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기독교 단체의 횡보

어떻게 된 것인지,
최근에는 대통령을 위한 기도 연대 라는 정체불명의 유사기독교 (pseudo-Christian) 단체가 내게 계속 이메일을 보내오고 있다.

내용을 보면,
극우의 정치 단체이지 결코 기독교적인 정신을 찾아 보기 어려웠다.

내용들을 보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대통령이 있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다”
“오만 방자한 이회창은 정계를 사퇴하라”
“스쿠크법은 한국을 점령하려는 이슬람의 음모이다”
등등의 이야기이다.

내용이 대부분 너무나도 쓰레기 같은 수준이어서,
읽어 내려갈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약간 시간을 내어서 읽어보니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의 말들이 많았다.
그들의 주장중에 많은 것에.. wikipedia에서 쓰는 것 처럼 [citation needed] 라고 꼬리표를 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겼었다.

그래서,
그 이메일을 보내고 있는 곳에 다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1천 2백만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오만 방자한 이회창씨를 심판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 이름에서 빼달라.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을 기뻐하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의 주장이 복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의 영광은, 권력을 가지고, 이익집단/압력단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섬기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께서 만일 이 시대에 살고 계시다면, 너희들 힘을 합쳐서 이익집단으로 행동해라 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들과 같은 유사기독교(pseudo-Christianity) 단체들과 내가 동일시되고 싶지 않다.
제발 내 이메일 주소로 이런 이메일을 더 이상 보내지 말아달라.

…

물론,
수차례 그렇게 이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spam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부탁을 했음에도,
여전히 그분들은 내 이메일 주소로 계속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에 덧붙이는 JP님에게 드리는 답글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글에 대해서 JP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을 이곳에 그냥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리해서 써봅니다.
kosta facebook page에서도 Jekyung Lee 라는 분이 댓글을 써 주셨는데, JP 님과 비슷한 입장인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

JP 님,
깊이가 없는 글들을 그렇게 자주 읽어주신다니 참 많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과 생각을 올려주셔서 저로선 참 감사하고요.
가까이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겠습니다만…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배우는 것은 저로선 참 즐거운 일입니다. ^^

자칫 제가 쓴 글이,
다시 읽어보니,
그리고 쓰신 덧글을 보니,
총체적(holistic) 복음의 입장이 아닌, 영혼구원이외에 다른 것들을 폄하하는 것 처럼 비추어질 수 있었겠다 싶군요.

독자들이,
이미 저와 여러가지 형태로 교분이 있는 사람들인 것을 가정해서 이 블로그의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앞으론 좀 더 글쓰기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JP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이땅에서의 소망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초월적, 내세적 구원만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포기하며 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다만,
제가 이 글에서 쓴 context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은 지금 아래 쓴 것과 같은 상황을 머리속에 상상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다가 원래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가령,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해서 노숙자가 된 어떤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사랑하는 아내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해 버렸고, 중학생이었던 아들 하나는 친척집에 부탁했는데, 얼마전 그나마도 가출을 해서 행망이 묘연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정서적, 정신적, 육체적…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총체적 복음”이라는 성경공부를 막 마치고 온, 연봉 20만불의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compassion’을 가지고 다가가서, 예수의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라면서 힘을 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고, 예수는 당신과 같이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나그네된 삶을 살면서 영원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고, 우리의 영혼이 이미 구원얻은 것에 함께 감사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아주 generous하게 1천불짜리 수표를 한장 써주고 갔습니다. 기도하겠다는 말도 함께 하면서요.

그냥 순전히 ‘요소(element)’로만 보면요, 이 젊은 변호사는 총체적 복음이 이야기하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영혼구원에 대한것도 다루었고요, 전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담론도 다루었고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금전적인 도움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요,
막상 그 노숙자는,
너무나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망가져서, 그 젊은 변호사가 한 이야기가 전혀 머리속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1천불이라는 큰 액수의 check도 어떻게 써야하는 지도 모르는채, 흐지부지 며칠만에 탕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약자’인 그 노숙자에게, ‘강자’인 그 젊은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총체적 복음의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멋진 사역을 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이 했던 일은 자신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요건’들을 적어놓은 check list에 check-off 한 것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변호사는, 그렇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노숙자의 상황에 대해 피상적 접근밖에 할 수 없었고, 정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무엇이라도 할 힘과 용기를 찾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전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막 그 삶을 벗어나 동네 목공소 견습생으로 일하는 어떤 청년 한 사람이 그 노숙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견습생은, 노숙자에게 다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노숙자의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함께 울었습니다.
한 30분을 그렇게 흐느끼며 울었지만, 그 견습생은 자신이 그 노숙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이 안타까워서 더 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함께 울고는, 눈물로 그 노숙자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안된다고… 바로 2달전까지 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는데…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소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노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힘내는데 나도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에게 무료로 직업훈련을 시켜주는 훈련센터가 있는데, 거기 왕복할 수 있는 버스값을 자기가 돈을 아껴서 조금 도와주겠노라고.

