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백성에게는 구약백성과는 다른 방식의 선교가 제시되었다는 의견에 대하여 (배우고 자라는 하루)

제가 잘 아는 사람이 ^^
지난 화요일의 제 글에 좋은 reply를 달았기에, 아예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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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9에 나오는 declare the praises of him [NIV] 또는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ESV]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43:21에 나오는 declare my praise [ESV]와 (chosen people이라는 공통점도 pivot으로 작용하여) 비슷한 표현인데, Joel Green은 이것을 두고, 베드로에게는 구약의 vertical language와 신약의 horizontal language가 다르지 않았다고 해석했더군.

베드로의 편지와 그의 동료 요한의 편지 모두, 편지 전체 그림을 놓고 볼 때 그 선포의 형태로 삶의 방식 (거룩과 사랑, respectively)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자세를 넘어서, 선포의 형태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더라구.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형도 주지했듯이, 이 두 사람의 행동들 (selected and recorded by 누가) 을 보면, 예수의 삶/죽음/부활을 설명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채워나갔으니…

이 두 가지가 단순 상보적이지는 않을진대, 결국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그 핵심적인 교집합을 간과한 결과인 것 같은데. 이 둘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든지 강조점을 두는 것은 contextual matter일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등장으로 선교의 컨텐츠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정립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싶네. 예수가 이스라엘됨을 성취한 것은 맞지만, 그 성취를 구현하는 몫은 남겨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이 편지에서 권하는 삶의 방식의 핵심을 예수에게 잇대는 모습이 분명해 보이고.

The Sent – 내 묵상 (15)

내 개인적으로,한때 대단히 missional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기간이 있었다. (지금도 사실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정말 missional한 것일까 하는 진지한 의문과 고민이 생겼다.

내가 무슨 기독교 사역을 열심히 하고 하지 않고에 관련된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서 하고계신 큰 그림과 align되어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가깝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며 아주 힘들고 지루한 전도과정을 거치고, 어려운 사람을 말씀으로 돕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나누고,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고…
게다가 말씀 묵상과 기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이런것들 다 열심히 하는데, 과연 이게 missional 한 것일까,
과연 이게 영속하는 가치 (lasting value)에 충실한 삶인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나는 열심히 사는 종교인인걸까.

금년은 코스타 30주년 이었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나름대로 내가 코스타를 섬겼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조금 더 크게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내 고민은 큰데 해답은 멀게 느껴진다.
아마 계속해서 더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어쩌면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고민을 하는 긴장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생각들이 있지만, 일단 이 시리즈의 글은 이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보는게 좋겠다.

자, 이제 컨퍼런스에서 무슨 가르침들이 있었는지 한번 본격적으로 배워봐야겠다.

The Sent – 내 묵상 (14)

Chris Wright은 구약학자이다. 복음주의 구약학자 (Evangelical OT scholar)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개념을 복음주의로 가지고 온 것은 대단히 brilliant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러한 개념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서술했던 것과 같이, 구약시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premise가 달라졌다.
구약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던 반면,
신약은,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그것을 성취하신 시대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일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인건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서두…)

사실 사도행전이나, 기타 서신서에 드러난 신약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기 보다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책을 건성으로 보아서 그런진 몰라도,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차드 헤이스의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를 읽겠다고 작정만하고 읽지 못한지 벌써 몇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와 연관시켜서 좀 더 공부를 해보아야겠다.

The Sent – 내 묵상 (13)

매일성경의 QT 본문이, 요즘 계속 출애굽기이다.

아무래도, 내 관심이 The Sent 와 관련된 생각들에 많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관점으로 이 본문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이번에 출애굽기 말씀 묵상을 하면서, 매우 새롭게 refresh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의 목적이 결국은,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
정결의식, 종교예식, 사회적 질서, 개인적 윤리 등등에 대한 것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려는 것 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너희가 노력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혹은 너희가 노력해서 이집트에서 탈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것도, 광야에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율법을 주고, 싸움에서 이기게 하고, 자식을 낳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이 모든 것은 내가 다 하겠다.
너희는, 너희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도록 하여라.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인격적이신 하나님, 질투하시는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agenda를 관철시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을 공격해가며 종교적 열심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떻게든 이런 이야기가 좀 이 주제를 통해서 풍성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 이제 내 생각을 좀 적당히 정리해 보았으니,
이제는 집회의 설교와 강의 file들을 한번 들으며 배우는 걸 시작해 볼까나… 생각중이다. ^^

