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벌어 먹고 살기 (3)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고 이야기하는 개혁주의적 변혁주의 세계관은 이원론을 극복해내는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이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 매우 가치있다는 주장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깃발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져다준 부작용 역시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반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 좀 더 좁게는 직업활동의 가치와 의미가 ‘대단한 것’이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직업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 자체가 영광이 되게 하라” 고 설교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 생존경쟁의 현장인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내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공부 잘 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그리스도인 말단 직원이,
그 거대한 대기업의 체제 속에서 도대체 뭘 하면 그 대기업이 변한단 말인가!
세상은 변혁시키라는 구호에 취해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 접하면 금방, 이거 뭐야…. 과연 이렇게 사는게 의미가 있는 걸까. 악한 체제, 혹은 marginally 선한 체제 속에서 부품이 되어버리고 있는데… 내가 학생때 꾸웠던 원대한 꿈은 어떻게 되는거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여 잘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면, 직장을 변혁시키지 못하는 좌절 속에서,
어떤 사람은 ‘뭔가 더 새로운 꿈을 찾아서’ 직장을 때려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좆아서’ 목회자나 기독교 관련 직종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학생때 가졌던 꿈은 이게 아닌데’ 하며 그저 낙망해 있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게 세상 사는 거 아닌가.
한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거 말이다.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다.
이런 식의 ego-centric한 생각을 연료로하여, 변혁적 세계관의 불을 붙여 놓으니 처음엔 당연히 잘 타기는 하는데… 그 불길이 오래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타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독가스가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직장생활,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다.
그저 밥 벌어먹고 사는 거다.
그걸로 세상 못 바꾼다. 못 바꿔도 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좀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요한복음

1.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어떤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와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성적으로 성경공부하고 책 읽고 그러는걸 더 좋아하는 반면, 그 형은 신비체험이 많고, 환상을 보고, 귀신을 쫓고 그런걸 하는 형이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내게 그 형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형이 어느날 뜬금없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적이 있다.
“너는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의미를 그때 잘 이해하지 못했다.

2.
N T Wright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복음은 내 아내와 같습니다. 나는 요한복음도, 내 아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요한복음에 대한 N T Wright의 이 말을 완전 공감한다. ^^

3.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록 불친절(?)하다.
뭐 좀 논리적 흐름을 따라 노력하다 보면 그게 뚝 끊기고 그냥 선언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서술적이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선언적이고 직관적인 책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 같다.

4.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직관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책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통시적이고, 초월적이다.
나는 그래서 요한복음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훨씬 더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언적이고 직관적이고 통시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잘 활용한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요한복음의 그 선언적, 직관적, 통시적, 초월적 성격을 잘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리 많이 만나지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연구를 좀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 몇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

5.
새해들어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매일성경 본문으로 QT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이 애가(lamentation)으로 읽힌다.
요한복음 1장에, 왕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theme이 요한복음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sign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들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적어도 나는 이번에 요한복음이 애가로 읽힌다.

6.
예전에 그 형이 내게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형이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은, 요한복음에 조금 더 강조해서 나와 있는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meta narrative도 물론 좋고, 조직신학적 분석도 물론 좋은데…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core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그냥 사랑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내가 정말 깊은 곳에서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7.
사랑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해되지 않는 요한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내 모습도 역시 역설적이다.

또, 평신도 설교

어제는 은규 형제가 설교를 했다.
평신도 신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었다.

어제 설교의 첫 부분은,
사실 내가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블로그에서 좀 썰을 더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inner being의 voice에 충실하는 것이 참되다는 낭만주의적 현대의 자아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은규 형제가 한번 질렀으니, 나도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서 한번 follow-up을 이 블로그에서 해봐야겠다.

그리고 또한 인상적이 었던 것은,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Ego-centric한 현대의 culture를 완전 까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N T Wright의 신학이 그런식으로 Ego-centricity를 직접적으로 깐다고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어가며 멋지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우 형제나 은규 형제 같은 사람들이 물론 참 똑똑하고 신실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조금만 교회가 불필요한 장벽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목회자들로부터 나오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평신도의 입을 통해서 멋지게 나오는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다들 돈 벌고, 애 키우고… 빡빡하게 살면서… 설교 한번 준비한다는게 그리 쉽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진주들이 이렇게 나오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관심있는 분들, ‘하나의 씨앗교회’ podcast에서 지난 주일 설교를 들어보시라! ^^

밥 벌어 먹고 살기 (2)

나는 교회에서 흔히 쓰는 ‘비전’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대부분 그 ‘비전’이라는 말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덧입히고 싶을때 쓰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하나님 안에서 기독 정치가가 될 비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거의 100%는 그냥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잘나가는 정치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이 정죄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새성전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라고 목사가 이야기할때, 그것은 그냥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슨 개뿔.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직업에서의 욕망을 이런식으로 포장하기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비전, 뭐 그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의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심, 직업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바람 등등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거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라거나,
직업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이런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대단히 흔하다.