노숙자는 그렇게 힘을 내고 기운을 차려서, 그 견습생의 도움을 얻어 직업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늦은 시간이면 그 견습생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기도를 하기도 했고요.
조금씩 자신이 힘과 자신감을 되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요,
결국 그 노숙자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총체적복음의 요소들’ 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견습생을 통해서 공급된 하나님의 은혜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은혜의 중요한 요소는,
Extra Nos (outside of us) 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없는 것이 밖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도의 도움이나, 실제적인 경제적 도움이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변호사도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인간적인)’ 제도의 도움이나 경제적 도움이 궁극적 해결이라기 보다는,
결국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Extra Nos)가 궁극적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약자를 돕고 섬겨야 하지만,
그들이 결국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자유롭게 흘러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로부터 혹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혹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유사 복음 (pseudo Gospel)에 몰입된채 자기만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위에서 언급한 젊은 변호사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도 아니고, 20만불을 벌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

제 고민과 생각이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 허술한 생각과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comment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JP님께 쓰는 답글의 형식으로,
저도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글을 써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빈구멍이 많을 줄 압니다. 계속 좋은 comment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

아니, 왜 이렇게 들들 볶으시는 겁니까!

박사과정 중에…
정말 일이 잘 안풀릴때…
도대체 왜 이렇게도 나를 들들 볶으시는거냐고 하나님께 참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보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딴지를 거시느냐고.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마음의 깊은 계곡에까지 내려가게 하시고서는…
그곳에서 나를 만나주시는 경험을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려움, 좌절, 고난, 아픔, 절망, 실망, 안타까움, 두려움등등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설교 시리즈

나는 설교를 전문적으로 하는 설교가는 물론 아니고,
안수를 받은 목사님은 더더욱 아니지만…

가끔 한번씩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책을 읽다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다가, 아니면 그저 혼자서 조깅을 하다가…
3주짜리, 6주짜리, 혹은 10주짜리 설교 시리즈 같은 것이 한꺼번에 떠오를때가 있다.
처음 그런 urge를 느꼈던 것은 아마 97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아주 가끔은, 그런 inspiration이 너무 몰려들어와서…
나도 주체를 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처음 그런 urge를 느꼈을때는, 혼자서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혼자 말씀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말씀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했고.

사실 지난달 말경에 그런 시기를 지냈었다.

예전같으면 떠오른 생각들을 정신없이 적어두기도 하고,
얼른 책이나 성경을 펴서 내용을 refine하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그저 “let it go”를 해보기로 작정 했었다.

그런 강한 ‘urge’를 느낄 때, 그것을 가지고 꼭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겠다고 작정하는 내 모습이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것을 그저 let go 할때 내게 어떤 변화가 오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 ‘내용’은 머리에 남았는데…
그 ‘뜨거움’은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이게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갈라디아서 2장 묵상

요즘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2장을 연구하고, 묵상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내 마음에 두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있는 장이어서 특별히 마음을 많이 쏟아 본문을 보게 되었는데…

바울이 자신의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그리고 ‘새로운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잘 비교가 되었다.

New Perspective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는냐를 떠나서,
예수 이전의 바울 자신과 예수 이후의 바울에 대한 명확한 대비가 나타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비판을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옛 모습’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기도 한 것이었다.

비판이 힘이 있으려면,
그 비판이 자신의 아픈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아픈 고백을 바탕으로 터져나온,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고백이 바로
갈라디아서 2:20 이 아닐까 싶다.

갈라디아서 2:20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글 재주가 짧아.. 그 말씀을 읽으면서 다가왔던 충격과 감동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엘리야와 엘리사

20대에는,
나를 끊임없이 점검해주고, 나를 보살펴주는 선배가 없는 것이 정말 눈물나도록 서럽고 힘든 때가 많았다.
복음에 눈을 떠서 가슴이 뜨겁긴 한데, 이것을 어떻게 handle해야 하는지 내게 일러주는 이가 주변에 별로 없었다.
물론 일반적인 조언과 가르침은 풍성하게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내가 ‘멘토’로 생각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책을 읽기도 하고, 어쩌다 한번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워보려고 갖은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엘리사가되어, 엘리야와 같은 선배를 따르고 싶은 열망이었다.

30대에는,
그런 그림들을 대충 포기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므로,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공급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40대가 되어서는,
내가 엘리야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커진다.
물론 아직 내가 성숙하고 성장해야하는 부분이 산더미 같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20대와 30대에 경험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전수해주어야한다는 부담감과… 어찌보면 건강하지 못하게 보이기까지하는 절박함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아직 내가 엘리야와 같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전수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self-evaluation이 명확함에도,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간다.