아직 한두번 이 주제와 관련된 글을 더 쓸 예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The Sent – 내 묵상(12)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missional함을 회복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key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미움을 버리는 것. 그리고 미움을 회개하는 것.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고 있는 것이 기독교가 지나치게 개인화되어서 공적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수도 있다.
기독교의 윤리가 땅에 떨어져서 욕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신학 때문에 기독교가 어그러져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별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세상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증오와 분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 안에서 기독교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학적으로도,
미라슬라브 볼프의 포용과 배제와 같은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책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어투에는 비꼼과 비난과 미움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볼프의 사상을 우리 상황에 비추어서 신학적으로 좀 더 잘 살펴보는 노력을 하는 것도 매우 가치있는 일일 것 같다.

기독교의 리더들부터,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을 회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그런 미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미움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어 회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로부터 물론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conference에서,
혹은 대중적 기독운동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함께 깊이 회개하는 일이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는 아주 흔한 방법은, 그 백성의 회개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이 다 찼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여전히 관영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 기도를 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크리스천 리더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The Sent – 내 묵상 (11)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크리스천들의 관점이 심하게 polarize 되어 있다.
모두가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비난하고 있다.

코스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매년, 저런 사람이 강사로 온다면 나는 다시 코스타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양쪽 진영에서 모두…)

이건, 코스타로 보면 대단히 큰 challenge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건 코스타의 문제라기 보다는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진보/개혁적인 사람들도, ‘저쪽’ 이야기는 모두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교를 제대로 풀어내면 이것을 통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구령의 열정,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존중,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 등등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좋은 framework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The Sent 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너무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줘버리게되면, 힘들지만 붙들어야하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된다.

지금 20,30대의 청년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미국) 코스타가 거의 유일하다. (arguably)

나는
지금 20,30대의 청년-학생들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이들이, 심하게 polarize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통합적인 복음을 아는 사람들로 자라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대로,
크리스찬들이 나누어져 있으면,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상의 왕되신다는 중요한 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통합되는 것 (에베소서에 나온 것 같이)이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던 벽이 허물어지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것이다.

agenda를 aggressive하게 이루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사랑 (혹은 loving-kindness)의 자세로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세로 말이다.

The Sent – 내 묵상 (10)

영혼구원, 개인전도, 구원영접초청, 회심에의 강조 등등이 과연 ‘총체적인 복음’과는 상충되는 개념일까?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총체적인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위에 언급한 것들은 ‘옛날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을 발견한다.

나는 총제적 복음의 중요성을 분명히 확신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식의 전도 방법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도 완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또한 깊이 동의하는 것은,
소위 ‘good old gospel’ 진영(?)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뜨거운 복음 선포, 영혼구원에 대한 강력한 도전 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총체적 복음은, 그야말로, 총체적이어야 한다.
새롭게 인식하게된 복음의 부족한 부분들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버리지 말아야할 것을 그저 철지난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너무 큰것을 잃게된다.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성경해석의 입장, 역사와 성경과의 관계, 실제적인 어떤 사회 이슈들에대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대단히 불편해할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입장은 그런의미에서, good old gospel만을 주장하는 분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reductionist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왜곡과 오해가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을 피해야한다는 것 동의한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던 것을 깡그리 뒤집어버리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결국 기독교 내에서도 진영논리에의해 나누어져, 보수꼴통과 종북좌파만 남아있는 식이 되면 안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총체적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한쪽의 정치적 신학적 성향을 띄고있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있다.

총체적 복음은,
말 그래도 총체적이어야 한다.

The Sent – 내 묵상 (9)

일상생활에서의 missional함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다보면,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것에 관해서는,
최근에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아주 훌륭한 글을 썼다.
여기 클릭

사실,
10여년 전에,
코스타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몇가지 정리했던 것이 있었다.
그때, 정리한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리고 feedback을 받았었다.

그중,
한국의 이태웅 목사님께서 해주셨던 comment를 잊을 수 없다.

코스타가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참 좋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자칫 자신이 편하게 여기는 상황에 안주하는 것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위에,
내가 링크한 그 글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의 조언이었다.

