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보는 materials shortage

내가 하는 일은 아주 큰 volume의 대량생산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적은 수의 prototyping을 하는 것이나,
비교적 적은 수의 생산을 하는 일들이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짧은 시간에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아… 이게 장난이 아니다.

특히 여러가지 형태의 IC들, GPU같이 물건 없기로 유명한 것들, 심지어는 PCB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구리까지도… 모두 다 그냥 구하기 어렵거나 구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린다.

우리회사 같이 초대량생산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 공급업체들의 큰 고객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이런걸 구하는데 더 어렵다.

그래서 급하게 필요한 것들을 여기저기 연락해가며 웃돈주고 사기도 하고,
쪼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재기를 하기도 한다.
음… 이거 완전히 일년전 화장실 휴지 없을때 모습하고 똑같다!

원래 주문해서 며칠만에 받을 수 있던 것이 10주, 20주씩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하고 있는 개발 일정은 그대로 가야하기 때문에…
내가 이거 엔지니어인가 아니면 무슨 물건 브로커인가 그런 생각이 들때도 있다.

뉴스에서 보면 요즘 자동차에 들어가는 IC가 없어서 자동차 생산이 멈추어진 경우도 많다고 하고 (그래서 중고차가 엄청 비싸졌다고 하고)
수퍼마켓에 가면 요즘 고기가 또 엄청 비싸지기도 했다.

나 같은 개인이야 고기 좀 덜 먹고, 차 사야한다면 그거 좀 미루었다 사고, 컴퓨터 쓰던거 좀 더 쓰고… 그렇게 해서 이걸 넘길 수 있다고 하겠지만,
회사는 그게 안된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화장실 휴지를 사듯, 이렇게 여러가지 재료와 소재들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알아보는 걸 당분간은 더 해야 할 듯…

현실 인정 vs. 현실 안주

나는 MBTI가 ENFP이까, 즉흥적으로 살 수 밖에 없어.
계획을 세우더라도 나는 잘 할 수 없어.
꾸준히 하는건 내가 못하는 거야.

나는 애니어그램 9번이니까 갈등을 피하는 쪽으로 결정하는게 당연한거야.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하는 거지.

이런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다.
나는 성품과 기질이 이렇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거다.

음…
나는 사람마다 성품과 기질이 있다는 걸 당연히 인정한다.
사람마다 정말 천지가 다른 것 처럼 성품과 기질이 다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너무 당연한 일들이 무지막지하게 힘들수도 있다.
기질이 다른 거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이러니까, 나는 그냥 내가 가진 기질의 단점을 하나도 바꿀 수 없고,
이 단점은 그냥 내 주변에 있는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맞춰가면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참 동의하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기질에 따라서 더 힘든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이 기질에 따라 가지고 있는 일종의 ‘결핍’이자 ‘단점’이다.
그리고 그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 특정 결핍이나 단점을 평상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그 단점을 정당화 하는 방식으로 기질평가/성격분류를 사용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냥 나는 노력하지 않고 이대로 살테니,
그로인한 결과는 너희들이 다 알아서 나눠져라고 이야기하는 것고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내에서,
소위 기질평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방법들이,
자신의 이기성과 자기중심성을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자라감,
푯대를 향해 달려감,
하나님이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짐…
이런 이야기들과 그것을 위한 개인적/공동체적 노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금 더 많이 들리면 좋겠다.

대화가 낭비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각도 100% 옳은 사람은 없다.

이 세가지를 인정한다면,
그 누구와의 대화도 낭비가 아니다.
그것이 나보다 훨씬 어린 어린아이이건, 나보다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훨씬 더 어려울때도 있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는 마음이 별로 없거나,
상대의 말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이런 경우에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낭비일까?
어떤 대화는… 낭비가 될수도 있는 것이겠지?

엄청난 시간 절약

이번주 회사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CEO가 직접, 아주 급하다고 하면서 급하게 해야한다고 하는 일이 하나 터진데다,
또 하고 있는 두어개 일이 삐걱거리면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주부터 KOSTA talk을 시작해서 그거 준비하고, 이것 저것 챙겨가며 그거 하는 것도…

또 아마도 9-10월에 내가 교회에서 설교를 좀 해야할 일이 생겼는데… (우리 목사님 안식월)
그래서 그것가지고 교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있었고.

아침에 깨면 맨 먼저 이메일보고, KOSTA talk band group 보고…
밤에 자기 직전까지 회사일에 매달려 있다가 쓰려져 잠들고.
하루에 6시간도 못자면서…
하여간 꽤 정신 없었다.

그런데…
여러 모임들과 많은 일들을 그냥 온라인에서 하다보니,
생각보다 아주 엄청난 시간 절약이 되면서 일에 효율이 엄청나다.

