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저 사람 누구야?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의 직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ex. 저 사람 무슨무슨학교 수학선생님이야) 그 사람이 누구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를 (ex. 저 사람 아무개 아빠잖아) 기술하곤 한다.

그런데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데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 그 사람의 직장과 하는 일이다. (ex. 그 사람 애플에서 아이폰 배터리쪽 일하는 사람이야)

지난 주말, 페퍼톤스라는 그룹의 노래를 좀 많이 들었다.
페퍼톤스는 KAIST를 졸업한 두 사람이 하는 그룹이다.
이 사람들의 노래를 몇곡 들어보니 참 매력있었다.
youtube에서 노래를 찾아들었으니, 당연히 이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많이 나오는데, KAIST 졸업했다는게 여전히 이 사람들에게 아주 특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음악을 만들고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고, KAIST 졸업한건 그렇게 이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다들 그렇게 공부잘해서 그렇게 좋은학교 가고 그렇게 공부한걸텐데… 자신의 비전공분야에 몰입해서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있는 것을 보면서… 아, 참 여러분야에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전혀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전문분야 외에 비전문분야에서 대단히 놀랄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요리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운동이나, 혹은 다른 손재주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냥 어릴때부터 늘 해오던거 말고는 별로 잘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다른 많은 것들에 나는 흥미를 잠깐씩 보였던것 같다.
함께 노래부르는것을 좋아했었고, 중창단같은 것도 했고,
연극을 엄청나게 열심히 하면서 그거 열심히 공부도 했던 적도 있었다. 연기도 했었고, 연출도 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을 내가 누릴 기회를 점점 잃어갔고,
나는 예전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던 그런 분야들에 대해서도 전혀 뭐 별다른 지식도 관심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점점 재미없는 사람이 더 되어버린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요즘 거의 유일하게 내 전문분야 말고 열심히 하는건…
그냥 이것저것 공부하는거다.
성경공부 꽤 열심히 계속하고 있고,
신학책들 읽으며 그것도 공부하고,
youtube 등에서 다소 뜬금없는 과목들을 혼자서 독학하기도 한다. (유명 대학의 심리학과 과목이라던가, 내 전공과는 다른 전자회로에 관련된 과목같은 것들)

요즘은 인터넷에 워낙 여러종류의 능력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꽤 괜찮은 지식을 아주 정리가 잘 된 버전으로 아주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내가 능력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지는 못한데…
나는 이렇게 많은 능력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성탄의 의미를 잃어버린…

성탄에는 정말 생각해볼것이 많다.
성육신에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정말 많고,
평화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낮아짐에 대한 것도 그렇고,
upside-down kingdom에 대한 것도 그렇고,
세상 권력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세상의 깨어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리고 실천해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많다.
묵상, 기도, 나눔, 봉사, 예배, 함께함 등등….

정말 답답한건,
교회들에서 이런 모든 것들이 말라버린채, 프로그램들만 풍성하게 남아버렸다는 거다.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도 않는 목회자의 설교를 성탄의 의미에 관심이 없는 신도들이 들으며, 성탄의 의미와는 관계없는 프로그램 속에서, 성탄의 의미와 관계없이 즐기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Cancel culture

Cancel culture라는 말이 있다.
Wikipedia의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Cancel culture (or call-out culture) is a modern form of ostracism in which someone is thrust out of social or professional circles – either online on social media, in the real world, or both. Those who are subject to this ostracism are said to be “canceled.”

말하자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대상이 나타났을때 주로 온라인에서 집단으로 달려들어 그 대상을 비난하고 모멸감을 주고 따돌리는 문화를 이야기한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유명인들에대해 이렇게 많이 한다.
주로 이것이 밀레니얼의 문화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경우엔 단순히 밀레니얼에만 한정되어있는것 같지는 않다.

글쎄, 나이가 들어 밀레니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을만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cancel culture는 결국은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관용(tolerance)를 관계의 원칙으로 정해놓은 일종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대해서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줄 아는데… 오늘의 글에서는 이 정도만 언급하고 다음에 언제 기회가 되면 조금 더 풀어내보겠다.)

가령, 유명한 유튜버가 자기의 영상에서 뭐 하나 잘못을 했다 하면…
정말 벌떼와 같이 달려들어서 그 유투브 채널을 폐허를 만들어버린다.
어떤 연예인이 한가지 말 실수를 하면….
그 연예인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매장을 시켜버린다.
어떤 정치인에게 무슨 흠결이 드러나면, 그 흠결의 맥락은 덮어버린채, 그 정치인과 가족을 완전히 처참한 지경으로 만들어버린다.

