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좀 미안하다고 해줘야…

나는 이번 비극이 누구 잘못인지 정말 잘 모른다.
그러나…

정말 죽도록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그렇게 잠깐 숨쉴 공간을 찾아 갔다가 숨을 쉬지 못해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며…
누군가는 좀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아무도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거지?

COVID-19을 잘 다루었는지

pre-print 형식으로 나온, Stanford에서 나온 논문에 따르면,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도 젊은 사람들의 COVID-19 infection fatility rate이 대단히 낮다고 한다.

원래 우한 바이러스를 가정하고, 백신을 맞지 않은 것을 가정했을때도,
0-19세는 0.0003%
20-29세는 0.003%
30-39세는 0.011%
40-49세는 0.035%
50-59세는 0.129%
60-69세는 0.501%
라는 것.

그리고 전반적인 IFR은 0.07% 라고.

그래서 전반적으로는 젊은 사람들의 IFR을 초기에 지나치게 높게 예상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게 맞다면,
인류가 COVID-19을 제대로 다루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이 논문을 해설한 youtube video link도 여기

더 열심히?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과장이 좀 심하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세상을 바꿀 거라는둥…
회사에서 조금만 뭐 잘하면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을 써서 칭찬을 하고..
쬐끔 진척이 있으면 완전 세상을 놀래킬만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과장해서 사람들을 drive하지 않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다들 회사에서 소위 회사의 ‘mission’이라는 것이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고 다들 외치며,
하루 10시간, 12시간씩 일을 하도록 drive 하는 것.

결국 내가 회사 생활에서 가장 힘든건 그거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가치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
어떤 회사든 그 회사의 일을 통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회사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과장을 통해 세뇌를 하고,
그 속에서 탐욕과 자아실현이라는 것을 추구하기위해 그 세뇌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도저히 그 사람들의 일부가 되지는 못하겠다.
내 신앙의 양심상 그렇게는 못하겠다.

나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살기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허락되는 한 그렇게 계속 하려고 하겠지만…
어떻게든 내 신앙 양심을 지켜가며 살아가고 싶다.

몸부림을 치고 있다.

Work, Pray, Code

아마도 금년에 내가 읽은 책중 가장 인상깊은 책으로 남게될 책일 것 같다.
Work, Pray, Code.

부제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말해준다.

When Work Becomes Religion in Silicon Valley

그리고..
How tech giants reshaping spirituality to serve their religion of peak productivity.

나름대로 이곳 실리콘 밸리에 살면서,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알아들었더라도 그것 때문에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적었다.
또, 그것때문에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결국 무슨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더 적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은 종교가 되어있는 것 같다.

아직은 이 책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을 이 블로그에서도 좀 정리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밥 먹는 것에 진심인 민족

미국에 처음 와서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조금 했던 내게 점심시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우루루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그 후에 커피 한잔 하면서, 일부는 담배 한대 피면서 이야기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자리에 와서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잠깐 직장에서 ‘신우회’라는 것에도 참여했었는데, 그 신우회 모임도 점심시간에 하기도 했고, 또 역시 직장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따로 만들어서 한적도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그 성경공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미국은 점심시간이 없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더 긴 내게 이제는 그것이 훨씬 익숙하다.

최근,
함께 일하는 한국의 어느 회사 사람들이 미국 LA 쪽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고, 나도 당일치기로 잠깐 그 사람들과 LA 부근에서 만나서 함께 다른 곳을 방문하는 일정을 짜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가야하는 곳은 LA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나는 그것을 organize하는 분에게,
호텔을 그곳에 잡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침에 일찍 그쪽에서 미팅을 함께 하고 오후에 다시 Bay area로 돌아올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저녁식사와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고려해서 숙소를 LA 코리아 타운으로 잡았다고 했다.

음….잠깐 당혹스러웠다.
아니, 밥먹는 것 때문에 1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다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그런 문화속에 25년 넘게 살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문화에서 그보다 더 오래 살면서 그 문화를 잊은 것일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많이 먹어서 고민인 내게 아직도 전화할때마다,
밥 잘 먹는 걸 걱정하신다.
참…. 밥먹는게 중요한 민족이다.

욥기


주말에 youtube feed에 떠서 욥기에 대해 설명한 video(들)을 보았다.

