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퍼진 것과 같이, 각처에 속히 퍼져서, 영광스럽게 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심술궂고 악한 사람에게서 벗어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명령한 것을 여러분이 지금도 실행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실행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는 것과 같이 인내하기를 바랍니다.

– 데살로니가후서 3장 1-5절

정신승리

언제부터인가 아Q정전에 나오는 ‘정신승리’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그렇게 정신승리로 빠지는 것이 얼마나 loser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나는,
사실은 패했지만 그 패배를 억지로 정당화하는 정신승리는 정말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패한것 같아 보이지만, 끝까지 지키고자하는 가치를 지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사자의 밥이 되거나 산채로 화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도,
지키고자하는 가치를 끝까지 지켜내며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은 살아날 수 있었고, 그들의 죽음은 후에 다른 이들에게 등대가 되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늘 삶에서 정신승리를 추구한다.

외형적으로 패배한것 같아 보이더라도,
지키고자하는 스피릿을 지켜낸다면 그것이 승리한 것이다.

Job transition

요즘 우리 교회에서 직장을 옮기는 것과 관련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몇사람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그런데 보니까 그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있는 것 같아서, 교회에서 ‘job transition’에 대한 5주짜리 프로그램 하나를 하려고 한다.

구직, 전직 등을 할때 해야할 생각들, 고려할 것들을 이야기하고,
resume나 linkedin profile 만드는 것도 조금 도와주겠다고 광고를 했더니만…
순식간에 15명이나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니던 회사가 망한 경험도 있고, layoff를 당한 경험도 있고, 회사가 맞지 않아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절실하게 다른 job을 찾아본 경험도 있다. 졸업 후에는 취직이 되지 않아 꽤 오랜기간 job search만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기간에 만났던 하나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시기에 내게 오셔서 만나주셨던 경험들이 나를 평안한 시기에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이렇게 신청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좋은 job을 찾을까 그런 관심이 크겠지만,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 기간을 하나님과 꼭 함께 보내야한다는 것이다.

요즘 정말 장난 아니게 바쁜데…
괜히 이것도 하겠다고 일을 벌여서 죽어라고 바쁠 판이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할 수 있다면… 조금 더 힘을 내 볼 일이다.

성공 (11)

원래 이걸 이렇게 길게 쓰려고 했던게 아닌데, 쓰다보니 길어져버렸다.
독자들중 어떤 분이 얘기해주신 것을 조금 더 담다 보니…

결국 하려던 이야기는 이거다.

  • 성공은 매우 다양한 재능과 상황이 모두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 지금 성공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심하다.
  • 성공에 목매어 사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resource를 성공에 모두 투자하여 살지 말아야 한다. – 사랑할 여유를 남겨두고 살아야 한다.
  • 나 개인적으로는 성공병에 걸려있어서 자족하는 것이 부족하다.

성공에대해 이렇게 쓴 글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치라고 여겨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곳 실리콘 밸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스스로도 계속 점검하며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계속 나누어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되긴 한다.

지극히 실리콘밸리의 환경에 적용될만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성공 (10)

나는 여러가지로 성공에 대한 욕심이 큰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 욕심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말 많이 노력을 해야한다.
내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내가 중학교때, 우리학년이 한 1천명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반에 70명씩 14반쯤 되었나…)
순전히 중학교 수준에서는 성적 잘나오는게 성공 기준의 대부분이었다.
우리때는 전교 석차가 중간고사/기말고사 끝날때마다 교무실 앞에 붙었었는데…
그때 내 기준으로는 내 이름이 맨 위에 있지 않으면 실패였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성공을 했었다.
그러니 그때 내 기준은 내 동년배의 0.1%안에 드는 성적의 수준이 성공이었던 거다.

나는 그냥 그때 그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거지, 우리집이 상위 0.1%안에 드는 부자였거나 그런건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상위 0.1%안에 들만큼 잘생겼거나 운동을 잘했던것도, 내 성격/인격이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뛰어난것도 아니었다. 남자애들끼리 이야기하는 반에서 짱먹고 그런것과는 정말 거리도 멀었다.

그 후 공부를 하면서는, 나름대로 꽤 좋은 대학교에서 거의 한번도 과수석을 놓치지 않을정도였고,
꽤 알려진 학교로 유학가서도 거기서 공부로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 내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나의 전반적인 성공도 그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불합리한 기대를 갖는 경우가 있었다.
어릴땐 정말 그랬고, 나이가 꽤 든 지금도 가끔 그런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이 시리즈의 앞글에서 썼듯이, 성공이라는건 그저 학점 얼마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합적인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내가 ‘왕년에’ 공부 잘했다는 것이 지금 그만큼 성공하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특권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모두 얻었다고 이야기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능, 건강, 태어난 환경, 그리고 성격까지도…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내 성공의 정도에대해 내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사는건 때로 나를 게으르지않게 지켜주는 역할을 해줄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나를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Grumpy“로 만들어 준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grumpy한 난장이의 이름)

성공에 대해서, 적어도 나는, 자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더 배워야하는 것 같다.

