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5)

내가 하고 있는 성경공부 그룹에서도, 이런 내용을 좀 많이 다루게 되었다.
나는 말하자면 약간 열을 내서,
정치적 성향과 기독교를 연관시키지 말라고 많이 이야기했다.
결국 그것은 폭력적이라고.
악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루신 예수님의 방법과는 너무 다른 것이라고.

팀 켈러가 돌아가시기 몇달전에 했던 인터뷰가 있다.
1970-80년대 미국의 mainline denomination이 몰락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mainline denomination이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아젠다와 자신들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미국의 evangelical denomination이 몰락하고 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evangelical church들이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아젠다와 자신들을 동일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깊이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나는 정말 아주 오랬동안,
내가 복음주의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감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복음주의자(evangelical)이라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심하게 정치화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4)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룰수 없더라도 조금씩 양보해가며 타협점을 찾아서 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가된 정치에서는 그런 일이 용납되기 어렵다.
정치적 신념이 종교화 되었기 때문에 타협은 배교와 같이 여겨지게 된다.

양쪽 극단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 거릴때,
결국 한표라도 더 받아서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정치 지지 집단의 바람으로 선거과정은 더 과열되고,
대화와 타협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51%의 다수가 소수의 뜻을 눌러버림으로써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정치는,
나와 생각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에게 내 뜻을 강제할 수 있는 합법적 폭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요즘의 정치는 폭력적 종교가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
폭력적 종교가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3)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양극단화 (polarization)이다.
양 정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정치집단을 지지하면서 반대 정치집단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부축이는 것이 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대화하고 타협해서 함께 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더 대립하고, 더 선동하고, 더 혐오하는 것을 부축인다. 그리고 그들은 더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것으로 인해 정치는 더 양극화가 되고,
양쪽 정치집단을 종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계속되는 이런 positive feedback을 멈출 장치가 없을때,
정치의 종교화와 정치의 양극단화는 함께 매우 빠른 속도로 함께 극대화 되게 된다.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선명하게 보고 있는 현상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2)

정말 지금 미국에서는, (한국도 그렇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렸다.

주일에 목사님이 설교에서 그 판별식을 잘 설명해주셨다.

영적인 패배와 함께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과, 영적인 승리와 함께 정치적인 패배를 하는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을때, 정치적인 성공을 포기하고 영적인 승리를 택하겠는가.

실제로 미국의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고, 이미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결국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신에게 가장 으뜸의 가르침 즉 종교(宗敎)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정파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어떤 기독교인이,
막상 주기도문이 무슨 내용인지 조차 모르더라는 말.
십계명을 학교에 계시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투쟁을 벌이던 사람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물었더니 막상 그건 모르더라는 말.
이런식의 이야기들이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드러낸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이 40이상의 사람들에게있어서는 그래도 자신들이 믿고있는 종교와 새로 믿게된 정치라는 종교를 함께 따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더 젊은 사람들중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유일한 종교가 정치가 되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1)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 패배, 좌절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정치지형이 대단히 나누어져 있어서 (polarized)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것이다.

우선,
어제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가 참 좋았다.

이 시리즈의 글을 쓰기전에 우선 좋은 설교 한편

디모데 전서 1:7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7)

사변적으로 따지며 생각하고 가르치기만하고, 막상 그 말씀의 목적인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한때 이 말씀을 읽으며 내가 아는 누구, 내가 어디서 본 누구에게 이 말씀을 열심히 적용했던 어리석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말씀에서 숨이 턱 막힌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 지 못하고 있는건데…

….

피상적으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인격의 깊이를 위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최소한 지금의 내겐 정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Your vote doesn’t count

  1.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경우,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는 그 의미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가 투표를 하느냐 마느냐로 크게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람의 표는 미국 전체 선거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미국 사람은 미국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은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영향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국의 큰 영향 아래 있는 하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의 표는 미국 사람들의 표에 비해 현저하게 그 의미과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나 같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은, 여러가지로 투표할 자격이 제한된다.
    우선 미국에서는 전혀 투표할 자격이 없고,
    한국 선거에서도 대통령선거 같이 전국 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나는 현 거주지가 미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같은 것은 참여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의 표는 그나마 더 의미와 가치가 낮은 것이다.
  4. 그러니 내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거나 걱정하거나 뭐 하든 그야말로 별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서도….
    이번 미국 선거는 정말 어느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한쪽 후보가 다른쪽 후보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러니… 뭐 이렇게 된거 이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거지 뭐.

멍청함, 무능함, 은혜

대단히 무능하고 대단히 멍청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호의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돌보아주고, 배려해주고, 격려해주고, 무엇보다도 포용해주어야 가능하다.

사람에 따라 얼마나 어떤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 똑똑한지 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느낄때가 당연히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잘나서 그럴수도 있지만, 너무 못나서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조금 더 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할때,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정서적, 물질적 한계에 도달할때,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도 어떤 사람이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은혜가 아닌가 싶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제 설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으로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그런데, 최근 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대해 약간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비슷한 해석을 한 다른 주석 같은 것을 아직은 보지 못해서…. 혹시 다른 누가 이렇게 해석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여리고에서 내려가는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robber λῃστής)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이 ‘강도’라고 변역한 단어는 흔히 그 당시 열심당원들과 같이 폭력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십가가 예수님 양 옆의 강도도 그냥 ‘잡범’들이 아니라, 로마 체제에 반역했던, 폭력으로 반항했던 저항인사들이었던 것이다. (십가가는 로마제국에 대한 반항을 처벌하는 도구였다.)

그러니,
어쩌면 여리고에서 내려가고 있던 이 사람은,
로마에 협력하고 있던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로마인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니 강도 (λῃστής)가 그 사람을 폭력으로 해치려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이 사람을 피했다는 것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긋고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그 민족/종교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사람을 돌보는 사마리아인이 대비되는 것.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라고 한 것이 그러므로,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 이웃이 되는 자세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