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토비는 사탄적인가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문
화 속에서 뉴에이지, 혹은 사탄 문화의 성분을 구별해 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때 저도 우리가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이 얼마나 사탄적인가에 관하여 여기 저기에 기고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열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도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우
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직은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이 “already but not yet” 선포된 이 세계에서 문화는 어찌되었건 ‘사탄적’인 것에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전체를 싸잡아서 ‘사탄적’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가
령 아무 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음악, 미술작품 어떤 것이든지 뽑아 그 안의 ‘사탄적인’ 것들을 찾아내자고 해서
잘 ‘짜내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또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사탄적인 것을 찾아내라고 해 봅시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사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낮은울타리 식의 연구와 분석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뉴에이지고 식의 몰아세우기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를 분리시켜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문
화속에 숨겨져 있는 잘못된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에 (정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식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디에서 한마디 들은 것으로만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듭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레토비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더 많이 있다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텔레토비
자체를 ‘사탄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수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수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를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텔레토비로부터, 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성경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라고 해도 역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점이라던가.)

우
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되고, 청각장애인이 듣게되는… powerful한
복음입니다. 왜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악마적이라며 피해야만 합니까? 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더 성경적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살고있는 미국 보스턴 근교에는 Salem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초기에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
‘영적 순결함’을 찾고자 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마녀 박물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Haloween이 되면 각종 마녀 관련
행사들이 치루어지는 ‘마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문화를 마녀로 몰아세울때, 문화는 영영 사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면적 성전, 외면적 성전

오늘 성경공부 중에서 내면적 (보이지 않는) 성전과 외면적 (보이는) 성전의 비교가 계속 제 마음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요.

요즈음은 자꾸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외형적 성전’, ‘율법’ 등등을 주셨을까.
그 수많은 종교적 규례를, 따라야할 법칙들, 하나님의 뜻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과 예식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깨고자 그리도 노력하셨건만 결국 그것을 깨시지 못하시고 그 많은 종교적 규례들에 의해 오히려 accuse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아니..
도대체 왜 그리 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종교적 규례들을 그리도 두셨을까.

요즈음 자꾸 드는 생각은요,
교육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천년의 시간을 두고서 끊임없이 성전, 제사, 율법 등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는 거지요.
가령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면서, 내 수입과 재산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계속 상기하고 그렇게 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가 복음의 생명성을 죽이는 주범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 지나친 반형식론적 입장을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예배로 마음으로 드리는게 중요하지, 주일 예배라는 형식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십일조도 내 소유의 전체가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십일조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기도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커다란 교.만. 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요즈음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형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예배가 제 살을 지배하는 사람도 아니고,
십일조라는 형식을 무시할만큼 제 재물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도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더 엄하게, 많은 rule들에 의해 control하지만
그 아이가 장성해 감에 따라 밤 귀가 시간도 점점 늦추어 주고,
때로는 부모의 credit card를 쓰게 허락해주기도 하고,
일정 나이가 지나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도 허락하는 것 처럼…

어쩌면 제 신앙의 성숙(?)에 따라 때로는 불필요해보이는 형식을 제게 일부러 덧씌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도 그것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을 했었습니다.

글쎄요…
정말 어떤 의미에선… 이젠 ‘짬밥’도 늘어서…
제가 배운대로 혹은 성경대로 설교가 되지 않으면 설교 자체에 귀를 닫아버리고…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 시간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뒤엎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말 빌립보서의 말씀 글자 그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것을 뼈속 깊이 새기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네요.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오래 참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온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여러가지로 보아…
적어도 제겐 아직은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외면적 성전’이 때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4년 1월,
http://www.gatebiblestudy.org 보드에 쓴 글

성전미문의 거지

오늘 QT 본문은 사도행전 3장 전반부.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는 이야기.

그런데,
정말 graduate student 로서의 내가 성전 미문의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지도교수며, 우리 분야의 다른 사람등) 나를 바라보며 지나갈 때,
어떻게든 그 사람들의 attention을 끌어보려고 애쓰는…
좋은 논문을 쓴다, 학회에서 좋은 발표를 한다, 결과를 잘 낸다…. 하는 등의 framework에 가두어져서…

성전 미문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던 앉은뱅이 거지,
논문도 쓰고 학회 발표도 하면서 이 분야의 잘 나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내 결과를 좀 봐주세요’ 하고 애걸하는 권오승.