아니 그냥…
나는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다.
나는 월급을 더 받는 직장에 가고 싶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회사 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좀 딱 까놓고 얘기를 못하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적’이라고 욕을 먹을까봐?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영적이지 못해서?

이렇게 꼬여버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언어구조 때문에,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이 구별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혼합주의와 세속주의가 기독교 안에 더 강력하게 침투해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좀 쉽게 생각해보자.
직장은 그것을 통해 돈 벌어서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것 아닌가?

밥 벌어 먹고 살기 (1)

1.
얼마전에 한 후배와 전화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하는 중에 직장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하나님의 뜻이니 비전이니 하고 이야기하는 후배에게, 직장이란 밥벅어 먹으라고 있는 거야… 라고 애기해 주었다. 그 후배는 약간 벙찐 분위기였다. 이 형에 타락한 걸까.

2.
최근에 이 블로그 독자중 한분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직장을 옮기는 것과 관련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내게 그 고민을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분에게도, 직장을 찾을때는 밥먹고 살기에 좋은 곳을 찾으라는 내용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3.
최근에 또 이 블로그의 다른 독자가 밥벌어먹고 살기위해 직장 다니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고 언급을 해 주셨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글을 좀 쓰라고 요청도 했다.

4.
우리 교회 목사님이 facebook에 루터의 Two Kingdoms 이론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게 우리에게 relavant해 보인다는 포스팅을 하셨다. 나는 facebook에 뭐 들어가서 내 생각과 마음을 쓸만큼 부지런하질 않은데도, 나는 화들짝 흥분해서 목사님의 포스팅에 열렬한(?) comment를 날렸다.

5.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직장은 밥벌어먹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기독교 셰계관, 그런거 개나 줘버려… 뭐 그런거 당연히 아니고, 직장을 밥벌어 먹기 위해 다니는 곳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

Voting is over-rated

내가 좋아하는 pacifist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Voting is over-rated”

민주주의에서 투표가 가지는 의미는, 그 과정을 통해서 대화를 하도록 enforce하는 것이다.
그러나 50.1:49.9의 투표결과에 의해서 49.9 의 의견이 묵살되는 것은 옳지 않다.

최근 Trump가 친 여러개 사고 가운데 제일 큰것은 immigration ban이다.
미국 곳곳에서 시위를 하고, 반대 성명을 내고 난리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것은, 여론조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Trump의 이 executive order를 지지하는 쪽이 높게 나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이 이길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되는 것이 안전할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Trump를 지지한 사람들이나,
박근혜-이명박에 투표한 사람들…
정말 어쩌면 좋을꼬.

Smart watch

나는 비교적 사치스러운 편은 아니다. ^^
비싼 것을 후다닥 사기에는 대개 너무 새가슴이어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사는 내 spending limit은 대충 10~15불 정도쯤 된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는 가끔 한번씩 eBay에서 전자시계를 사는 사치를 누렸었다.
꼭 Casio 브랜드만 샀었고, 가격은 무조건 20불 미만이었다.
그렇게 사서 배터리가 다 되거나 심하게 scratch가 나거나 하면 또 10~20불 짜리 시계를 하나씩 사곤 했었는데, 그래서 내겐 그렇게 산 Casio 전자시계가 4개가 있다.

그런데 최근,
회사에서 smart watch를 차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그걸 주기 때문이다.
나도 그걸 주문해볼까 생각을 했는데, 정말 내가 일을 하는데 그게 필요하다는 justification이 약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몇달째 그냥 안사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 eBay에서 우연히 뒤져보니 Smartwatch가 무지 싸게 나온게 있었다. Asus의 Zenwatch2인데, 79불에 나왔다. refurbished version.
최근 모델보다 하나 더 전 모델이어서 재고 처리를 위해 가격을 내린게 아닌가 싶은데,
며칠을 망설이다가 하나 확~ 사버렸다. 허억.

지금까지 내가 써본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 Smart watch is not yet for everybody.
아직은 smart watch가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 사실상 notification을 바로 볼 수 있다는게 거의 다 라고 할 수 있다.

(2) Too expensive
게다가 그런 단순한 기능을 위해서 300불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지불하는건 너무 비싼것 같다.

(3) It is for me!
그런데 써보니 내겐 정말 정말 유용하다! 이메일이랑 여러 연락이 multiple로 쏟아지는 와중에 미팅에 들어가 있으면, 미팅에 방해되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고, 특히 cleanroom 실험실에 들어가 있으면 더더욱 편리하다. 나는 몇가지 간단한 voice command를 통해서 앞으로 7분 이후에 알람을 울려줘. 뭐 이런 명령을 setup 해 놓는 일들을 자주 하는데, 그게 정말 한 5분 남짓 짜투리 시간이 남았을때 그 시간 낭비하지 않고 일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역시 나라도 그것을 위해서 300불씩을 투자하지는 않을 것 같다. 100불 정도가 아마 내 생각엔 최대로 내가 지불할 액수일 것 같다.

