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일을 하는 이유?

우리 회사에서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start-up company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있는 Power Film 이라는 회사가 투자를 주로 많이 하고… 이 일을 주도했던 group member들이 참여해서 회사를 하나 만들고, 그 회사가 HP와 계약을 맺어서 HP에서 개발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일을 하려고 한다.

지난 화요일에는, 우리 Lab director가 현재까지 협상과정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정리를 하자면, 그리 썩 잘되고 있지 못하다.
HP 에서는, licensing 계약을 맺는데… 가능하면 새로 만드는 회사에 높은 로열티를 부과함으로써 HP의 수익을 극대화 하려고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인 새로운 회사는 그 로열티를 낮게 잡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순조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 lab director로부터 들은 것에 따르면, HP에서는 사실 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HP에서 요구하는 대로 만일 협상을 성사시키면, 새로 만드는 회사는 거의 5년 정도안에 망하게 되어 있다. -.-; 어떤 의미에서 HP는 자신들의 회사 내에서 개발한 기술이 성공하는 일들을 보기보다는, 당장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물론 모든 사업 협상이라는게, 쉽게 되는게 있을리가 없지만… 그리고 이 협상 과정 전체가 아주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이번 update는 다소 듣기에 불편했다.

나는 가민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이 회사를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가…

몇가지 이유 때문이다.

1. 나는 새로운 회사가 만들어 지면서 그곳에서 함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인 우리 lab director가 지난 화요일에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이 일을 함으로써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재미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을 내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충실하게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고, 이웃을 섬기며 그 안에서 우리가 보람을 얻는 것이다.

2. 처음 우리 manager와 이 회사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던 stage에서 내가 우리 manager에게 …  나는 ‘사람’과 ‘기술’ 이 두가지 가치 때문에 나는 이 일에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business를 돈버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함께 하는 기술 개발을 함께 하며 보람을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나누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인 우리 manager를 비롯해서 우리 그룹의 멤버들은 대부분 적어도 일정부분 이 가치들에 동의하고 있다.

3. 현재 한국과 미국 전반적으로 decline 하고 있는 physical science research 분야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일할 수 있는 형태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싶었다. 당장은 활력을 잃고 있는 HP Labs의 physical science 분야의 연구원들에게도 plausible한 exit strategy를 setup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이 생각들이 모두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 일을 주도해서 추진하고 있는 우리 lab director로부터 많은 influence를 받았고, 나도 그 가치들에 contribute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보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HP와의 협상 과정에서…
이런 난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꽤 해볼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나도 내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겸손하게…. 성실하게… 그렇게 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화살기도

천주교에서 많이 practice 한다는
‘화살기도’를 요즘 꽤 많이 하게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본적인 감사나 찬양의 기도 이외에,
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해야 할때나, 어려운 충고를 해야 할때, 내 감정을 추스려야 할때 등등에 활용을 하곤 하는데… 이게 정말 꽤 괜찮다.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나서 흥분했던 20년전,
하루 종일 이런 기도 속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길을 걸으면서도 감사와 찬양, 간구와 회개의 수많은 기도들을 쏟아내며…

이런 짧은 기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가깝게 알게되는 듯 하다.

거시적인 관점에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

지난주에는 산타 바바라에 살고 있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우리 동네를 찾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우리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더이상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기 때문에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 다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 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나는 코스타등에서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 동역자의 말은, 자신도 10년전의 network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좀 더 update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바로 이어진 대화는… 지난 10년정도 동안 과연 새로운 network이 형성될 정도로 학생운동 / 신앙운동의 infrastructure가 성장하고 성숙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했던 80-90년대가,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 아니었겠느냐. 이제는 계속해서 decline 해가는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 아니겠느냐…
따라서 10년전의 network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network이 아니겠느냐…
하는 다소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생각의 나눔이 철저하게 틀렸길 바란다.

그후…
여러가지 생각들이 마음에서 떠돈다.
정말 이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기, 해야 할 말을 하기

해야 할 말을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비교해 보자면…

1. 어떤 것이 더 힘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2.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것이 더 큰 damage를 만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3. 했을때 더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4. 성숙함을 잴 수 있는 더 좋은 잣대는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

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20대와 30대에는, 해야할 말을 하는 데 내 성숙의 기준을 맞추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점점 해야할 말을 하지 않을 줄 아는 것이 내 성숙을 판단하는 더 좋은 기준임을 깨닫는다.

