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5)

기존에 교회에서 듣던 이야기로 이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꽤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쭈루룩~ 풀어놓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흥미롭게 듣고 반응한다.

일부는 철학 이야기,
일부는 신학 이야기,
일부는 기독교 변증,
일부는 역사 이야기,
그리고 일부는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데,

이런 얘기는 잘 들어본적이 없다. 뭔가 막혀있던 것이 풀린다…
이런 식의 반응을 꽤 자주 듣는다.

모두가 그렇게 듣는다고 이야기할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 반응해오는 사람들중에 다수는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었을까요..
라며 신기해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4)

음악이 매우 중요하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신학적 개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에도 대개 나눔은…

“오늘 나눈 이야기에 딱 맞는 찬양 한곡을 띄웁니다”… 이런 방식이다.

내가 20, 30대일때도 그랬나?
우리도 물론 사람들 모이면 기타치면서 찬양을 부르기도 했고,
우리 세대야말로 두란노 경배와 찬양이 처음 시작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이니…
당연히 찬양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향이 훨씬 더 한것 같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3)

지극히 신앙이 개인적이다.

20-30세대가 공정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신앙에 관한 discussion에 들어가면 결국은 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들로 귀결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가
내가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는가… 등등.

하나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게 신앙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20-30세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생각엔 일반적인 특징인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사회정의나 공정에 대한 관심도,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를 것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2)

또한 이런 신앙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지식의 연역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것은 결국 어제 이야기한 신앙을 교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데…

가령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어떤 내용을 귀납적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대개는 불편해하거나 익숙하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성경 text를 해석하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들이 살짝 좀 이상한 것들이 있다. ^^
그러니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본문이 이상하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가령 구약의 본문에서 무리하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법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
시편의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이런 식으로 보는 거다.
음… 뭐 그렇게 볼수도 있다고 보는데, (내가 선호하는 성경읽기 방식은 아니지만.)
이게 좀 도를 넘어서, 다소 무리하게 그렇게 성경을 읽어내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교리’ 수준으로 설교와 성경공부 세팅에서 강조되는 것들중
워낙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보니…
그런 교회 세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1)

요즘 KOSTA follow-up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션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질문들을 받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래도 몇주동안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더 공부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어쨌든 조금 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일테고,
나름대로 기독교신앙에 대한 기본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것이다.

적어도 내가 접한 바, ‘기독교에 조금 더 열심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 그 사람들의 생각들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들의 생각이 대단히 ‘교리중심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결국 성경 전체의 ‘스토리'(내러티브)에 대한 것이므로,
진리가 내러티브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기독교를 ‘교리’로 배운 사람들에게 내러티브라는 것은 좀 생경하게 느끼져는 것 같다.

한참 네러티브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쭉~ 하고나서..
결국 나오는 질문은, 그래서 교리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그런 부류다.

그런데, 그건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다.
처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던 나 역시,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내러티브로 이해하기 보다는 교리의 일부로서 채워넣으려 했으니.

Teachability

어떤 사람이 teachable하다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가르칠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teachability는 “학습능력” 쯤으로 번역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teachability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기독교 모임이었다.
대충 Christian circle에서 teachability라는 말을 주로 discipleship과 연관시켜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20대, 30대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나도 정말 teachable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많이 결심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teachability에 대한 강의를 하던 사람들을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그 사람들이 teachable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때가 많았다.
아… 그 난감한 배신감은…

기독교인들이 teachability라는 말을 꽤 많이 쓰는데,
막상 기독교인들이, 특히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혹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왜 이토록 teachable하지 않은 걸까.

나는 왜 별로 teachable하지 않은 사람인걸까.

중복

지난 초복때,
갑자기 삼계탕을 민우에게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 날이 초복이라는걸 몰랐는데,
민우에게 삼계탕을 주고 나서야 그날이 초복이라는 걸 알았다.
아싸~

오늘은 중복이다.
오늘은 아예 날짜를 잘 따져서 미리 calendar에 표시를 해 놓았다. 중복.

오늘은 그래서 삼계탕을 먹을 생각이다.

내 아내는 삼계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 나와 민우 둘이서만 맛있게 먹게되지 않을까 싶다.

