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몇년전에 봤던 응답하라 1988에서 내가 제일 감동깊게 보았던 장면중 하나이다.
나는 자그마치 50이 넘은 어른인데….
나는 정말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쁘긴 한걸까.
어른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몇년전에 봤던 응답하라 1988에서 내가 제일 감동깊게 보았던 장면중 하나이다.
나는 자그마치 50이 넘은 어른인데….
나는 정말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쁘긴 한걸까.
나는 facebook 보는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내가 부지런히 그 내용을 update할만큼 한가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나와 ‘친구’가 된 사람들이 올리는 글들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또 내가 심심할때 이래저래 가입해놓은 group들로부터 나오는 글들도 어떤 것은 참 통찰이 있는 글이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을 읽는 것이 시간낭비를 넘어 해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될 경우가 많다.
facebook에 나오는 강한 자기 주장 중에서 어떤 것은, 심지어 그 생각이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들어볼만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그냥 너무 싸구려 비난과 증오로만 점철되어 있어 마치 똥냄새를 맡는것 같이 느껴지는 주장들도 있다.
그렇게 똥과 같은 글을 써대는 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찬들이다. 특히, 뚜렷한 주관과 아젠다와 주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젠다에 반대가되는 생각이나 주장이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똥을 뿌리는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여러가지에대해 꽤 강한 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나의 주장들도 그런식으로 똥냄새를 피우고 있지는 않을까?
10월 초에 강아지 하나를 shelter에서 입양했었다.
2살이라고 했고, 닥스훈트와 치와와의 잡종인것 같다고 했다.
아주 활발했지만 겁이 아주 많았다.
처음엔 좀 겁이 많아 소심하게 행동했으나 곧 우리와 친해졌고 내가 집에서 일하는 동안 그야말로 내게 딱 달라붙어 지냈다.
분리불안 (separation anxiety)이 좀 걱정스러웠지만, 집에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두어시간 이상 집 밖으로 나갔다와도 괜찮게 잘 지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침대위로 올라와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하면 바로 달려들어 꼬리를 흔들며 아침인사를 했다. 작은 공을 던지면 그걸 물어오는 것도 집에서 곧잘 했다.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을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곤 했다.
우리중 누구라도 소파에 앉아있으면 반드시 우리와 살을 맞대고 옆에 눕거나 앉았다.
잘때도 우리 침대위에서 자고 싶어했다. 마음이 약해서 우리는 그냥 그렇게 우리 옆에서 재웠다.
그런데 11월 초, 낮에 산책을 하던중에 내가 미끌어져 넘어지면서 개줄을 놓쳤는데 이 아이가 쏜살같이 뛰어 도망가버렸다. 아직도 그렇게 도망가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멀리 뛰어가버린 모습이 머리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날 밤 우리는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동네를 열심히 돌았다. 혹시 쓰레기통주변이나 좀 따뜻한 집의 입구 옆등에 있지는 않을까….
그 다음날 아침, 우리 동네의 animal control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아이가 죽은채로 어제밤에 발견되었다는 연락이었다. microchip을 스캔해서 그 아이가 우리 개라는 걸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와서 그 아이를 보겠느냐, 혹시 화장을 해서 그 아이의 재를 가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떤 상태로 발견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처참한 상태로 죽었다면 그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재도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고, 그 아이를 화장하는데 40불을 지불하고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그냥 내 credit card 번호를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둘이 말 없이, 그 아이의 것들 – 침대, 장난감, 먹이, 등등-을 조용히 정리했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정리했다.
한달동안 우리와 그렇게 지내던 이 아이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이제 그 아이를 잃어버린지 한달쯤 되었다.
그 아이는 우리와 한달 있었고, 떠난지 한달이 되었으니 이젠 그냥 그렇게 마음이 괜찮아질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마음이 영 그렇지 않다.
그때 내가 넘어지지 않고 조금 더 줄을 잘 잡았더라면….
그때 그길로 산책을 하지 않고 다른 길로 산책을 했더라면….
그런 자책도 계속 있다.
그 아이가 내가 일하는 옆에 붙어앉아 있었던 자리를 보면 마음이 그냥 계속 찡~하다.
그 아이사진 찍어놓은건 영 열어보지 못하고 있다.
한달동안 정이 들었던 그 아이가 떠난것으로부터 회복하는데에는 한달이 더 걸리는 것 같다.