성전 미문 거지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좀 더 받아 볼까 하는 것,
대학원생으로서의 내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명예/돈을 더 받아볼까 하는 것.

그렇지만,
성전 미문의 거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었듯이,
내게도 정말 필요한 것은 ‘논문 몇편, 사람들의 관심사, 좋은 결과’ 등등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 미문의 거지 신세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건데, 그래서 거지가 할 수 있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일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겨우 사람들의 관심이나 더 끌어보겠다고 버둥버둥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씀 묵상을 하고….
지도교수를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오늘 엄청 깨졌다. ^^ 그러니 금방 엄청 비참해 지더군.

정말 나는 아직 먼 것같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

Sometimes it’s slow going, but there is knowing
that someday perfect I will be.~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Jesus is changing me.
Oh Yes He’s chaning me

2003년 9월

0일 0시 – play

0일, 0시

나오는 이 : 혁준,
혁준이의 아버지,
혁준이의 어머니.
우편 배달부 & 효과

때 : 0일 0시

무
대는 그리 크지 않은 소극장이 좋다. 무대 왼쪽은 혁준이의 기숙사 방, 무대 오른쪽은 혁준이 부모의 집이다. 각각의 집에는
전화가 하나씩 놓여 있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으로 하고, 특히, 양쪽 전화 근처에만 조명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모든 소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있는 시늉만 내어도 좋다. 효과음도 사람 입으로 낼 수 있다.
처음, 무대는 무척 어둡다. 차츰 무대 밝아지면 무대 왼쪽에서 혁준, 등장한다.

혁 준 : (시계를 보며 무대로 걸어 나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부모님께 전화드릴 시간이네. 잠깐, 전화하기 전에 준비부터 해야지.
(주머니에서 전화할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낸다) 옳지, 여기 있구나. 자, 번호가… (다이얼을 돌린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 아버지 곁에 선다.

어머니 :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혁 준 : (종이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이 읽는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어머니 : (반가운 듯) 얘, 혁준이구나.
혁 준 : (전화를 귾고,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어머니 : 얘, 얘… 여보세요? (실망하여 전화를 끊는다)
아버지 : 혁준이가 뭐래?
어머니 : 모르겠어요.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리네요.
아버지 : 그래? 참 이상하네…

아버지, 어머니 퇴장. 무대 암전
다시 무대 왼쪽 밝아지면 혁준이 등장

혁 준 : 오늘도 벌써 전화할 시간이네
(다이얼을 돌리며) 이 전화 받으면 부모님이 기뻐 하시겠지.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 (수화기를 들며) 아, 여보세요.
혁 준 : (처음과 같은 식으로 전화 대화문을 읽는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아버지 : (반가와서) 얘, 혁준이구나. 잠깐만 기다려라.
(뒤를 돌아보며) 여보, 혁준이 한테서 전화 왔어.
혁 준 : (전화 끊고 퇴장한다)
어머니 : (달려 나오며) 그래요? 뭐래요?
아버지 : 글쎄, 지금 막 왔어.
(수화기를 다시 들며) 얘, 혁준아.

뚜- 뚜- 뚜- 하는 소리

아버지 : 얘, 얘? 혁준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화기를 놓는다) 이상하네.
어머니 : 혁준이가 뭐래요?
아버지 : 몰라.
어머니 : 네?
아버지 : 그냥 끊었어.
어머니 : 지난번 같이 혼자서만 중얼거렸나요?
아버지 : 그래, 혼자서만 중얼 거렸어. 이상하네…
어머니 : 글쎄요…

아버지, 어머니, 퇴장하고 무대는 다시 암전.
무대 다시 밝아지면 혁준, 등장.

혁 준 : 오늘도 전화를 해야지.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 아버지 곁에 선다.

