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t – 내 묵상 (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신다는 이야기를 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성령’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당연히 삼위 하나님중 한분이신 하나님의 영이 주도해서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하도 치우치게 접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령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신경이 곤두서고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가끔 어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열정적으로 헌신해서 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성령에 이끌리어 살고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경우를 만난다.

내가 적어도 경험하기에,
성령을 가장 깊이 인정하면서 살게하는 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할 때이다.

심한 개인적인 crisis를 겪고 있는 non-Christian에게, 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복음을 전해본적이 있는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믿어지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과 성경공부를 해본적이 있는가?

자기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 돌아서면 바로 신앙 없는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사실 네가 정말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challenge 하며 정말 복음을 깊이 나누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이런 경험들이 있다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서, 발을 동동구르면서, 성령께서 일하시길 기도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께서 그렇게 일하셨을때, 내가 그렇게 많이 노력했음에도, 이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한 일임을 겸손히 고백할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복음전도가 사회참여에 우선한다는 식의 argument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전도의 영역 뿐 아니라, 공적인 신앙의 영역, 그리고 non-religious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 세상을 변혁함, 말씀, 정의를 하수같이, 약자를 위한 섬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보면서)
가끔은…
정말 저 사람들이 그 주도권을 성령님께 드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때가 있다.

missional한 모델을 찾아내는 중요한 작업은,
사도행전과 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 시대에 missional한 자세를 찾아내는 매우 중요한 key가,
성령을 따르는 자세를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는 하는 생각을 한다.

성도 개인 안에서 성도를 이끌어가시는 성령님,
공동체 속에서, 그 공동체의 마음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

뭔가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he Sent – 내 묵상 (5)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분의 창조주 되심, 공의로우심, 완전하심, 자유로우심, ‘타자'(other)되심 등등…다소 철학적, 조직신학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redemption이라는 차원에서도 이걸 풀어갈 수 있다.
죄로인해 깨어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주로도, 그분이 직접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더 성서신학적 접근이 되겠다.

또한,
실제적 접근으로도 이것을 풀어갈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control 하려 할때, 반복해서 messy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개인적, 공적)을 take charge 하셔서 그것을 인도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께 순종할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우리됨’ 혹은 ‘사람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생각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포인트가 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working for the kingdom),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building the kingdom)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자세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document들 속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 코스타의 document나 우리 운동의 방향 속에서도,
그리고 내 삶과 생각과 자세와 글 속에서도…
우리가/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등장한다.

가만히 여기저기를 살펴보라.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은 말꼬리 잡고, expression이 신성모독적이니 그걸 정죄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assumption 자체에 대해 challenge 하고 있는 것이다.)

The Sent – 내 묵상 (4)

내 생각에,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이야기할때,
빠져서는 안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은 그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key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신앙의 공공성인것 같아 보인다.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supporting argument로 하나님의 선교를 차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가 원래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나는 신앙의 공공성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의 사유화될때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의 공공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위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신앙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질때 따라오는 consequence 이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다루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슈는,
신앙의 공공성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흔히 hyper-Calvinist들이 이야기하는 식의 하나님의 주권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hyper-Calvinist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할때,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앙의 공공성은 하나님의 주권 개념으로 부터 파생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방향으로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보냄받은 사람의 ‘원조’인 아브라함도 그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고,
신약의 백성들도 그랬고,
심지어는 예수님도 그랬다.

The Sent – 내 묵상 (3)

나름대로 지난 25년정도 동안,
꽤 많은 ‘청년’들과 성경공부도 하고 전도, 양육, 훈련 하는 일들을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성향이 바뀌는 어떤 시점을 경험했었다.

가령,
성경공부 모임을 한다고 하자. 아니면 청년부 모임도 좋고, 개척교회도 좋다.
하여간 그런 community/gathering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중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reach-out 하겠다는 선한 마음이 그 멤버들 가운데 생겼다고 하자.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생기면, 각각의 사람들이 말씀을 들고 친구에게 갔다.
그리고 사영리를 펴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혹은 밥을 사주면서… 하여간 어떻게든 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일들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reach out에 대한 마음이 생기면….
학생들이, reach out을 위한 프로그램을 모임 안에서 만들고자 하는 것을 발견했다.
혹은 전도를 위한 찬양집회를 계획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reach-out을 하는 프로그램, 이벤트, 조직 등등을 만들어서 그것을 해보고 싶어 했다.