The Sent – 내 묵상 (8)

적어도 학생-청년들에 관해서는,
Missional 하게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삶 전체를 ‘여정(journey)’로 보지 않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거쳐가는 과정(pathway)’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좀 과장된 예를 들어보자.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해야한다는 온갖 압력과 핍박에 시달리는 ‘교회 누나 / 교회 오빠’들을 보면, 많은 경우, 결혼만 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좋은 가정이라는 목표를 이루기위한 과정으로 생각한다.

신앙의 중요한 장래 목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중요한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현재 신앙활동들이 정리된다.
그리고 그 장래목표를 이루기위한 것 이외에 다른 것들에 쉽게 마음이 가지도 않고 그것들은 ‘부수적인’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다른 것들은 미루어 놓는다.

결혼만 하면 헌신할께요, 졸업하고 나서 성경공부 하죠, 취직만 하면 그때 신앙을 좀 가져볼까요… 식이다.

신앙이 목표에 돌진하기위한 거쳐가는 highway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설정해 놓은 목표들이… 거짓 신앙에 의해 정당화된 자기 욕심들이니…
그 목표에 도달하면 허탈해져서 그 다음 목표를 설정하게 되고…
결국 신기루를 쫓아 매진하며, 부르심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
거짓 신앙에 의해 정당화된 거짓 욕심을 버리도록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highway로 생각하며 달려가고 있는 길 자체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다가 여러가지 아픔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나는.
지금 이 아픔의 과정을 겪어 가면서,
이것을 극복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목적이 되어야 한다. 고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단순화된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해 highway를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해가는 journey 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가지고 창세기 본문을 잘 강해한다거나 하면, 이 부분을 참 잘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출애굽기 같은 것도 이것을 다루기에 꽤 괜찮았을 테고…
신약 서신서에 나타난 신약 공동체의 모습들 속에서도 이런것을 다루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니엘에서도 찾아볼수 있었을 것 같고.

나는 사실,
missional한 이야기를 다루는 첫 step으로써, 코스타가 이 부분에 한해 좀 focus해서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긴 했었다.
그렇게 하면 청년-학생들에게 좀 더 tangible한 방식으로 missional한 으로의 bridge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뭐 그냥 나만 혼자 했던 생각이었다. ^^)

The Sent – 내 묵상 (7)

복음은,
우리에게 목표를 설정하게 해 주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define 해주는가?

몇년전,
코스타 간사 수양회에서 설교했을때, 이런 비유를 쓴 적이 있었다.

축구를 잘 하려면,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차야하는지 하는 것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공을 잘 다루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한 적절한 작전과 기술을 잘 체득하기도 해야한다.

때로,
어떤 보수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개인화해서, 공을 잘 다루는 것만 치중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공을 차곤 하고,
어떤 진보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나치게 탈개인화해서, 공을 차는 방향만을 이야기한채, 다룰줄 모르는 것 같다.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약자에대한 돌봄을 이야기해보자.
나는 성경이 약자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약한사람을 돌보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이 있으니, 그것을 위해서 돌격 앞으로!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약자를 돌보는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공부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직접 나가서 밥을 퍼주고, 돈을 아껴 사람들을 돕고, 국제 구호활동을 지원하고…
우리의 목적을 행해 돌격 앞으로!

이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자세이다.

그런데,
나는 복음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것을 이루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악을 이기시고 세상의 왕이 되신 방법이 무엇이었던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형당하신 것이었다.
바울이 자랑하고자 했던 것은 그래서 십자가였다.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 압력을 행사하고, 데모를 조직하고, 빨간띠를 두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의해 핍박을 당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적어도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모두 포함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것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이야기를 좀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성애 반대 캠페인을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비꼼과 비웃음과 지식을 자랑하는 자세로 한다면, 그 전체가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20여년전, 홍정길 목사님께서 설교중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며 깊이 찔렸던 기억이 난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핏대를 올려 승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취한다.
기독교 승리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은 사랑이다.
복음의 방법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서 진리를 이야기해야한다.
사랑없이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진리를 이야기하지 말아야한다.

결국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함께 파생되어 나오는 겸손, 섬김, 기쁨, 온유함, 희생 등등이다.

나는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missional함을 잃어버린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