어머니 :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혁 준 : (노래를 흥얼거리며 있다가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갑자기 표정과 말투가 굳어진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어머니 : (이번에는 혁준이가 전화 내용을 읽고 있는 도중에도 막 부른다)
얘, 혁준아. 혁준아. 잠깐만 혁준아.
혁 준 : (일방적으로 전화를 끝낸 뒤 퇴장)
어머니 : (아버지를 보며) 또 그 전화예요.
아버지 : 거참…
어머니 : (갑자기 생각난 듯) 그래, 우리 그렇게 합시다.
아버지 : 어떻게?
어머니 : 혁준이에게 편지를 쓰는 거예요. 우리와 이야기를 하자고.
아버지 : 그거 좋은 생각인데. 지금 씁시다.
아버지 : (종이에 쓰는 시늉하며) 사랑하는 아들 혁준아
어머니 : (역시 종이에 쓰는 시늉하며) 우리는 너의 사정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아버지, 어머니 : (약간 큰 소리로) 제발, 우리와 이야기를 좀 하자!
아버지 : 아버지,
어머니 : 어머니가 씀.
아버지 :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는다. 이때 우편 배달부 등장한다)
배달부 : (아버지로 부터 편지를 받아서 혁준이네 집까지 배달해 준다)
(무대를 2바퀴 정도 돌며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한다) 따르릉, 따르릉…
(혁준이에게 도착해서 편지를 전해준다) 편지요!
(무대 밖으로 퇴장)
혁 준 : (편지를 뜯어 읽어 보고) 이 편지는 내 성실한 전화 내용을 흩어 놓을지도 몰라. 그냥 내가 하던 대로 전화를 해야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건다)

따르릉 소리.

어머니 : 혁준이 전화 인가봐.
아버지 : 받아봐요.
어머지 :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혁 준 : (이번에는 전화 대화문을 보지 않고 외워서 한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
어머니 : 얘, 혁준아, 우리는 너의 사정을 알고 싶구나. 제발, 우리와 이야기를 좀 하자!
혁 준 : 내가 만일 오늘 밤, 내가 만일 오늘 밤, 오늘 밤, 오늘 밤…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이,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까먹었잖아.
아버지 : (어머니가 들고 있는 전화를 뺏어 들고) 얘, 혁준아, 혁준아.
혁 준 : 오늘밤, 오늘밤,… 에이 모르겠다.
(전화를 끊는다) 에이, 오늘 전화는 망쳤네. (퇴장)
아버지 : (관객을 보며) 참말로 안된 일이예요!
우리 혁준이는 전화를 할 때 꼭 하나님에게 기도하듯이 한단 말이예요…
암전…

@ 원래 이 글은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것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그 원작자가 기억이 안나네요…

나는 흑인들이 싫다!?

흑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나는 흑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엉덩이 아래쪽에 이상하게 걸치는 헐렁한 바지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도 싫고, 도대체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하는 영어도 듣기 싫다. 한 무리의 흑인들이 번쩍번쩍 광을 낸 차에 우루루 타서, 쿵쿵 하는 베이스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이상한 손 모양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랩(rap)을 따라 하는 모습도 싫고, 자기들 끼리 만났을 때
Yo- 어쩌고 해 가면서 복잡하고 이상한 악수를 하는 모습도 싫다. 차를 타고 가다가 흑인들이 길거리에 주루루 서 있는 길을
지나면, 반사적으로 차 문을 잠그게 되고, 그저 그들과 눈길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진다. 컴컴한 골목길에서 어쩌다 흑인들을 만나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하거나 삥 돌아가기 일수이다.

그런데, 지난 달에 내가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 어떤 흑인
목사님이 와서 설교 하셨다. 보스턴 근교의 어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바로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 흑인 억양으로 내내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무지 알아듣기도 힘들게, 설교 내내 이쪽 저쪽을 막 돌아다니면서,
흑인 특유의 큰 몸동작을 섞어서 하는 그런 설교였다. 물론 내게 무척이나 그 모습이 거북하게 보였다. 그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그렇게 번지르르한 정장을 떨쳐입고 설교하는 모습도 위선적으로 보였고, 비교적 논리적이고 정리된 설교에 익숙한
나로서는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감정만을 북돋우는 것 같은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설교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그 내용에 내가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날 때 즈음엔 눈물까지 글썽거려가며 그 설교에 공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쨌든, 내가 흑인들을 다짜고짜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흑인 차별과 호남 차별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얼마든지 전라도 사람이 아닐 수 있는 전라도 사람이다. 내 아버지께서 전북
출신이시긴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내가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 잠깐 전주에 산 이후엔 늘 서울에 살았다.
내 말투에 전라도 사투리는 전혀 있지 않고, 오히려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직장생활을 대전에서 한 탓에 약간 충청도 사투리가 한때
내 말 투에서 배어 나왔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때였던가, 본적도 서울로 아예 옮겼기 때문에 무슨 나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전라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 때 이후 억척스럽게 스스로를 전라도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다녔다. 국민학교 2년 반을 전주에서 다닌 연고로, 어쩌다 전주 출신 사람을 만나면 좀 오버를 해가면서 반가워 했었다.