자기가 말씀을 들고 누군가와 나누기보다는,
전도하는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만들자고 목사님에게 리더에게 조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성향이,
이 전 글에서 쓴…
대형교회나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선교단체등의 프로그램에 의해 사람들이 길러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프로그램 자체를 모두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강한 프로그램은 유익이 많다.
그러나, 개인적인 책임을 대부분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비뚤어진 공동체 의식이 아닐까 싶다.

다른 시리즈의 글에서 한번 다루어볼까 생각중이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세는,
유앙겔리온(왕이 태어났다는/승리했다는 선포)을 이야기하거나,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징가랑 태권브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하는 대결에서 누가 쎄냐 뭐 그런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니네보다는 우리 하나님이 더 힘쎄.
니네가 믿는 것 보다는 우리가 믿는게 더 좋아.
뭐 그런.

The Sent – 내 묵상 (2)

내 신앙에 영향을 끼친 분들중에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더 많다.
단순히 그분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학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는 ‘평신도 설교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분들도 있다.

내 평생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를 꼽으라면,
대학교 4학년때, 김인수 교수님이 내가 다니던 대전의 작은 개척교회에 오셔서 하셨던 설교가 top 3 안에 들어간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평신도들이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norm인 것으로 여기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면 큰 blessing이었다.)

후에 코스타를 섬기면서,
‘평신도 설교자’를 찾으려고 참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 평신도 설교자들이…
손봉호-이만열-김인수 교수님 세대 이후에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아래 세대로
강영안 교수님이나 그리고 더 아래로는 장평훈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보다 더 아래세대로는 거의 씨가 말랐다고 느껴졌었다.
(잘 몰라서 그런이유도 크겠지만…)

어쩌다 평신도가 설교한다고 하는걸 들어보면,
자기자랑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수준이었고,
성경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설교자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왜 그런걸까?

꽤 오랜시간 그런 고민을 했었다.
아직도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데…
한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hypothesis는,
50년대생 후반 정도부터는…
신앙 리더들의 신앙이 대학생 선교단체나 대형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길러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예전 사람들은,
말하자면 프로그램, 제자훈련 그런거 없는 상황 속에서,
나름 성경 읽고, 그거 들고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교회에서 교사하고, 그러다가 혼자서 더 성경 연구도 하고… 그렇게 자란 반면,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아래 세대 사람들은,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키워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좋은 resource를 공급받기는 했지만,
그 프로그램을 넘어서 더 성장하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기가 개인으로서 missional하도록 성장하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내 한가지 가설이다.

@ 금년 코스타주제랑 무슨 연관이 있는 얘기냐고 물으실 분들이 있겠지만,
결국 missional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고민이 The sent의 주제와 가장 잘 align된다고 보여 missional 한것에대한 생각을 많이 나누어보려고 생각중이다. ^^

The Sent – 내 묵상 (1)

매년 코스타 주제를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고, 나름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면서 참 큰 유익을 얻었다.

비록 금년에 땡땡이치고 결석하는 불량 코스탄이 되었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른해 만큼 공부하고 묵상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이 유익이 있을 것 같다.

아마도 systematic한 묵상이라기 보다는,
잡생각들의 모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사실 지난번에 인디 컨퍼런스 즈음해서,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보려고 했으나,
적어도 시카고 집회가 끝날때가지 기다렸다가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정리를 좀 미루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아직 시카고와 인디 설교와 강의를 아직 하나도 듣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ㅎㅎ

옛 친구 (2)

이 친구는,
대단히 optimistic 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optimistic할까 신기하다 생각할정도로 그렇다.

젊은 시절에야,
어차피 젊은 혈기로, 누구나 optimistic한 시기를 지내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유난히 더 그랬다.

반면,
나는 예전부터 pessimistic한 성향이 더 컸다.
치밀하게 분석하여서, 늘 worst case에 대해서 대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는, optimistic한 대신 별로 치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빈틈이 많지만, 매우 과감한 추진력을 가진다. 내가 보기엔 무모해보인다고 생각되는 것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척척 해낸다.

반면,
나는 실수는 적지만,
많이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망설이곤 한다.

이 친구는,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일에 involve 되어서 테네시쪽에 그 책임자로 금년부터 와 있게 되었다.

이번에 만나서도,
결국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아… 그랬지…. 이래서 나는 이 친구와 함께 하는걸 참 좋아했지…
하는 것이 다시 remind 되었다.

내가,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내 고민을 이야기하고,
변혁되지 않는 세상속에서 느끼는 좌절을 이야기하는데…

이 친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고민을 그냥 올킬해버리는 것이었다.