그 아이를 잃어버리던날 넘어져서 삐끗했던 발목은 아직 아프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7 (새번역)
But make sure your statement is, ‘Yes, yes’ or ‘No, no’; anything beyond these is of evil origin Matthew 5:37 (NASB)
아주 순전하게 예를 예라고 이야기하고 아닌것을 아니라고 이야기하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아주 힘들어진다. ㅠㅠ
특히 회사같은 곳이나 여러가지 business를 하는 곳에서는 예를 그냥 단순하게 예라고 이야기하지 말아야할 경우도 참 많이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투명하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회사에서 아주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예를 예라고 이야기하고 아니오를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깨어짐 때문에 불가능하게되어버린 것이니, 만일 그 깨어짐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런 투명성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때로 깨어지지 않은 세상의 코드를 가지고 살도록 요청받는다. 그렇게 깨어지지 않은 세상의 코드를 가지고 살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는 대단히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위협을 받게되기도 한다.
어떤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꾸밈없는 투명한 communication을 바라는 것은 그런의미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 반드시 가저야할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관계가 계속해서 서로를 사탕발림으로 칭찬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어떤 공동체가 서로 너무 친절한 배려와 예의바름에만 머물러 투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간관계나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가 아니거나,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As soon as a preacher begins a sermon with, “I cannot believe what my seven-year-old daughter recently said…” you can quit listening.
– Stanley Hauerwas (from the lecture, “Preaching without Apology“)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야기하는건 이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일상을 romanticize 하는데 성경 text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다.
성경 text가 그 일상을 해석하여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흔히 복음과 일상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할때,
일상의 작은 일들에 복음의 의미를 부여하고,
혹은 일상의 작은 일들로부터 복음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하곤 하는데…
사실 설교가 되었건, 기독교 글이 되었건….
산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는 하나님이라던가…
나무속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여정등과 같은 류의 이야기를 참 많이 접할 수 있다.
적어도 Stanley Hauerwas는 이런걸 왕창 비판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의견에 참 많이 공감한다.)
복음의 일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일상을 낭만화(romanticize)하는 것으로 그쳐버리는 식의 이야기들은 정말 식상하다. 그리고 적어도 내겐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한다.
지금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어떤 device 가운데 하나에 유난히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다.
이런건 대개, 이걸 만드는 공장 (대만에 있다)에 가서 일주일정도 process flow review하고, 주의할것을 함께 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할수가 없으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사람들이 다들 그냥 발만 동동 구르면서 전화통만 붙들고 제발좀 잘 해라… 이렇게 이야기만 하고 있는 중이다.
에이 씨… 이럴때 얼른 비행기표 끊어서 훌쩍 날아가면 이 고생안하고 한번에 해결되는건데.
영국에서는 COVID-19 vaccination이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도 아마 몇주안에 vacccination이 시작될 모양이다.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까지 오려면 아마도 내년 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뉴스에서도 health passport 같은것이 만들어져서 coronavirus vaccination 증명이 있어야 비행기도 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도 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아, 그럼 내년 하반기부터는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걸까?
창녀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
설교등에서 이거 G. K. Chesterton이 했다고 이야기하는 걸 많이 들어보았는데, 궁금해서 조금 더 찾아보니 이 말을 G. K .Chesterton이 했다는 근거는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다만, Bruce Marshall 이라는 작가가
“the young man who rings the bell at the brothel is unconsciously looking for God.“
이라는 표현을 그의 책 “The Worlds, The Flesh, and Father Smith”라는 책에서 썼다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위의 멋진 말은 사람이 가지는 공허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그런걸까?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활동 같은 것도 역시 그런 분류로 넣을 수 있는 걸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다 적용될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최소한 내게는 꽤 높은 확률로 그런 것 같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을때에는 늘 하나님 이외의 목마름이 현저하게 낮아지거나 사라지곤 한다. 그게 그냥 종교적 엑스타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에대해 내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모든 것들이 다 상대화되어 trivialize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때문에 마치 온 존재가 다 푹 젹셔져서 내게 다른 수분공급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삶의 시즌을 경험할때가 있다.
나는 창녀촌의 문을 두드려본적은 없고, 딱이 뭐 그렇게 윤리적으로 나쁜 것을 추구해본 경험도 없지만….
삶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지 않음을 경험할때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보려는 시도를 할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른이들은 어떤지… 참 궁금하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요한복음 15:1)
하나님께서 어떤 시대에 가지치기를 하시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럴때 정말 사정없이 나무가 앙상해지고 이러다 나무가 죽겠구나 싶을만큼 보잘것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 그 나무가 과실수로서 살아남게 되는 거다.