그렇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중학교 1학년때 어른들로부터 들어서 알게된 호남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기업에서 승진을 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된 영남 정권이 계속 정치적인 이유로 호남 차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등은 그래도 이를 악물고 들어줄만 했다. 그런데, ‘누가 돈의 떼먹고 달아났는데 호남사람이더라.’. ‘호남
사람하고는 사돈도 맺으면 안된다.’, ‘호남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종족이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들을 땐 아니 도대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왔다. 거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모멸감까지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호남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반쪽 호남 사람으로서 스스로 호남인임을 거부하는 것은 괜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름대로 호남인이
되어 성공해 보겠다는 어줍잖은 객기를 부리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대구 출신 친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늘 나는 스스로 마치 호남인의 변호인이라도 된 양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호남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대표가 쓴 ‘전라도 혐오증’ 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 아니 차별을 넘어 혐오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호남인들이 가난하다는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전라도 혐오증’ 의 원인은 딱 하나, 전라도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돈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이 객지에 가서 그
사회의 맨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 들은, 그들이 특정 지역 출신이든 특정한 인종 집단이든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우리나라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목욕탕
때밀이,작부,깡패,도둑놈,식모,사기꾼,노가다,노점상 등은 거의 예외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가 전라도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주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했다면
그 드라마는 ‘리얼리티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높으신 분들’께서 호통을 쳐서 당장 ‘바로’ 잡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 셋 가운데 하나가 사는 수도권에서 이런 밑바닥 직업을 거의 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데, 그들이 멸시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경상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출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보는 전라도 사람 들은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행색이
초라하고,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악착같이 다투고, 대낮에도 술먹고 다니고…,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어울 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그런 전라도 사람’ 들에 대한 험담을 주저없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자기네가 본 전라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다시,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돌아가 본다. 과연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무엇 때문인가? 100 여년 이상 지속된 끔찍한 노예제도로부터 벗어나서 1900년 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외형적으로나마 ‘시민’으로 대접받게 된 이들. 원래 그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해 온 그 땅 아프리카는 아직도 정치적 경제적
낙후성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한 모습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반복되는 사회적 차별과 학대로 인해 어쩌면 스스로
당당한 시민으로 설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길고 긴 지난 역사. 이런 속에서 이들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빈곤과 낮은 교육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더 악화시켰고, 나 같이 흑인들에 대해 별 생각 없이 대했던 아시아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난 아직 단 한명의 흑인 친구도 사귀어 본 일이 없다. 정말 마음과 마음을 터 놓고 흑인과
이야기 해 본적이 없다. 호남 차별에 대해 주먹을 불끈쥐고 분개하던 “자칭 의인”은 어느덧 여기서 이번에는 가해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상도 여자와 결혼한 전라도 남자

내 아내는 골수 경상도 출신이다. (사실 내 아내도
반쪽짜리 경상도 여자다. 왜냐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으니까.) 내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모두 대구지역 출신이시고,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신다. 처음 결혼을 해선, 처가 식구들이 쓰시는 경상도 사투리를 내 머리 속에서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꽤 애를 먹었었다. 이번 대선에도 내 처가 식구들은 대부분 두말 않고 “기호 1번”을 찍었다고 한다. 내 친가쪽
식구들이 두말 않고 “기호 2번”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름래도 반쪽짜리 전라도 청년으로서 호남 차별에 대해
분개했던 것, 흑인들에 대해 매우 불합리한 가학적 편견을 가졌던 것, 그리고 이제 반쪽짜리 경상도 아가씨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것. 마음을 열고 편견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내 불합리하고도 몰상식한 편견을
비교해 보면서 스스로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게 된다.

새해엔, 함께 복음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흑인 친구하나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3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싼타마스!? 그리스마스?!