뭐 거창하게 요리하는건 아니고, 삼계탕 사다 먹는거다. ㅎㅎ

주 52시간 노동

한국에서 어느 새내기 정치인이 주 120시간 노동이라도 일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이야기한 모양이다.

한주에 120시간 노동을 하려면 7일 모두 일한다고 할때, 하루에 17시간 넘게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한주에 120시간 일을 한적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한주에 100시간 넘게 일한때는 꽤 있었다. ㅠㅠ

만일 나보고 한주에 40시간 혹은 52시간만 일하라고 하면,
정말 내 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질것이 분명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한주에 52시간만 일해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요즘은 그렇다.)

그런데,
회사 lab에서 일을 하는 technician들은 하루에 딱 8시간만 일한다.

우리 회사에서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의 차이는,
non-exempt / exempt employee의 차이다.

나 같은 엔지니어들은 exempt employee다. 나 같은 사람은 일한 시간에 따라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한 결과에 따라서 돈을 받는다. 주어진 일을 하루에 4시간만에 다 끝내거나, 하루에 12시간씩 일해서 끝내거나 상관이 없다. 해야하는 일을 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임금을 받는다.

반면 lab에서 일하는 테그니션들은 non-exempt employee다.
그 사람들은 일한 시간에 따라서 돈을 받는다.
만일 밤 늦게까지 일을 하면 추가 수당을 받고, 휴일에 일을 해도 추가 수당을 받는다.
대신 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

일반적으로는 exempt employee들이 non-exempt employee들보다는 월급이 더 높은 편이다.

글쎄…
나는 한국에도 이런 rule이 적용될수는 없는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한국에 있는 엔지니어와 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더 일하고 싶은데 회사 컴퓨터가 꺼지는걸 몹시 못마땅해햐기도 한다. 바짝 더 일할때 일하고 싶다는 거다.

그러나 반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더 높은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런 부담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사람들은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 내에서 하도록 하고, 더 일을 하려면 아주 후하게 추가수당을 받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 새내기 정치인은 말하자면 exempt에 해당하는 자리에 계속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일할때 더 바짝 일하게 하자는게 말이 되는 거다.

대충 한국의 기사를 보면,
진보쪽에서는 정신나간 소리라고 엄청 비난을 해대고,
일부 보수쪽에서는 그렇게 좀 더 바짝 일할때 일하는 것도 필요할수도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건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직업들을 같은 잣대로 재단하려고 하니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한국 상황은 뭐 내가 잘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드는 생각.

지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교회에 대한 매뉴얼을 성경에서 찾아보려는 시도가 자주 매우 왜곡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흔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성경책으로 에베소서를 꼽는데,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후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사도행전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헤브라이즘의 유대교적 기독교가 헬레니즘 속에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고민하려고 할때 유용할 수 있을 것 같고, 교회 내의 강력한 힘이 있을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계시록의 일곱교회 본문에서 힌트를 찾아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다.
이것도 소아시아 교회의 특정 상황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과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매우 다른 상황이라고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나는,
지금 교회에 대한 바른 고민을 하기위해서 읽고 고민해야하는 책들은,
주로 포로기 직전의 선지서들, 그리고 포로기중에 쓰여진 선지서들이 아닐까 싶다.

무너져가는 유대왕국에서, 그들에게 주어졌던 말씀들.
어제 호세아를 읽으며 마음 속에서 울컥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누군가 붙들고 한참 좀 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 내가 다니는 지역교회는 별다른 문제는 없다. 전반적으로 가라앉는 배와 같은 현대 기독교 안에 머물러 있다는 더 큰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거야 우리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고 현대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맞닥드리고 있는 문제이지)

Back to office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office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한주에 적어도 하루, 많으면 3일 정도는 office에 가야했고, 그래서 이미 회사에 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회사에 가면 사람들이 예전보다 확실히 많아졌다.

미팅 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
식사 시간에는 밥도 함께 먹는다.

회사 식당에서는 아침과 점심을 예전과 같이 buffet 스타일로 주기 시작했고,
회사 커피 바도 열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 더 조심하는 쪽이어서,
마스크를 어색하지 않은 한 쓰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회사 desk에 혼자 앉아 있을때는 마스크를 벗고 있기도 한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회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진짜 조금 더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