6명 정도가 앉아있게 된다.
그럼 나는 계속 다대일로 대화를 해야하고, 그 사람들을 많은 경우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게 아주 촉각을 세운다.
그러니 많은 말을 해야하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다대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미팅을 하는 것이 아마 내게 힘든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미팅들을 하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면 대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저녁을 많이~ 먹고 잔다.
그러니 출장을 다니면서 자꾸만 살이 찌게 되고.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이게 일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