지난 주말, 결혼한지 4년만에 처음으로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살고 있는 집이 워낙 좁아 트리를 놓을 자리도 없었고, 그리 비싼 것은 아니지만 트리를 장만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결혼을 한지 1년만에 낳은 – 이제 세돌이 막 된 – 딸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을 쉽게 집안에 들여놓기 어려웠던 터였다. 그러나 금년엔 이제는 조금씩 사리분별을 하는 아이의 정서를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더욱 드러나게 기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인공 소나무 하나를 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장식품들이 문제였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훈련을 시작한 딸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크리스마스 트리인 만큼 정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들을 달고 싶었다. 반드시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들로만 장식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크리스마스 정신(spirit)에 맞는 장식을 하고 싶었다. 하나씩 장식을 걸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살박이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식품들을 하기 위해 가까운 백화점이나 할인 매장등에 갔을 때 우리는 정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저 반짝이는 전구들, 가짜 눈, 반짝거리는 금줄, 눈사람, 산타 클로스, 루돌프, 호두까기 인형 등은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정말 예수님의 탄생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장식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곤, 크리스마스 트리의 맨 꼭대기에 다는 별과, 일부 천사의 날개(?)를 단 눈사람 장식들이 전부였다.

결국
우리는 제법 떨어진, 그러나 제일 가까운, 기독교 서점에 가서 아주 빈약한 장식 몇 개를 살 수 밖에 없었다. Joy 라고 크게 써 있는 반짝이가 박혀있는 글자 장식과 천사 장식 몇 개… 그 가운데 내 시선을 붙들었던 장식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한쪽에 있고, 그 반대 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트리를 받치고 있는 장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은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 하고 있지만 사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비교적 단순하고 작은 장식이었지만, 나는 그 장식을 보며 눈물이 핑돌았다. 이제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예수님의 생일에, 다른 화려한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지는 장식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구석의 후미진 기독교 서점의 한 구석에서라야 이렇게 작은 장식을 찾을 수 있는 현실. 어쩌면 산타클로스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구석에서 찾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내 자신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아도 그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기대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끼리 따뜻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말 밥통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보겠다는 결심은 별로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 교회에서도 함께 윷놀이를 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에 대한 감격으로 함께 끌어안으며 감격해 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

어느덧 모든 사람들에게 ‘싼타마스’가 되어버린 이번 ‘크리스마스’엔,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기뻐해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으시면서 (upside-down) 태어나신 왕께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를 마음껏 드리는 크리스마스를 갖고 싶다.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내 사랑하는 딸이 후에 성인이 된 후 기억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것이면 좋겠다.

유학생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현재는 ‘초등학교’라 해야 맞는 표현이지만, 동민이가 어릴땐 ‘국민학교’였으므로 이 명칭을 그냥
쓰도록 한다.) 동민이는 하얀색 모시 한복을 입고 시민회관에 모인 많은 청중 앞에 섰다. ‘전국어린이 반공 웅변대회’에 출전한
것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웅변을 했는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을 도운 소련을 성토할 때와 우리 자유대한을 도운 미군을 높일
때엔 눈물도 찔끔 났다. 많은 박수를 받은 동민이는 결국 최우수상을 받았고,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반공 어린이’로 칭찬을
받았다. 동민이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하루빨리 커서 북괴를 물리치고 빨리 우리 나라를 미국과 같은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중고등학교 때에도 동민이는 유난히 미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왠지
영어는 더 재미있었고, 미국의 50개나 되는 주 이름을 다 외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자랑거리였다. 뭐든지 미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친구들은 동민이에게 물어보곤 했다. 학교에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동민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는
꿈을 꾸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동민이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우수대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을 시작하면서 우연히 만난 어느 여학생의 권고로 학교 내 성경공부 동아리에 가입했고,
동민이는 두달여의 성경공부 끝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내내 공부만 알던 동민이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동민이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비로소 ‘세상’에 대한 진지한 사랑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민이에겐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사회
정의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친구들의 ‘정의로운’ 목소리에는 언제나 ‘반미(反美)’ 구호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았다.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과는 너무 다른 얼굴을 한 미국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미국이 진정한 미국이란 말인가.
자유와 평화와 풍요의 나라, 그리고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복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나라. 그 미국은 과연 우리 민중의
적이란 말인가.

대학교를 마칠 무렵,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동민이는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동민이가 공부하고
있는 무선 통신 분야는 미국의 연구가 많이 앞서 있는데다 어려서부터의 꿈인 미국 유학을 꼭 이루고 싶다는 욕심도 이 결정을
하는데 큰 동인이었다.

미국 유학 생활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쫓기는 실험 스케줄과 지도교수로부터의
압력, 경제적 압박, 장래에 대한 불안 등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가 언제나 동민이를 사로잡았다. 그나마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겨우 자기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곤 했다. 이런 힘든 환경은 동민이를 현실로 자꾸만
몰아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 와서 동민이는 미국에 대해 어려서부터 가졌던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과연 미국은 유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기회의 나라이자, 신앙의 나라인가? 아니면 제3세계 빈곤을 만드는, 이기적인 거인인가?