어쨌든, 현재까지는 잘 쓰고 있다.
오랜만에 smart shopping을 한 기분이다. ^^

평신도 설교

우리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평신도들이 함께 설교 내용을 상의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평신도들이 설교를 할때가 있다.
어제는 우리 교회의 리더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 형제 한명이 또 설교를 했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설교를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못한다고 목사님께 전화드리려고 했어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은,
언제든 힘들면 전화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서 목사님은 주중에 그 형제의 설교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특별히 기도 응원 요청도 더 해주셨다.

또,
다음주도 또 또 다른 평신도가 설교를 하게되기 때문에 두주동안 설교를 안하신다고…
수련회 관련된 노가다를 자신이 담당하시겠노라고 나서셨다.

어제 설교를 한 형제와 다음주 설교를 하는 형제와 함께 설교 준비를 하시면서,
두 사람은 헌금도 하고, 설교도 하고, 참 수고가 많다 고 농담섞인 격려를 하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제 정우 형제의 설교는 정말 좋았다. 나처럼 설교 까다롭게 듣는 사람에게도 깊이 마음을 울리는 설교였다.
이런 사람과 함께 교회에 있다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싶었다!
(우리 교회 podcast에 떴으니, 가능하신 분들은 꼭 들어보시라~) 직접 다운로드 링크는 여기

그런 평신도의 설교를 위해 목사님은 노가다를 자청하시고…
(그렇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설교는 여전히 목사님께서 하신다. 설교를 완전 쉬시는건 아니다.)

좋은 평신도 설교를 위해,
평신도가 헌신하고,
목회자가 격려하며 support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건 참 흐뭇한 일이었다.

다음주 은규 형제 설교도 왕창 기대중.^^
아, 그리고 그 다음주에 우리 목사님 설교도 물론. ^^

학벌 (17)

나는 꽤 괜찮은 교육을 받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성공해왔다.
결국 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학교들을 다녔고, 그 안에서 꽤 좋은 성적과 성과를 거두었다.

나는 나 같은 사람은,
엄밀하게 말해서 ‘학벌’에 대하여 정확하고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계속 성공을 해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나는 ‘무능’과 ‘게으름’ 그리고 ‘악함’을 잘 구별해내지 못한다.

가령,
쉬운 비유를 들어서 내 친구가 어려운 수학문제를 숙제 제출 당일아침에 와서 내게 물어보면,
나는 당연히 이 친구가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친구가 아주 열심히 했음에도 능력이 부족해서 숙제 제출 직전까지도 이걸 풀지 못한 것일수도 있는데 말이다. – 이걸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회사에서도, 누가 일을 제대로 못하면 나는 얼른 그 사람의 integrity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게으르거나 딴짓을 하고는 정직하지 못하다거나…
그렇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은 같은 양의 일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수도 있다. 그것은 능력의 차이이지 integrity의 문제가 아니다.
이게… 정말 정말 나는 잘 이해가 안된다. – 머리론 아는데… 이게 정말 내겐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늘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도 정말 어렵다.
(아마 이 시리즈의 글을 읽는 독자들도, 내게 이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catch하셨으리라 본다. 내가 앞에서 내 학창시절 공부한 이야기를 낮 뜨겁게 쓴 이유도, 이런 내 배경을 솔직하게 욕을 얻어먹도록 좀 열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사람의 학벌을 비롯한 성공의 경험은,
치명적인 영적/인격적 장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노력으로 극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그 사람은 평생 죽어라고 노력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영적인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민우를 대학에 보내면서 내가 했던 고민의 정점에는 이 문제가 있었다.

학벌 (16)

왜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학벌을 얻으려고 하는가?
높은 자리, 좋은 자리, 좋은 직장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런 욕망은 인간세상에서 어느정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요즘은 보면 그렇게 추구하는 성향이 정말 극단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왜 그럴까?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어마어마해지는데 반해,
성공한 사람들의 비율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일단 빌게이츠가 되면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성공이 주어지게 되지만,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의 비율은 정말 얼마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그렇게 극단적인 성공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미래에대한 불확실성과 상대적 박탈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그래서 아주 극소수가 엄청난 부와 권력등을 소유하고, 더 많은 다수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편 아주 소수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성공을 바라보면서, 그 극소수에 들기위해 죽어라고 노력을 하게되고,
또한 그로부터 조금만 낙오하면 완전 낙오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떨어지지 않기위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조금 낙오하더라도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된다면,
일류대를 졸업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집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땀흘려 일하는 수준의 삶이 가능하게 된다면,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기게 되고, 조금 더 제정신인 세상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사회적 다양성까지 더해지게 된다면,
수학을 잘 못하지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과,
운동신경이 없지만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과,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미적분을 풀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교육이, 그런 세상을 만들 꿈을 꾸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입학의 spec을 manufacture하는 세상 속에서는 정말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