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n Ideal Life

세상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나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삶의 영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의 어그러짐은 그래도 둔채, 내 삶의 영역에 한해서만 “justice”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늘 내게 공평하지 못하고,
왜 내게 이런일이 라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의 일부를, 내 삶으로 embrace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너무 쉽게 내 삶의 영역의 어그러진 부분을 곧게 펴보려는 시도는,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품고 사는 삶…..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기

고등학교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다.
게다가 과학고등학교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사춘기 후반부를 보냈다.

내가 과학고에 다닐 때에는, 물론 그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 이외에도 ‘별난 아이들’, 혹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고에 들어가는것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지금같으면, 나는 절대로 과학고에 못들어 갔을 것 같다. ^^)

일반학교에 갔더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묻혀버릴만 한 애들이, 과학고라는 독특한 환경에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우리학년 60명중 80% 정도가… IQ 155 이상이었고…
어찌보면 약간 ‘싸이코’ 들이 모여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학고 아이들만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농담, 생각 체계 등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전국에 4개 밖에 없는 과학고에서 비슷한 애들이 대학에 모였고,
소위 ‘일반고’ 애들도 그런 분위기에 흡수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야말로 out of nowhere에 딱 학교 하나 있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당구를 치기 위해서 금요일 밤에, 동네의 경운기를 타고 유성까지 나갔던 기억도 있다. -.-;)
일반적인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은 별로 없었는데,
대신 정말 ‘독특한’ 문화를 참 많이 경험했었다.

그야말로, 과기대 (그 당시에는 KIT 였다. 한국과학기술대학) 애들만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리, 언어들에 더 익숙해져갔다.

그 이후,
대학원 역시 그랬고,
그 이후 2년+의 직장생활도 그 연속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었으니,
NERD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화와 생각 밖의… ‘정상적인 보통사람’의 논리와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더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었던 충고들 가운데 가장 날카롭다고 느꼈던 것은,
‘너는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은줄 안다’ 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NERD들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학부를 마친 내 아내 조차도,
내가 ‘극단적인 공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이런 background가,
때로는 내게 도움과 힘이 되기도하지만,
많은 경우 내 생각의 체계 안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하는 것 같다. 

언어 뒤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던가,
특정한 생각의 흐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람,
혹은 다소 치우쳐 보이는 사상이나 믿음의 이야기에 ‘올인’해서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대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매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극단적으로 위와 같은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선호와 기호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사람의 언어 뒤에 자리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필요와 생각, 고민과 갈등을 알아내는 일이,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유난히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삶의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유난히 세속적 성공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과 관련된 상처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대해 논리적 반박을 늘어놓는 일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치우친) 논리 뒤로 도망가 숨어버리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때,
superficial하게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고,
오래 참고,
그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면 참 좋겠는데…
나는 그게 참 어렵다. 
너무나도 성숙이 답답하도록 더디다. 

겸손이라는 ‘테크닉’

겸손이라는 성품만큼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덕목(virtue)가 많지 않는 것 같다.
진실하게 겸손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런의미에서,
겸손이라는 ‘테크닉’을 완전히 마스터할 수만 있다면,
소위 ‘처세술’, ‘용인술’, ‘화술’, ‘대화술’등의 기술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겸손’은 거짓으로 꾸며내기 가장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이다.

섣부르게 가장한 겸손은,
오히려 거부감만을 불러일으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로 시작하는 빌립보서 2장 5절 이후의 본문은,
낮아짐과 겸손함의 basis가, 처세술이나 대화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멋진 구절인 것 같다.

싸워야 할 적, 도움을 얻어야할 동지

가끔은,
아니 솔직하게는 매우 자주…

도움을 얻어 함께 해야할 ‘동지’를, 맞서 싸워야할 적으로 잘 못 설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싸워야할 대상을 동지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되면,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사명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는 그것을 삼켜나가는 것 같은 일이다.

사탄이 매우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속임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지랖 넓은 사람의 어리석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많아,
늘 바쁘다.
그리고 자주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나라도 때워야 하겠다며 달려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요즘 깊이하고 있다.

자주 나는 그것을 passion이라고 착각해왔으나,
그저 어리석게 오지랖 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control-freak으로, 내가 control을 잡고 있으려는 악한 생각에 근저에 깔려있을 수도 있다.

다른 이의 짐을 져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다른 이의 일을 해주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은… 악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 탓이오

내가 관심을 가지고 follow 하는 사람들의 한계(?)일까.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 발언에 대해 분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twit 들을 만난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중 대다수는, 이런 입장을 취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조용기 목사님의 언급을 비판한다. (물론 나도 그렇고. ^^)

그런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는 정말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기 목사님을 까대는 의도에는,
1. 나는 그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2. 기독교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대표되지 않는 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3. 평소 조용기 목사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차에 이 기회를 빌어 마구 욕하고 싶어하는 마음

등등이 섞여 있지 않나 싶다.
내게도  역시 그 세가지가 모두 함께 있고.

그러나,
어쩌면 정말 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하는 자세는,
나도 조용기 목사님과 다르지 않다.
나도 조용기 목사님이 믿는 다고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을 믿고 있다.
나도  같은 기독교인이다.
라는 시작점에서 시작해서,
엎드려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나,
그런 기독교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는 다른 기독교인의 모습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조용기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 처럼,
일본인들이 당한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라고 전혀 믿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 분노가 표출되는 것을 보며… 섬찟한 느낌을 또한 갖게된다.

Would I….?

Fuller Seminary에서,
Stanley Hauerwas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강연의 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다.
미주뉴스앤조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 찾은 것이었다.
(그의 책, Hannah’s child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

몹시 피곤한데도, 자정이 넘도록 그 강연의 상당 부분을 앉아서 들었다.

매우 심한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내와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title은,
그러한 고통속에서 잉태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보배가 삶에는 분명 있는 듯 하다.
만일, Hauerwas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때, 하나님께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의 파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며 그 고통을 미리 알려주었다면 그는 그 고통의 길을 택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고통의 길을 통해서만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런 고통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런 속에서 일하시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저 놀랍기만하다.

When Christianity is assumed to be an “answer” that makes the world intelligible, it reflects an accommodated church committed to assuring Christians that the way things are is the way things have to be. Such answers cannot help but turn Christianity into an explanation. For me, learning to be a Christian has meant learning to live without answers. Indeed, to learn to live in this way is what makes being a Christian so wonderful. Faith is but a name for learning how to go on without knowing the answers. That is to put the matter too simply, but at least such a claim might suggest why I find that being a Christian, makes life so damned interesting.
– Stanley Hauerwas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할 때에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 되는데,

내가 여러가지로 건강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에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15% 쯤 하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약 85% 쯤 하고 있다.

KOSTA 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약 5% 쯤 하는 것 같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95% 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나가 되면 제일 좋겠지만,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듯.

하고 싶은 일보다 몇배나 많은 해야하는 일들을 해나가며,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일이…
하고 싶은 일에 탐닉하며 얻는 shallow한 것보다 훨씬 더 joyful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