나의 성숙함은 왜 이리도 더딘 것일까…

블로깅

블로그에 글을 계속 쓰다보니,
내 생각을 정리할 곳이 있어서 좋고, 나를 care 하는 사람들이 나에대한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참 괜찮다.

나는 늘 생각이 얕고, 철안든 강아지 같이 번잡스러운데, 이렇게 하니까 내 자신을 비추어 보게도 되고,
내가 글을 쓴는 방식이나 말을 하는 방식의 한계도 보게되고,
여러가지로 배우게 된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내 블로그에는 누가 들어오는거야?
하루에 방문자가 50-60명 많으면 70명이 넘기도 하는데…
내가 하루에 2-3번 들어오니까, 그거 빼면 나머지는 누굴까. 흠…

생각을 흔들어 놓기

불과 2년 전 정도까지…
나는 잘못된 신앙의 태도와 노선을, 무지의 결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이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람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 일을 하려고 참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하고, 그쪽에서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좌절이나 혼란에 빠지게도 되는 일들을 보았다.  장기적으로 그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되어 결국 올바른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일들을 내가 목격한 적도 있었고, 그 끝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과의 연락이 끊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열망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의 기반을 흔들었을때 붙들 수 있는 무엇이 바로 가까이 있지 않은 상태일때에는… 그 사람의 기반을 심하게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대안이 될만한 가치체계가 가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새로운 대안을 취할 능력/여력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원래의 잘못된 기반을 심하게 흔드는 것은 자칫 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잘못된 기반에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있을 때에는 (정서적, 감정적 뿌리를 포함해서)
그 기반을 차라리 놓아두는 것이 최소한 잠정적으로는 올바른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내 자신을 define 하듯…
“변절한 이상주의자”의 궤변인걸까…

말을 줄이기

나는, 정말 너무 말이 많다. 정말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잘 듣지 못하고, 듣는 일에 둔하다.
그러다보니 말 실수도 많고.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갈길이 멀다.

말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몇가지 생각해 보았다.

1. 나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
듣는 사람이 어떻든지 간에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한다는 desire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생각이다.

2. 다른이들의 말과 생각에 비해 나의말과 생각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만함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과는 정 반대의 idea 이다. 나의 짧고 얕은 생각의 결과에 흥분한 나머지 다른 이들의 깊고 풍성한 생각, 혹은 더 깊은 실존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3. 다른이들로하여금 나를 accept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일종의 열등감과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insignificant 해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를 드러내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있게 되는 듯 하다.

또 뭐가 있을까.

Being Bossy

내가 어떤 사람을 나의 boss로 인정하지 않는데,
그 사람이 네게 boss로 행동하면, 그 관계는 참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기도 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있고…
그리고 물론, 더 큰 문제는… 내가 심하게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boss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내게 있지 않나 싶다.
어떤때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그 사람에 대한 친절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는 그 사람의 사사로운 것에 참견을 한다거나 그 사람이 이미 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참견을 한더거나… 등의 일들을 벌이게 된다.

이 고통을 가장 심하게 당하는 사람은 물론 내 아내이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Narcissism

나는 매우 자주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머리 속에 잠깐 스쳐간 ‘멋진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오래 기억하여 내가 마치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반면,
내 머리 속에 늘 남아 있는 ‘추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쉽게 잊어버린다.

자신 스스로를 지나치게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때 내게 다가오는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을 한번 곱씹어본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이러한 ‘narcissism’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을까?
때로 다른이의 눈을 통해서 본 내가 더 정확할 때가 있을텐데.

신앙의 성숙을 잴 수 있는 여러가지 척도 가운데,
이러한 narcissism으로부터의 탈피도 중요한 척도인 듯 하다.
‘자기 비하’나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낮아짐이 아닌,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경지.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한 말에는… 정말…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마치 바이러스를 옮기듯 복음을 옮기고 다니고,
마치 gossip을 하듯 복음을 소개하고,
마치 독사에 물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뛰는 사람과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마치 공기중의 산소를 호흡하며 살듯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언제 다시 그런 사람들이 이땅을 어지럽게 하는 일들을 보게 될 것인가.
오늘 저녁 Stanford KCF에서 있을 일들을 위해… 내 마음을 찢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