예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토록 하나님 안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10년 가까이 delay 시켜가면서 나를 준비시켰던 경험을 하게 하셨었다. 내가 아무리 가슴이 터져라 하고 싶은데도… 너는 아직 때가 아니다 하시며 나를 주저앉히셨었다.
40대 초반에 이런 간절함이 커져가는 것을 보아, 아마 50대가 되어서는 정말 후배들에게 무엇인가 해줄 말이 있는 사람으로 (그것이 꼭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가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소망을 가져본다.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어제 글에서도 짧게 썼지만,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약자를 향한 compassion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생존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대비시켜 보면 이들은 참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위 ‘개혁적’ 젊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는,
약자들 (사회적 약자 뿐 아니라, 정서적, 신체적, 영적, 경제적 약자들을 모두 포함)을 향해…
기운을 내, 우리가 함께 하고 있잖아, 저기 고지가 보이잖아…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자주 발견한다. (나도 매우 자주 그런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딛고 나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무겁고 힘들어서 주저앉아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볼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힘을 내라, 꿈을 키워라, 비전을 봐라는 식의 선동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망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이지,
인간이 제공해주는 ‘으쌰 으쌰'(너는 할 수 있어) 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내가 많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의미에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은…
정말 중요한 개념들인 것 같다.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약자의 (하나님의) 복음은, 그들을 은혜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강남좌파’와 다를바 없는 것이 아닐까.

(갈라디아서 1장을 나름대로 연구해보면서…. 이런 묵상들을 해 보았는데, 나를 참 아프게 찌른다.)

어제의 묵상

다리를 다친 운동선수가 있었다.
뛰고 싶으나 뛰려고 하면 근육통이 심해 제대로 뛸 수 없었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뿐이었다.

몇년간의 고통스러운 재활훈련을 통해, 그 선수는 다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 선수는 자신의 그러한 경험을 ‘훈장’으로 삼아, 부상을 당한 다른 선수들에게 이야기한다.
힘내! 넌 해낼 수 있어! 날 봐. 부상을 이기고 이렇게 뛰고 있잖아.

그러나,
그 선수의 그러한 말은, 부상중에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어렵게만 할 뿐이다.

부상에서 회복된 그 선수는,
자신이 부상에서 회복되었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
부상을 당했을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나는,
바로… 그 부상에서 회복된 운동선수 같을때가 참 많은 것 같다.

성실함과 완벽함

누구나 완벽할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성실할수는 있다.

어떤 사람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 더’ 요구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 더’ 요구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일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의 문제가 성실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인지, 완벽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할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조언을 받아들이기

총무간사로 섬길때, 여러가지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은…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다짜고짜 코스타란 이런 것이라며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시기도 하고,
한시간씩, 전화를 통해서 일방적인 ‘조언’을 들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중학교때 반장해본 이후로는 한번도 리더쉽을 행사한적이 없으면서, 리더쉽에 대해 나름대로의 강의를 해주시면서 조언을 해주시기는 분도 있었다.
코스타의 10년동안 나아갈 방향을 혼자서 쫘악~ 제시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난데없이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며 “신령한” 얼굴로 접근하는 분도 계셨다.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화하여, 내 상황 혹은 코스타의 상황에 자신의 경험을 적용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많았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섬기는 내용과, 나를 잘 이해하고 있고, 지금 코스타의 상황등을 잘 읽으며 주시는 적절한 조언들도 있었지만,
대략 80% 정도의 조언은 out of context의, (죄송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들이었다.

이미 우리가 다 마음에 두고 계획하여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일이 꼭 필요한데 계획을 하지 않는다며 꾸중(?)을 들어야 했던 경우도 있고,
5년쯤 전에 이미 고민과 정리가 다 끝나서 정리가 된 일들에 대해 심각한 얼굴로 매우 새로운 이슈라며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코스타가 맞닥들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닌데,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제일 중요한 거라며 목청을 높이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에는…
대개 참 애매하고 어색했다.
소위 ‘내부사정’을 시시콜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그것을 대외적으로 share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데다,
그렇게 설명을 해도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이해를 하시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그냥 듣고나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 혼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기에는, 조언을 해준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떤 순간에는,
내게 쏟아지는… 그 out of context의 엄청난 조언의 홍수 속에서…
한 두어주만 잠수타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전화를 받거나, 이메일을 여는게 두려운적도 있었다.
(어떤 어르신들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시기도 하셨다. -.-;)

그렇게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을 들을 때면,
그냥 ‘인자한 얼굴’을 하고 그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혼자 애국가 가사를 몇번씩 외기도 하고…
(언젠가… 어떤분과 전화하면서는 시편 23편을 한 30번쯤 암송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분들의 그 모든 조언들 속에서 소중한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out of focus, out of context의 조언이지만, 그 조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는 것들을 보게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그 사람이 그렇게 조언을 남발해야만 하는.. 그 사람의 personal need/상처를 바라보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내게 와서 조언을 해줄 정도록 정성과 열정이 있는 그분들의 마음을 감사히 보게되기도 하였다.
아주 황당한, 거의 말도 되지 않는 조언을 듣게되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정말 급하셔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조언을 통해서라도 내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보다” 하며 귀를 기울이게 될때도 있었다.

물론, 내가 간과했던, 중요한 point를 깨닫거나 재확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많은 분들의 조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는 일들이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지금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들을 잘 하고 있는걸까?

언제 좀 더 성숙해지면,
그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게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많은 노력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내 죄된 본성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주변 사람으로부터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화시키게 되는 것 같다.

…

제게 조언을 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