미국에 대해 생각하면서 몇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미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자세이다. 미국의 모든 것은 앞서있고, 미국의 모든 것은 선하고, 미국의 모든 것은
신앙적이라는 입장들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모든 것은 그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도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과연 미국은 기독교적 기반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선한’ 나라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미국을 초기에 형성한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미국 사회 곳곳에 기독교적 문화가 적어도 한국에 비하면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의 국가 운영이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사상의 조류나 문화, 그리고/또는 경제적 체제 등이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운영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미국의 많은 부분은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인본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의 인본주의적인 흐름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로부터 비롯된 실수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미국을 선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이 이번 WTC 테러 공격에 대해 보일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선’인 미국에 대해 ‘악’인 이슬람이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악’인 이슬람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은 성전이 된다. 그러나 미국이 취해온 대외 정책과 반미의식의 원인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무차별하게 기독교 = 미국= 좋은 나라, 이슬람 = 나쁜 나라의 공식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반대의 극단은 절대적인 반미(反美)의 입장이다. 제3세계 대부분의 빈곤은 미국의 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에 기인한
것이고, 미국의 패권주의는 힘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전히 민중의 적인
자본주의의 총 본산으로서의 미국은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이라는 좌파적 생각이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겠다. 이런 입장은 자주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미국에 대한 증오가 큰 나머지, 미국의 모든
것을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지난 WTC 테러 공격 이후 일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반응 가운데에는 통쾌하다,
잘됐다, 속 시원하다는 식의 내용들이 있었는데 어찌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한 생각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통쾌해 할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주신 은사와 특징이 있듯이 민족 혹은 족속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미국의
모든 것이 ‘선’ 혹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미국의 장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우리 민족의 은사와 특징을 잘 계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과 같이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사회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비교, 분석하여 발견하기 어려우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 속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은 이러한 일은 하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가 될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

미국은 기독교 문화가 널리 깔려
있는 나라, 그러나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나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도
미국에게 있어 다시 돌아갈 ‘Golden Age’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미국에 대해 혹은 서구 문화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1901년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김교신이라는
신앙의 선배를 생각해본다. 김교신은 암울했던 시기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울 꿈을
꾸었던 신앙적, 민족적 선각자였다. 그는 그 당시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강국(强國) 일본에 유학했던
유학생이었다. 그가 <성서조선>을 통해 나누었던, 그리고 그의 일기를 통해 비추어졌던 그의 사상은 그를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고, 무교회운동의
창시자이자 반군국주의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문집을 보면 많은 일본사람들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을 비교하면서 우리 민족의 부족한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도
잘 나타나 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들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모습이다. 그러나 또한 ‘박물학자’였던 김교신은
<조선 지리 소고>와 같은 글에서 우리 지리를 고찰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노력을 하는 등 민족적인
자존심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성서적 입장에서 일본이 반드시 망할 것과 조선이 반드시 독립할 것을 이야기 하였고, 이는 일본
경찰들도 혀를 내두른 점이었다. 194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함흥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세상을 떠난 진정으로 ‘낮아져서 섬긴’ 유학생이었다. 우리 나라와 일본, 그리고 세계 많은 나라에 대한
‘성서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서적’ 입장에서 각 나라와 민족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던 선각자였다.

어쩌면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유학생인 동민이와 (그리고 내 자신과), 우리 신앙의 선배인 김교신을 비교하며 몹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이제, 21세기 ‘강국’인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우리 역시 편향된 반미 혹은 친미가 아닌 ‘성서적’ 시각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치우치지 않은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운 여름날 냉수 한 사발 같이 시원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10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귀족 크리스천

인간의 사회는 어느 곳이 건 ‘계층’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부정적이지 않은 부류의 계층도 있으나 그 계층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 혹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성경은 이러한 계층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마서 13:1) 적극적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베소서 2:14)

계층은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계층은 교회의 건전한 성숙을 이루는 좋은 프레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에서 특정 ‘계층’을 이룬 사람들이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큰 제약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들은
‘귀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은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거나 종교 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어서 예배의 한 순서가 끝나면 그 다음
순서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신앙의 ‘레벨’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의 감격에 의지해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종교적 행위, 교회 봉사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그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때의 멸시는 물론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건덕(健德: 덕을 세움)을 중요시하는 교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담는다.) (마가복음 7:6-23)