생각이 다른 관점에 대해 조금더 참아줄줄 알고,
타인의 약점에대해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이나 약점에대해 좀 여유를 가지고 바라봐주는 시각이 참 그립다.

이런 Cancel culture는 옛 공산독재국가에서 했던 인민재판이나 중국 공산당이 했던 홍위병들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모습이 많아 보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이런 것에대해 꽤 분명하게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
다만, 현대의 기독교는 그런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집이다!

민우가 어제 집에 왔다.
이번학기는 유난히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workload도 많았고, 계속 online으로 하는데서오는 피로감도 컸다고…

며칠전 부터는 민우가 계속 빨리 집에 오고 싶다고… 하루에도 몇번씩 메시지를 보내곤 했었다. 정말 이번학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더 그렇게 집이 그리웠다보다.

공항에서 민우를 픽업했는데,
민우가 차에 막 타자마자 하는 말.

“아, 집이다!”

집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차에타고선 집이라고 하는거다.
민우는 아빠 얼굴을 보니까 비로소 집이라고 생각을 하는거구나.
SFO 공항에 막 내렸을때 집이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고, 아빠의 얼굴을 보았을때 집이라고 생각이 되는 거구나.

민우에게 집이되어주는 아빠가 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그렇게 힘든 한학기를 지나고 아빠 얼굴을 보면서 ‘집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듯…
힘든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그렇게 보고면서 ‘집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른도 아프다


어른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몇년전에 봤던 응답하라 1988에서 내가 제일 감동깊게 보았던 장면중 하나이다.

나는 자그마치 50이 넘은 어른인데….
나는 정말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쁘긴 한걸까.

뚜렷한 주관과 똥냄새

나는 facebook 보는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내가 부지런히 그 내용을 update할만큼 한가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나와 ‘친구’가 된 사람들이 올리는 글들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또 내가 심심할때 이래저래 가입해놓은 group들로부터 나오는 글들도 어떤 것은 참 통찰이 있는 글이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를 넘어 해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될 경우가 많다.

facebook에 나오는 강한 자기 주장 중에서 어떤 것은, 심지어 그 생각이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들어볼만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그냥 너무 싸구려 비난과 증오로만 점철되어 있어 마치 똥냄새를 맡는것 같이 느껴지는 주장들도 있다.

그렇게 똥과 같은 글을 써대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찬들이다. 특히, 뚜렷한 주관과 아젠다와 주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젠다에 반대가되는 생각이나 주장이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똥을 뿌리는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여러가지에대해 꽤 강한 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나의 주장들도 그런식으로 똥냄새를 피우고 있지는 않을까?

Healing

10월 초에 강아지 하나를 shelter에서 입양했었다.
2살이라고 했고, 닥스훈트와 치와와의 잡종인것 같다고 했다.
아주 활발했지만 겁이 아주 많았다.
처음엔 좀 겁이 많아 소심하게 행동했으나 곧 우리와 친해졌고 내가 집에서 일하는 동안 그야말로 내게 딱 달라붙어 지냈다.
분리불안 (separation anxiety)이 좀 걱정스러웠지만,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두어시간 이상 집 밖으로 나갔다와도 괜찮게 잘 지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침대위로 올라와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하면 바로 달려들어 꼬리를 흔들며 아침인사를 했다. 작은 공을 던지면 그걸 물어오는 것도 집에서 곧잘 했다.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을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곤 했다.
우리중 누구라도 소파에 앉아있으면 반드시 우리와 살을 맞대고 옆에 눕거나 앉았다.
잘때도 우리 침대위에서 자고 싶어했다. 마음이 약해서 우리는 그냥 그렇게 우리 옆에서 재웠다.

그런데 11월 초, 낮에 산책을 하던중에 내가 미끌어져 넘어지면서 개줄을 놓쳤는데 이 아이가 쏜살같이 뛰어 도망가버렸다. 아직도 그렇게 도망가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멀리 뛰어가버린 모습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날 밤 우리는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동네를 열심히 돌았다. 혹시 쓰레기통주변이나 좀 따뜻한 집의 입구 옆등에 있지는 않을까….

