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목마름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의 그림자인가

창녀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
설교등에서 이거 G. K. Chesterton이 했다고 이야기하는 걸 많이 들어보았는데, 궁금해서 조금 더 찾아보니 이 말을 G. K .Chesterton이 했다는 근거는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다만, Bruce Marshall 이라는 작가가
“the young man who rings the bell at the brothel is unconsciously looking for God.“
이라는 표현을 그의 책 “The Worlds, The Flesh, and Father Smith”라는 책에서 썼다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위의 멋진 말은 사람이 가지는 공허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그런걸까?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활동 같은 것도 역시 그런 분류로 넣을 수 있는 걸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다 적용될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최소한 내게는 꽤 높은 확률로 그런 것 같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을때에는 늘 하나님 이외의 목마름이 현저하게 낮아지거나 사라지곤 한다. 그게 그냥 종교적 엑스타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에대해 내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모든 것들이 다 상대화되어 trivialize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때문에 마치 온 존재가 다 푹 젹셔져서 내게 다른 수분공급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의 시즌을 경험할때가 있다.

나는 창녀촌의 문을 두드려본적은 없고, 딱이 뭐 그렇게 윤리적으로 나쁜 것을 추구해본 경험도 없지만….
삶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지 않음을 경험할때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보려는 시도를 할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른이들은 어떤지… 참 궁금하다.

가지치기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요한복음 15:1)

하나님께서 어떤 시대에 가지치기를 하시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럴때 정말 사정없이 나무가 앙상해지고 이러다 나무가 죽겠구나 싶을만큼 보잘것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그 나무가 과실수로서 살아남게 되는 거다.
가지치기가 없으면 그 나무 전체가 쓸모없게 되는 거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도 가지치기를 하시는 때가 있다.
그 가지치기의 시기에는 그 사람이 참 볼품없어진다.
앞길이 불확실해보이기도 하고, 다루기 힘든 무게가 그 사람을 짓누르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기독교에서는 문제가 닥쳤을때 그것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인 것으로만 인식하는 모습이 편만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삶 속에서 닥치는 ‘문제’들은, 급히 그 문제에 집중해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 일단 머물러 가지치기를 해야하는 과정이자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가지치기를 하시는 시즌을 겪어왔다.
어떤땐 다소 넉넉하게 그 시즌을 이겨내기도 했지만,
어떤땐 그 시즌을 넘기는 것이 죽기만큼 어려울때도 있었다.

어떤땐 그 시즌을 견디어내며 내 안에서 충분히 가지치기가 잘 되어, 그로부터 10여년이상 건강하게 내가 살도록 만들어준 경우도 있었고,
어떤땐 그 시즌 속에서 당장 닥친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버둥대다가 충분히 가지치기가 되지 않아 그 가지치기 시즌을 헛되이 걱정만하며 망가져서 보낸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가지치기의 시즌에 있는지, 아니면 그냥 억울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이유조차도 알수 없는 시즌을 보내고 있는지 하는 것을 제3자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줄수는 없다.
그렇지만 꽤 많은 경우 그 시즌에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었을때 하나님께서 그것이 어떤 시즌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 100%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 꽤 높은 확률로 그런것 같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어떤땐 내게서 마지막으로 잘려나가야할 그 가지가 잘려졌을때, 당장 닥친 문제 해결과 무관하게 내게 큰 자유함이 찾아오는 경험을 한적도 있었다.

어둠의 시기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떠나지 않기를…

싼타 할아버지

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이었다.
민우가 7살때였는데…

내가 민우를 위해서 싼타 할아버지 이메일 주소를 하나 만들었다.
그리곤 민우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상당히 놀랍게도, 민우는 꽤 커서까지 싼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 그 이메일을 만들어서 보냈던 7살때가 민우가 싼타 할아버지를 믿었던 마지막 해가 되었다..

민우는 그 이메일에 친절하게 답장을 해서, 자기가 어떤 것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민우는 그해에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고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배드민턴 세트를 갖고 싶다고했고, 그걸 사주었더니 무척 기뻐했다.

그 다음해에, 민우는 그 이메일주소의 패스워드를 자기가 알아내버렸다ㅠㅠ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메일 주소의 패스워드가 엄마의 이름으로 구성된 패스워드였다. ㅎㅎ
민우는 싼타 할아버지의 이메일주소를 해킹했고, 그 이메일이 아빠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허걱.

민우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물어보면 별로 바라는게 없다.
그냥 집에가서 엄마 아빠랑 불고기 먹고싶다는게 소박한 소망이다.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그 싼타 이메일을 사용해서 민우에게 이메일을 하나 보내려고 한다.
민우야, 금년에 아주 수고 많았어. 착한 어린이였으니 선물사줄께, 뭘 원하는지 얘기해보렴.

민우도 그렇지만…
금년을 그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올해 같은때는 싼타 할아버지가 선물 한보따리씩 좀 갖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해본다.

찌질이 코드

고등학교 동창들이 대부분 같은 대학에 가는 바람에 대학때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꽤 친하게 지냈었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다소 좀 찌질한 친구들이었다. ㅎㅎ

옷 잘 입는다거나 그런거 잘 못하고, 어쩌다 학교 밖에서 만나서 함께 놀러다닐때도 새로 배운 물리 이론같은거 이야기하면서 놀았다. ㅠㅠ
어찌보면 Big bang theory에 나오는 사람들 같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돌이켜생각해보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찌질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된 노래이지만, 아마 20년정도쯤 차이가 나는 후배들도 여전히 그렇게 찌질이 코드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가끔 듣고 있는 혹은 보고 있는 한국의 한 라디오프로그램의 코너가 이런 찌질이 코드를 완전 제대로 담고 있다.

한때 꽤 많이 찌질했던 사람으로서, 어쩌면 지금도 꽤 많이 찌질한 사람으로서, ㅎㅎ
들으며 공감도 많이 되고, 재미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편협함

편협함, 독단성은 늘 공격을 받는다.
폭 넓게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대한 기독교 변증의 대응은 대충 이렇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다양한 관점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독단적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원주의도 여전히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이고, 기독교도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이라는 면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것을 위해서 기독교 변증가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예화를 역으로 이용한다.

대개 장님 코끼리 만지는 다원주의자들이 다원주의적 관점을 변호할때 사용하는 그림이다.
어떤 장님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 있고, 어떤 장님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 있고, 어떤 장님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있다.
이 장님들이 나중에 모두 모여서 자신이 관찰한 코끼리에 대해서 기술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설명은 다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긴 호수와 같다고 표현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기둥과 같다고 표현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너풀거리는 양탄자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지 못한채 코끼리를 관찰한 사람들중 누구도 코끼리 전체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른 코끼리를 기술하고 있지만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예화를 들때, 코끼리의 전체 그림을 모두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예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예화를 들면서 다원주의를 변호하는 사람은, 누구도 전체를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독점적인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그 독점적 진리를 소유한채 그 그림을 그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한 의견이 분명히 다른 의견보다 더 설득력도 있고, 월등히 논리적이기 한데도…
아무도 독점적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신화에 빠져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독단적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상황을 만난다.

나는,
일반적으로 독단적이고 편협한 자세는 파괴적일 뿐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편협함을 거부한다는 미명하에 논리적인 대화를 거부한채 억지주장을 고수하는 일들도 분명히 가능하다고 본다.

포용과 다양성이라는 무기로 논리와 진정성을 눌러버리는 잘못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