직장 내에서 교묘하게 얽혀있는 알력다툼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변하지 않는 system 속에서 integrity를 지키면서도 survive 하는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25년전에 함께 이야기했던 세상을 변혁하는 기독교라는 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만 이 친구는,
자기는 그런 교묘한 알력다툼 속에서,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를 다 까고 보여준단다.
그리고 직장 상사에게 늘 직언을 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그래서 잘 되면 좋은 거고.
허억…

나는,
과연 내가 하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변혁을 꿈꾸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복잡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냥 이 친구는… 이게 될까 되지 않을까를 많이 고민하지 않고, 그냥 덤덤하고 투명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것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삶의 상황에 대하여 분석적 비판적으로 보기 보다는,
진취적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잘 하시겠느냐…
뭐 그런 식의 믿음이라고나 할까.

오랜만에,
이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옛날에 이 친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게 자연스럽게 전염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신뢰,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삶의 자세 등등이 다시 remind 되었다.

참 감사했다.

이 친구가 앞으로 몇년은 테네시에 더 있을 것 같다는데…
좀 더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주말의 짦은 대화는,
아마 내 삶의 자세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변화의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옛 친구 (1)

대학때와 대학원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하나가 금요일 밤 늦게 text를 보냈다.

이 친구는,
내가 대학 4학년때와 한국에서의 대학원 시절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캠퍼스주변을 조깅하고,
함께 QT를 하고,
아침을 함께 먹고,
각자 실험실로 일하러 갔다.

그리고 밤 늦게,
다시 만나서 하루가 어땠는지를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나누었다.

석사 1년차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 친구와 내 마음을 막 흔드셔서,
대학 신입생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주셨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기숙사를 방마다 다니며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신입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중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모아서 우리끼리 성경공부를 시작했었다.
(지금도 나는 비교적 introvert 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introvert 였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거의 terrifying한 것이었는데, 그런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같은 교회에서 청년부를 함께 섬겼고,
함께 성가대를 섬겼고,
함께 지체부자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했었다.

주말에 마음이 맞으면,
몇명이 함께 누군가의 기숙사 방에 모여,
새우깡 한봉지와 물을 떠넣고 먹으며,
함께 기타를 치며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밤새워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두명이 쓰는 기숙사 방에, 7-8명의 남자들이, 발냄새 풍기며 모여 앉아서, 그렇게 함께 우리 삶을 나누었다.

이 친구가 여름에 단기선교를 간다고 해서,
내가 가진 돈을 톨톨 털어 그 단기선교 가는것에 다 주는 바람에,
나는 한달여동안 거지로 살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유학생시절,
이 친구는 내게, 힘들면 이야기해라. 내가 여기서 돈 모아서 보내줄께.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이 친구도 일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겨우 두시간 남짓 만나서 잠깐 이야기한 정도 였지만…

참 반갑고 좋았다.

Hopeful

어제 밤,
참 오랜만에 코스타 관련해서 꽤 긴 conference call을 했다.

동부에 계신 분들은 2AM 넘어서까지 해야했고,
이걸 organize한 JK는 멘탈이 초토화된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었지만…

나는 conference call을 마치고 참 감사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다.

뭔가 한줄기 빛이 쭈욱~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감사했다.
그리고 참 감사했다.

교육

민우가 이제 11학년에 올라가게 된다.
슬슬 대학가는 준비를 해야하는 시기인데,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대학들에 대하여 좀 ‘공부’를 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것은,
학교마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교육방침이 있고, 인간상이 있고, 그것에 맞추어서 커리큘럼등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학교는, 4년내내 학생들이 거의 자유롭게 아무거나 들을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어떤 학교는, 그 학교 출신이라면 공유해야하는 내용을 core로 두고 requirement 두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 살면서, 나름대로 여러 학교들 출신들을 다양하게 만나면서 지내고 있는데,
어떤 학교 출신들이 이렇다 라고 모두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학교가 제공하는 내용을 참 잘 소화하여 그 학교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공부한 학교들 (한국과 미국)을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보면,
나와 잘 맞는 학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상에 내가 부합되지도 않는 것 같다.

만일, 내게, 조금 더 다른 교육의 option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쩌면 이렇게 엔지니어를 하고있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전공을 한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이 전공이 나와 딱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걸 거지고 박사까지 받고 여태껏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고 있다.

민우는,
전반적으로는 liberal art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수학이나 과학을 뭐 잘하는 수준으로 하기는 하지만,
책읽고, 쓰고, 사색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리고 공학쪽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순수과학쪽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민우가 그런 관심을 갖는 것이 반갑고 감사하긴 하지만,
우리 부부가 그런 쪽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기가 어렵기도 하다.

민우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
내가 해주지 말아야 하는 것의 경계가 늘 모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