우선 첫번째 본 비디오.
욥은 ‘자기 의'(self righteousness) 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다루어내시는 하나님이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채널에서는 보통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곤 하는데, 이 비디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설교’에 가까운 비디오였다.
그렇지만 들으면서 수긍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
‘자기 의'(self righteousness)라는 것을 중심으로 접근한 이런 설명을 과연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 급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냥 역시 youtube에서 찾으니 다음의 비디오가 나왔다.
이 비디오에서는 욥은 대답을 구했으나, 욥이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이 Rabbi가 어떤 정도의 입장을 가진 분인지 잘 모른다. 대충 찾아보니 orthodox Jew라고 써 있는 것 같던데…

사실 요즘 이 두 가지의 고난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고 있다.
하고 있는 성경공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

나는 이 두가지를 놓고 주말에 생각을 해보면서는….
논리적으로는 InspiringPhilosophy의 설명이 더 좋은 것 같은데,
감성적으로는 Rabbi Breitowitz의 설명이 더 좋은 것 같다.

공부가 부족함…

그냥 내게는 구약이 더 어렵다.ㅠㅠ
당연히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 신약이건 구약이건 간에 당연히 쉬운것은 없겠지만,
특히 구약은 조금 더 힘들다.

도대체 어떤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찾는 것도 더 힘들고,
그냥 조각조각 짧은 본문을 가지고 얕은 윤리책 정도로 읽어내는 것은 영 마음에 차지 않고…

사무엘서를 그래서 꽤 끙끙거리며 읽고 있는 중이다. ㅠㅠ
그냥 아는 것도 부족하고,
내 삶이 깊지도 못하니…
그 말씀이 그저 별 생각없는 글들로 휘리릭 지나가고 있는 듯.

하나님에 대한 기대?

하나님께서 상황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을 해결하시지 않더라도 그분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내 외침을 지금 당장 듣지 않으시더라도,
그래도 그분이 옳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다.

이런게 믿음이라는 거다.

오랜 신앙의 경험과 연륜을 거쳤을때,
결국 그런 신앙이 남게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길…

Floating Christians

2022년 4월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장통합/기아대책/목회데이터연구소, ‘코로나19이후 한국교회 추적조사 (개신교인 4차))

전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중 57.4%가 현장예배를 드리고, 42.6%가 온라인예배 혹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중 거의 3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2개교회 이상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이 사람들을 floating christian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온라인에서 하는 신앙생활에대해 40% 정도가 수용적이라고 한다.

대개 목회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현실과, 성도들이 이야기하는 현실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하는 것은 당연히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렇게 바뀌는 것에 빠릿빠릿하게 교회들이 잘 적응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교회 리더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 보인다.

다만…
이렇게 바뀌는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믿고 추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좀 던져보면 좋겠다.

금속활자로 번역성경이 마구 프린트되어 대중에게 공급되고 있는데,
라틴어 성경만이 진짜라고 우기는 건 신실함이 아니라 똥고집이었던 거다.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똥고집.

바뀌는 세상때문에,
이전에 당연하게 여기던것을 한번 의심해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우기고 있던 것이 있는지… 그런 생각을 좀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정도의 생각도 해보려하지 않는 것 같다.

찬송가

그래도 나는 찬송가를 예배시간에 많이 부르며 자랐던 세대이니까…
그야말로 단순히 머리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너머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찬송가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서 소위 ‘경배와 찬양’이라는 것이 막 뜨기 시작한 것이 내가 대학 시절이었고,
그때 아주 소수의 ‘찬양사역자’가 음반을 내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도 주일예배시간에는 대부분 찬송가를 불렀고, 청년부 모임 같은 것을 하더라도 ‘복음성가’와 ‘찬송가’를 섞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아마도 내가 찬송가를 마음에 담고 자란 거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찬송가를 듣고, 그것을 흥얼거리는 일들이 참 많다.
어떤 찬송가는 들으면서…아… 이건 그때 들을땐 참 좋았는데 지금 들어보니 신학적으로 좀 동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어떤 찬송가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마음을 울리는 것들도 있다.

요즘 계속 들으며 마음에 공명을 갖게되는 찬송가는 이것.
혼자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게 되기도 하고, 다시 혼자서 마음을 가다듬고 뭔가 결심을 하게 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