가지치기가 없으면 그 나무 전체가 쓸모없게 되는 거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도 가지치기를 하시는 때가 있다.
그 가지치기의 시기에는 그 사람이 참 볼품없어진다.
앞길이 불확실해보이기도 하고, 다루기 힘든 무게가 그 사람을 짓누르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기독교에서는 문제가 닥쳤을때 그것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인 것으로만 인식하는 모습이 편만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삶 속에서 닥치는 ‘문제’들은, 급히 그 문제에 집중해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 일단 머물러 가지치기를 해야하는 과정이자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가지치기를 하시는 시즌을 겪어왔다.
어떤땐 다소 넉넉하게 그 시즌을 이겨내기도 했지만,
어떤땐 그 시즌을 넘기는 것이 죽기만큼 어려울때도 있었다.
어떤땐 그 시즌을 견디어내며 내 안에서 충분히 가지치기가 잘 되어, 그로부터 10여년이상 건강하게 내가 살도록 만들어준 경우도 있었고,
어떤땐 그 시즌 속에서 당장 닥친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버둥대다가 충분히 가지치기가 되지 않아 그 가지치기 시즌을 헛되이 걱정만하며 망가져서 보낸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가지치기의 시즌에 있는지, 아니면 그냥 억울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이유조차도 알수 없는 시즌을 보내고 있는지 하는 것을 제3자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줄수는 없다.
그렇지만 꽤 많은 경우 그 시즌에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었을때 하나님께서 그것이 어떤 시즌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 100%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 꽤 높은 확률로 그런것 같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어떤땐 내게서 마지막으로 잘려나가야할 그 가지가 잘려졌을때, 당장 닥친 문제 해결과 무관하게 내게 큰 자유함이 찾아오는 경험을 한적도 있었다.
어둠의 시기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떠나지 않기를…
기록을 찾아보니 2005년이었다.
민우가 7살때였는데…
내가 민우를 위해서 싼타 할아버지 이메일 주소를 하나 만들었다.
그리곤 민우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상당히 놀랍게도, 민우는 꽤 커서까지 싼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 그 이메일을 만들어서 보냈던 7살때가 민우가 싼타 할아버지를 믿었던 마지막 해가 되었다..
민우는 그 이메일에 친절하게 답장을 해서, 자기가 어떤 것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민우는 그해에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고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배드민턴 세트를 갖고 싶다고했고, 그걸 사주었더니 무척 기뻐했다.
그 다음해에, 민우는 그 이메일주소의 패스워드를 자기가 알아내버렸다ㅠㅠ
그도 그럴 것이 그 이메일 주소의 패스워드가 엄마의 이름으로 구성된 패스워드였다. ㅎㅎ
민우는 싼타 할아버지의 이메일주소를 해킹했고, 그 이메일이 아빠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허걱.
민우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물어보면 별로 바라는게 없다.
그냥 집에가서 엄마 아빠랑 불고기 먹고싶다는게 소박한 소망이다.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그 싼타 이메일을 사용해서 민우에게 이메일을 하나 보내려고 한다.
민우야, 금년에 아주 수고 많았어. 착한 어린이였으니 선물사줄께, 뭘 원하는지 얘기해보렴.
민우도 그렇지만…
금년을 그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올해 같은때는 싼타 할아버지가 선물 한보따리씩 좀 갖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해본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대부분 같은 대학에 가는 바람에 대학때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꽤 친하게 지냈었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다소 좀 찌질한 친구들이었다. ㅎㅎ
옷 잘 입는다거나 그런거 잘 못하고, 어쩌다 학교 밖에서 만나서 함께 놀러다닐때도 새로 배운 물리 이론같은거 이야기하면서 놀았다. ㅠㅠ
어찌보면 Big bang theory에 나오는 사람들 같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돌이켜생각해보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찌질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된 노래이지만, 아마 20년정도쯤 차이가 나는 후배들도 여전히 그렇게 찌질이 코드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가끔 듣고 있는 혹은 보고 있는 한국의 한 라디오프로그램의 코너가 이런 찌질이 코드를 완전 제대로 담고 있다.
한때 꽤 많이 찌질했던 사람으로서, 어쩌면 지금도 꽤 많이 찌질한 사람으로서, ㅎㅎ
들으며 공감도 많이 되고, 재미도 있는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