성공 (9)

내가 박사과정을 할때였다.
내 지도교수는 그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몇 사람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학회에서 무슨 발표를 하면 그 사람의 제자라는 이유 만으로 내 발표에는 사람들이 꽉꽉 찼다. 발표를 끝내고 나면 사람들이 와서 말도 많이 걸고, 질문도 많이 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대만에서 온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이 쓴 논문 하나가 그야말로 ‘떴다’
정말 그쪽 분야에서 완전 스타가 되었다.
학회에 갈때마다 그 친구와 이야기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고, 다른 그 분야 대가들도 이 친구의 결과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data를 설명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완전히 그 분야의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을 바로 내 옆에서 목격한 나는,
아니…. 쟤보다 내가 못한 것도 없는데. 나도 한번 해봐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떠서 스타가 되는게 너무 가까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 분야의 완전 break-through가 되는 연구는 사실 약간의 ‘운’도 따라줘야하고…
그게 쉽게 휙~ 되는게 아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기도 했을 테고.

나는 그렇게 왕창 떠서 성공하는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봤고,
정말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나도 그렇게 성공할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박사과정 후반부를 보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마무리할 때 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런 성공에 내 모든 것을 던져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로인해 나는 매우 고통스럽게 내 망가진 모습을 자각하고 많이 회개했던 기억이 난다.

내 논문은, 결과가 나쁘진 않았지만 그 친구만큼 내가 수퍼스타가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성공에 목매어사는 삶을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나름대로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성공 (8)

삶에는 성공말고도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아니,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있어 그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다.

성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사랑하기 위해 성공을 희생해야 한다.

성공을 향해 미친듯이 질주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진 능력의 100%를 발휘해서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늘 삶 속에 어떤 여력을 두어 그것은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오를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덜 오르려는 의도적 결정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버리기 때문이다.

내 재능, 시간, 재물, 노력, 정성, 관심을 100% 사용하지 말고,
그래서 내가 갈 수 있는 것의 100%만큼 성공하지 말고,
성실하고 충성된 모습으로 살 수 있을 만큰 살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럼 어느정도 성공 이외의 영역에 여유를 두고 살아야 하는냐…
그건 정말 상황이나 사람에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의도적 결정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성공이라는 우상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성공 (7)

좁은 성공의 기회를 보며 그것을 향해달려가는 욕망은,
그 사람을 통채로 집어삼키게 된다.
정말 산채로 꼴딱 집어삼킨다.

만일 성공이 인생의 지고지순한 목표라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활용해서 성공에 이르는 것이 옳은 삶의 길이겠지만,
성공은 인생 전체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삶을 투신할 만한 것인가를 따져볼때 사용하는 판별식이 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인류평화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인류평화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고, 아마도 그렇게 죽지도 않겠지만, 그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인류평화라는 개념은 내 자신보다 큰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보다 더 큰 대상이나 가치를위해 나를 헌신할때 나는 그 삶의 가치를 갖게된다.

그러나,
내 성공을 위해서 내가 죽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질문을 떠나…
그냥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성공은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오르고자 하는 것인데, 내가 죽는다면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성공은 투신해서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 (6)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성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넓었다.
그때는 대학 졸업해서 월급받는 삶을 살면 그럭저럭 생계걱정없이 사는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하다보면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오르고…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열어놓은 세상은,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켰다.
부자는 엄청난 부자가 되지만, 막상 부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비율은 더 줄어들었다.
대중은 중간이 되면 낙오자가 되는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간이 되면 그럭저럭 생계 걱정없이 사는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빈익빈 부익부는 돈에 대해서만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정말 대박이 터지게 성공한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했다고 이야기할만한 사람의 비율이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

나는 그래도 대단히 운이 좋게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학교들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거기 졸업하고 박사받고 하면 당연히 성공된 삶이 거의 보장되다시한다고 여겨질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그렇지 않다.
내 동기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아주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 어렵게된 사람들도 많다.

성공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특혜는 날이갈 수록 커지고 있다.
그래서 그 성공을 바라는 강한 사람들의 욕망은 계속 커져만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정말 성공에 목을 맨다.
그렇지만 그 성공에 다다르는 사람들은 더 소수가 되었다.

성공은 정말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