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소중한 사람

회사에서 불이 났다.
실제로 불이 났다는 말이 아니라, 일이 막 터져서 해야할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

아침에 눈뜨자 마자 바로 computer 앞에 앉아서 Eastern Europe 시간대에 있는 나라와 conference call을 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 식사 간단히 먹고,
다시 일을 하다가,
밤 12시 넘어서까지 일을 하곤 한다.

밤이 되어도 서로 메시지도 보내고, 이메일도 주고 받으면서 다들 엄청 바쁘다.
그저께는 내가 1am쯤 마지막 이메일을 보내면서…아 이젠 내일 아침까지 좀 자자… 하고 자리에 누었더니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후에 답이 몇개 더 달렸다. 그리곤 아침 미팅에 다 나와있다. 참 다들 징~허다.

집에서 아내와 민우와도 별로 얘기도 안한다.
그냥 약간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로 있기도 하거니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하루 종일 있으니…
미팅을 할때는 그 헤드폰으로 하고, 미팅 없이 내가 일할때는 NYCP의 음악을 들으며 노동을 한다. (thank you DK for the great music!)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나는 집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밖에서 일하다가 들어오니, (그리고 민우는 근처 target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저녁을 챙기는 일을 내가 한다.
저녁 5시정도가 되면 쌀 씻어서 밥솥에 넣고, 그날 먹을 간단한 찌게/국 하나, 그날의 특식 (생선이나 고기) 하나 준비하고, 밑반찬 깔고… 후다닥 준비해서 먹는다.
(대개는 저녁식사준비 30분 이내)

회사에서는 내가 일을 다 하지 못하면 내가 하는 일을 땜빵해주면서 함께 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와중에 내가 밥을 해서 식사를 차려준다.

내겐 누가 더 소중할까?
말해 뭐해. 내 가족이 훨씬 더 소중하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참 고마울 때가 많이 있지만,
내가 내 시간을 내어서 무엇인가를 해주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내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깨달은 사실.

함께 일하는 사람 (직장 일이건, 기독교 미니스트리이건 간에…)이 뭔가를 할때 고맙긴 한데,
그 함께 일하는 사람의 부족함을 내가 채워주는 것이 내게 ‘불만’으로 다가온다면,
내게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사랑이란,
내 노력과 시간을 심지어는 낭비해가며 무엇을 주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들이 내게 소중한 사람으로 남게하는 힘이되는 거다.

복음주의

대학생때부터 복음주의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복음주의가 건강한 balance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왔다.

나의 80-90년대를 돌이켜보면 그런 내 생각은 여전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주의라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 분파로 인식되었고,
복음주의중에서도 특별히 더 딱딱한 근본주의가 주류로 득세하면서
내가 복음주의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 어색한 지형이 되었다.

꽤 오랫동안 (아마도 지난 10년 정도) 나는 그렇게 비밀스러운 복음주의자였다.

지난 10년을 거치면서,그러나, 나는 이제는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믿는 것도 물론 변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80-90년대에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라는 범주 안에 계속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2021년의 복음주의 범주안에 있다고 볼수는 없을 것 같다.

어릴때부터 자라왔던 마을이,
커다란 댐에의해 수몰되면서 그 마을을 떠나게되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Driven person vs. Called person

30년쯤 전에 읽었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Ordering your private life)에 나오는 두 부류의 사람이다.

한 사람은 쫓겨다니는 사람(driven person)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름받은 사람 (called person)이다.

쫓겨다니는 사람의 특징
– 성취를 통해서만 만족을 얻는다.
– 성취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 전인적인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다.
–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서툴고 미숙하다.
– 아주 경쟁적인 경향이 있다.
– 반대나 불신에 부딛히게 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분노를 품고 있다.
–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부름받은 사람의 특징
– 자신이 청지기임을 인정한다.
– 자신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행동이 아니라 존재와 목표에 집중)
– 흔들리지 않는 목표
– 현실 속에서의 실천

20대에 그 책을 읽고, 나는 이제 평생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부름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착각했었다.
50대의 나는, 여전히, 심각하게 쫓겨서 사는 사람이다. ㅠㅠ

Is it too much to ask?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황모 간사님이 예전에 어디에선가 설교를 하시면서 이 찬송가를 인용하신 적이 있었다.
음… 비롯 좀 예전이긴 하지만, 그때에도 이 찬송가는 교회에서는 더 이상 별로 불려지지도 않는…
말하자면 좀 옛날스타일의 찬송가라고 생각되었었다.

그런데 그때 황 간사님이 이 찬송가를 인용하시면서,
is it too much to ask 라고 도전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 이후 이 찬송가가 절대로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다.

그때 황간사님의 표정도, 어투도 정말 확실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으면서 내게 있었던 전율도 기억난다.

Is it too much to ask?
내 스스로에게, 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Being shallow

신앙이 피상적이 되는 가장 큰 원인은 게으름이 아닌가 싶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 하는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하면 충분히 다다를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 있음에도,
그 조금만 더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은채,
자기가 다다른 shallow한 지점에 그냥 머물러 있기로 고집을 피우는 신앙을 보면 참 마음이 무겁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기도하고…

Nice break?

지난 7월 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는 7월 5일과 6일 이틀을 쉬게 해 주었다.
거기에 나는 7월 3일도 휴가를 내어서 자그마치 4일동안 회사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휴일에도 회사 이메일을 아예 꺼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7월 2일 저녁에 아예 회사 이메일을 꺼놓고, 어제 밤까지 전혀 열어보지 않았다.

7월 2일 저녁부터 시작된 KOSTA 집회 때문에 주말을 그것에 꽤 시간을 썼다.
주말에 회사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았지만 KOSTA 이메일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래도, 잘 쉬었냐고?
엄청 잘 쉬었다.

아침에 회사 이메일을 열었더니, 이메일 박스가 터져나갈 지경이다. ㅠㅠ

잘 쉰게 분명하다!

KOSTA

참 희안하다.
KOSTA가 어제 시작되었고,
나는 KOSTA talk이라는 것을 지난 9일동안 했으니 훨씬 먼저 시작한 것인데…

매년 이렇게 감동이 있다.

첫 예배 영상을 보는데, 울컥 한다.
한해동안 거의 느껴보지못한 몰아치는 기도의 느낌이랄까…
그런것도 확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KOSTA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KOSTA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감동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뭐가 되어도 좋은데,
KOSTA/USA에 참석하는 우리 청년 학생들이 꼭 무엇인가를 붙들게되면 좋겠다.
이렇게 모이지 않으면 느끼고 깨닫지 못할 그 무엇을 정말 붙들게 되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금년에도 꼭 그렇게 해주시길…
정말 그렇게 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