가령, 회사 미팅을 하고, 급하게 교회 미팅을 해야할 경우,
그냥 자리에 앉아서 virtual meeting만 바꾸면 되니,
어디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
중간에 시간 낭비도 없고,
아주 놀랍도록 효율적이 되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virtual meeting,. online meeting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효율적일 수 있었을까?

post-COVID에 이 높은 효율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회사에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느낄때

회사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느낄때 내가 소심하게 회사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회사에서 생수, 커피, 과자, 아니면 식사 등을 엄청 많이 먹고, 집으로도 막 가지고 오는 거다.
월급을 더 주지 않으면서 일만 더 시키면 그렇게라도 꿈틀해야지 뭐.

지금 집에는
회사에서 가지고온 생수, 초콜렛이 꽤 많이 있다. ㅠㅠ

희망은 능동적이다

희망을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게 펼쳐지는 밝은 미래에 대한 바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때로 희망은 능동적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전까지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혹은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전까지 그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최근 기독교적 희망이 피동적 희망일 뿐 아니라 능동적 희망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현대인들의 절망을 보니 뭔가 잘 이해가 되기도 한다.

희망은 능동적이다.

KOSTA talk

금년에는 KOSTA talk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했다.
https://www.kostausa.org/kosta-talk
‘젋은’ KOSTAN들을 대상으로, 비교적 소그룹으로, 그해의 주제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는 프로그램인데,
올해 감사하게도 전성민 교수님과 한지은 선교사님이 해 주시겠다고 총대를 매어주셨다.

나는 그런데 이름 나오는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내가 뭐 무슨 자격이 될까 싶기도 하고…
사실 요즘 회사일이 많아 부담도 되고…
해서 그냥 뒤에서 일하는 것을 하려고 했는데,
약간 떠밀려서 함께 뭔가를 좀 더 하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에 kick-off zoom을 하면서 오리엔테이션을 했고,
오늘부터 9일동안 매일 어떤 주어진 내용을 함께 나누고 생각해보는 daily challenge,
그리고 인도자들과 함께 하는 3번의 zoom 세션,
이렇게 해보려고 한다.

살짝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고,
그런데 무엇보다도… 감사하다.
나는 계속… 그냥 계속… 조금씩 희망을 본다.


Phantom of the Opera

나는 오페라의 유령의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주를 지내고 주일을 지나면서는…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을 깊게 사랑하고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불타는데,
정말 한번씩을 더 깊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찬양하고 싶은데…
그래서 내게 ‘노래하라’고 외치는 음성이 내게 들리는 것 같은데…
노래를 부를수도, 노래를 들을수도 없는 것 같이 느끼곤 한다.

멈출때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한 한국의 혜민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라는 책을 오래전에 냈었다.
나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뭐 그런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너무 공허하다고 느껴져서 그런 류의 책은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쪽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천천히 해야 사람들이 보인다.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람들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생각에 절대로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천천히 갈때, 멈출때 비로소 보이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반면,
바쁘게 갈때, 멈출 여유가 없을때…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질문에 기독교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15시간 일하는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가,
‘조금 slow down하고 멈추니 하나님이 보이더라’ 라고 이야기하는 건 차라리 더 말이 되고 공감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사람에겐 정말 그게 더 필요한 것이겠고.

그런데, 이젠 좀 멈추어 있는 곳으로부터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 괜히 멈추어보겠다고 하는건 좀….

멈출 때 보인 것도 있겠지만, 달릴때 보이는 것도 분명히 있다.
멈출때 보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달릴때 보아야하는 어떤 것도 있다.

내가 이득을 얻는 것, 내가 도움을 주는 것

내가 어떤 회사를 다닐때,
내가 그 회사를 다녔다는 기록 때문에 내 resume가 더 멋있어 지는가, 아니면 내가 그 회사를 다녀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회사가 더 큰 도움과 유익을 얻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해본다.

예전에 학생일때는 학교에 대해서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학생은 기본적으로 그 학교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학교에 있는 동안은, 혹은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은 동안은…
내가 학교에 더 큰 유익을 주는 학생이 되는 것이 웬만해선 어렵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특히 직장 생활을 어느정도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질문이 꽤 유용한 것 같다.

나는 이 직장에 다님으로써 내가 더 큰 유익을 얻는가, 직장이 나로 인해 더 큰 유익을 얻는가.

내 능력이나 하는 일에 비해 네임밸류가 더 큰 직장에 다닌다면 당연히 내가 직장으로 인해 더 큰 유익을 얻는 것일테고,
내 능력이나 하는 일에 비해 직장의 네일밸류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면 직장이 나로 인해 유익을 얻는 것이다.

나이가 40정도 넘어서부터는,
내가 직장으로부터 유익을 얻어내는 것보다 내가 직장에 끼치는 유익이 더 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생활 초년생일때는 어차피 배울 것이 많으니까 그렇게 되지 어렵겠지만,
점점 경험이 쌓여가면서는 내가 더 유익을 끼쳐야 한다고 본다.

만일 직장의 네일밸류나 내 직책/title이 내가 하는것보다 더 근사한 것이라면…
그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불필요한 노력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최근… 나는 내가 직장으로부터 받는 것과 내가 직장에 주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클까 하는 것을 나름대로 여러가지로 고민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