그 다음날 아침, 우리 동네의 animal control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아이가 죽은채로 어제밤에 발견되었다는 연락이었다. microchip을 스캔해서 그 아이가 우리 개라는 걸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와서 그 아이를 보겠느냐, 혹시 화장을 해서 그 아이의 재를 가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떤 상태로 발견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처참한 상태로 죽었다면 그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재도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고, 그 아이를 화장하는데 40불을 지불하고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그냥 내 credit card 번호를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둘이 말 없이, 그 아이의 것들 – 침대, 장난감, 먹이, 등등-을 조용히 정리했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정리했다.

한달동안 우리와 그렇게 지내던 이 아이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이제 그 아이를 잃어버린지 한달쯤 되었다.
그 아이는 우리와 한달 있었고, 떠난지 한달이 되었으니 이젠 그냥 그렇게 마음이 괜찮아질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마음이 영 그렇지 않다.

그때 내가 넘어지지 않고 조금 더 줄을 잘 잡았더라면….
그때 그길로 산책을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산책을 했더라면….
그런 자책도 계속 있다.

그 아이가 내가 일하는 옆에 붙어앉아 있었던 자리를 보면 마음이 그냥 계속 찡~하다.
그 아이사진 찍어놓은건 영 열어보지 못하고 있다.

한달동안 정이 들었던 그 아이가 떠난것으로부터 회복하는데에는 한달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그 아이를 잃어버리던날 넘어져서 삐끗했던 발목은 아직 아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마태복음 5: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7 (새번역)

But make sure your statement is, ‘Yes, yes’ or ‘No, no’; anything beyond these is of evil origin Matthew 5:37 (NASB)

아주 순전하게 예를 예라고 이야기하고 아닌것을 아니라고 이야기하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아주 힘들어진다. ㅠㅠ
특히 회사같은 곳이나 여러가지 business를 하는 곳에서는 예를 그냥 단순하게 예라고 이야기하지 말아야할 경우도 참 많이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투명하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회사에서 아주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예를 예라고 이야기하고 아니오를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깨어짐 때문에 불가능하게되어버린 것이니, 만일 그 깨어짐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런 투명성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때로 깨어지지 않은 세상의 코드를 가지고 살도록 요청받는다. 그렇게 깨어지지 않은 세상의 코드를 가지고 살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는 대단히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위협을 받게되기도 한다.

어떤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꾸밈없는 투명한 communication을 바라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 반드시 가저야할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관계가 계속해서 서로를 사탕발림으로 칭찬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어떤 공동체가 서로 너무 친절한 배려와 예의바름에만 머물러 투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간관계나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가 아니거나,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복음과 일상

As soon as a preacher begins a sermon with, “I cannot believe what my seven-year-old daughter recently said…” you can quit listening.
– Stanley Hauerwas (from the lecture, “Preaching without Apology“)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야기하는건 이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일상을 romanticize 하는데 성경 text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다.
성경 text가 그 일상을 해석하여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흔히 복음과 일상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할때,
일상의 작은 일들에 복음의 의미를 부여하고,
혹은 일상의 작은 일들로부터 복음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사실 설교가 되었건, 기독교 글이 되었건….
산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는 하나님이라던가…
나무속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여정등과 같은 류의 이야기를 참 많이 접할 수 있다.

적어도 Stanley Hauerwas는 이런걸 왕창 비판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의견에 참 많이 공감한다.)

복음의 일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일상을 낭만화(romanticize)하는 것으로 그쳐버리는 식의 이야기들은 정말 식상하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한다.

Can I travel again?

지금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어떤 device 가운데 하나에 유난히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다.
이런건 대개, 이걸 만드는 공장 (대만에 있다)에 가서 일주일정도 process flow review하고, 주의할것을 함께 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할수가 없으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사람들이 다들 그냥 발만 동동 구르면서 전화통만 붙들고 제발좀 잘 해라… 이렇게 이야기만 하고 있는 중이다.

에이 씨… 이럴때 얼른 비행기표 끊어서 훌쩍 날아가면 이 고생안하고 한번에 해결되는건데.

영국에서는 COVID-19 vaccination이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도 아마 몇주안에 vacccination이 시작될 모양이다.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까지 오려면 아마도 내년 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뉴스에서도 health passport 같은것이 만들어져서 coronavirus vaccination 증명이 있어야 비행기도 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도 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아, 그럼 내년 하반기부터는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