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 Paradox

2020년 부활절.
대단히 당황스러웠다.
부활절이 되었는데 다들 교회 예배당에 갈 수 없었다.
온 세계가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안드레아 보첼리가 밀라노의 텅빈 교회당 앞 광장에서 Amazing Grace를 불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Amazing Grace의 마지막 구절,
I was blind but now I see. (나는 앞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본다)을 아주 멋지게 불렀다.

나는 그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부활절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텅빈 광장, 텅빈 예배당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제는 보게되었다는 찬송을 부르는 것.

은혜

나는 교회에서 2014년, 2015년생들 (7-8살) 아이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부활절에게 나름대로 꽤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부활절이라는 늘 있지 않은 기회를 활용해서, 아직 아이들이 어리긴 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면서,
우선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무조건 제 1순이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교회란 따뜻하고 즐거운 장소라는 인상이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렇지만 한 두어달에 한번씩은 약간 더 아이들에게 좀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얼마나 그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은혜’라는 개념을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방적이면서도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의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좀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도 꽤 어렵다.

은혜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여러가지 이야기도 다 해준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이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해보면,
여전히 우리가 착해야한다…는 식의 대답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도 아이들에게 은혜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해준 후에,
과연 나는 그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성 금요일

적어도 지난 30여년 동안은,
고난주간이면 어떻게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더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을 해왔었다.

주로 많이 했던 것은,
고난 주간 내내 오전 금식을 하고 금요일 하루 금식을 하면서 식사시간에 대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
그리고 하루 종일 십자가와 관련된 찬송가를 많이 듣고 부르는 것.

예전에 너무 직장일로 바쁘던때에,
점심을 굶고는 대신 그 시간에 주차장에 있는 차에 혼자 가서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다가,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 사랑이 넘치도록 마음에 느껴져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던 적도 있었다.

일주일 내내 금식도 하고 묵상도 했는데
아무런 감동도 없고 그냥 dry하게 지내다가,
그 부활주일 아침에 갑자기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는 것이 마음에 확~ 다가오면서 미친듯이 기뻐하고 좋아했던 경험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도 하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그저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냥 지나간적도 많이 있었다.

올해는 갑자기 월요일부터 어제까지 출장을 가는 바람에 많이 집중해서 고난주간 묵상을 잘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번주간에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생각보다 내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사는 삶으로부터 많이 떠나와 있었다는 것.
나름 열심히 예수님 잘 믿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음에도, 이렇게 쉽게 그 본질로부터 내 신앙의 기반이 drift away해갈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정말 오늘 하루,
더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려 볼 작정이다.
제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게 해주십시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눈물이 그렁그렁했을 베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다 나온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현장은 사실 베드로가 혼자서 몰래 간 것이므로 베드로밖에는 몰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사람들에게 그랬을 거다. 그때 내가 우리 주님을 모른다고 사람들에게 그랬어. 내가 바로 이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했어…

십자가앞에서는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내려놓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떠벌이기 전에,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십자가 앞에 선 부끄러운 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통 당했나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그 십자가를 보며 많이 가슴아파하며 우는 것이 있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기쁨이 온전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 이런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십자가에서의 눈물 없이 기쁨 없다.

정말…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영광

영광이라는 히브리어인 ‘카보드’는 글자그대로는 ‘무게'(weight)을 의미한다고 한다.

도대체 영광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싶어서 CS Lewis의 The Weight of Glory 라는 글을 읽어보기도 하였다.
한편 그분의 그 글이 좀 어렵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거기서 이야기하는대로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notice 하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에는 다소 실망을 한적이 있었다.

또 예전에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이야기도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는 많이 속상했던 기억이있다.
아니, 목사님이신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고요?

어제 우리 교회 소그룹모임 (겨자씨 모임)에서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것을 ‘하나님의 존재감’이라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의 존재감.

하나님의 존재감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큼 극렬하게 나타난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결국,
나는 하나님의 그 강렬한 존재감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Business trip!

기록을 보니, 2020년 1월에 내가 중국에 갔었다.
COVID-19이 우한에서 퍼지고 있다는 뉴스를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들었었고,
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상하이와 북경에서 한주를 보냈다.

그리고나서 2020년 2월에 Anaheim에 3일간 business trip을 갔다.

그후로 2년 넘게 business trip을 한번도 가지 못했다.
이제 다음주 월요일에 정말 오랜만에 business trip을 가게 되었다.
이젠 조금씩 뭐가 다시 시작되는건가 싶기도 하고.

아직 외국으로 가는 것은 나라마다 제약이 좀 있어서,
우선은 미국 내에서 가는 것으로 다시 business trip 시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이 다닐때는 1년에 한달에 한번꼴로 유럽이나 아시아를 다녀오곤 했었는데,
당장 그렇게 다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점점 그렇게 business trip을 조금씩 더 다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별로 business trip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워낙 오랜만에 가는 것이어서, 살짝 좀 설레는 마음도 있다.

정말, 조금씩 이렇게 뭔가 다시 돌아가는 건가…

한가지 생각

어제 아침에 조깅하다가 든 생각.

내 신앙에 진보가 없거나, 혹은 퇴보가 있을때…
나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이상 생생하지 않다.”

그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그러들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사그러 버렸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계속 열려있는 사람이 되기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열려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것에 제한되지 않고, 그래서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그냥 겸손하자고 결심하면 될 것 같은데,
겸손이라는게 결심으로 잘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내게 그래도 어느정도 효과가 있는 방법은,
계속해서 배우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면, 심지어는 처음에 그것이 불편하다 하더라도 내 관점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더 열심히 배워야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ㅠㅠ
진짜 요한복음은 만만치않다. 이런 엄청난 선언들이, 그냥 아무렇지도않게 툭툭 던져지고 있으니, 참 어렵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을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내가 말로 잘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그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그 경험을 이야기할수는 있을 것 같다.
그 경험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아주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겠지.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냥 그 사랑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다가…
마음이 무너져내리며 울었던 경험들이 있다.

그렇게 조금 더 예수님의 사랑에 내가 더 깊이 잠기게되면,
조금 더 내게서 그 사랑이 현상적으로 나왔던 경험들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desperately…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