이들은 또한 대부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가르치려 한다. 10여명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에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삶의 구체적 고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마치 유일한 성경적 정답인양 30분씩 충고를 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대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건에서 겪은 일들이나 인상 깊은
설교로부터 가르칠 거리들을 잘 준비해 놓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나 고민을 겪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저 한
사례(case)로 입력되어 자동적으로 해답을 출력한다.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떠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종교적
원론을 남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디모데전서 1:5-7)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번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모든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하는 것을 신앙의 절개로 여기고 흡족해 한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동역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들이 리더가 되지 않는 한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율법적 혹은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거부한다.
(에베소서 4:1-3)

이들은 매우 사역 중심적이다. 지역 교회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들은 탄탄한
종교행위의 이력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들과 인력을 동원해 사역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 한 영혼의 구원과 양육, 성장,
치유 등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은 집단적 성장을 위한 계획, 전략, 추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추종자’만이 요구될 뿐이다. 때로 자신이 거의 혼자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역
계획을 수립해 놓고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취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일꾼’을
찾는 많은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에게 인정을 받기 마련이고 소속된 신앙 공동체에서 단기간 내에 요직을 차지한다.
(누가복음 10:38-42)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대개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성공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 이처럼 좋은 배경은 자신의 신앙적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은 당사자의 잘못쯤으로 여기고 정죄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이들에게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들에겐 그저 성공을 향한 전진이 최상의 목표이다.

귀족 크리스천, 그저
이름만으로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단어가 한 절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러한 귀족 크리스천은 흔히 발견된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캠퍼스
모임 리더들 사이에서 어쩌면 귀족 크리스천은 더 강한 연대를 가지고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쩌면 ‘특권
계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귀족 크리스천은 더욱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털어내시며 우리를 섬기시지 않았는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으시며 왕이 종으로
섬기시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지 않았는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분은 이제 너희가 나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으라고 우리를 보내고 계시지 않은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KOSTA/USA-2001은 그래서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으로 느껴진다. 금년 코스타가 유난히 더 기대된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자격시험(Qualifying Exam)에 실패한 후배에게

사랑하는 성철아,

지난 박사과정 자격시험에서 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매우 성실한 사람이고 또 열심히 준비했으므로 별 문제 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불합격소식은 내게도 무척 충격적인 것이었다.

글쎄, 내 짧은 편지가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너의 이번 실패를 두고 생각하는 것들을 좀 나누어 볼게.

나
도 미국에 ‘푸른 꿈’을 가지고 와서 (요즈음엔 이걸 비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정말
열심히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비교적 적응도 잘 되어가는 듯 했고 수업도 그럭 저럭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별 문제가 없으면 사오년 안에 학위를 따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내게 문제가 생겼다.
입학한 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 어렵게 찾은 지도교수가 갑자기 재정지원을 끊은 것이었어.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열심히 일하며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몸부림치던 내게 그건 큰 충격이었어. 갑자기 지도교수를 잃어버린 나는 원래 보게 되어있었던 박사과정
자격시험을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석사과정 학생으로 ‘강등’이 되었지. 한 학기에 만불이 넘는 학비를 자비로 충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고, 내가 다시 석사를 끝내고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을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삼년 이상
늦어질텐데, 이럴 바엔 짐을 싸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도 심각하게 기도했었어. 어느
아침에는 일어나서 ‘그래, 오늘은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한국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하자’고 결심했다가도, 그날 저녁엔 다른 학교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전학(transfer)용 원서들을 다운로드 받았고 자기 전엔 ‘내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며 잠자리에
누웠지.

게다가 그땐 내가 청년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던 때였고 그때 막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청년부를 돌보는
데에도 많은 힘을 쏟고 있을 때였어. 정말 아침엔 청년부 한 지체 한 지체를 생각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가곤 했던 때였지. 어떻게 하면 새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경공부 모임들을 잘 세워나갈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하였고.

나는 하나님께 아주 절실하게 여쭈었어.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거냐고. 게다가 나는 유학생들과 복음을 나누고 복음으로 양육하는 중요한 일을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특별히 학문적인 능력이 현저히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괜히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어떤 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교회의 한 골방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고, 어떤 땐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아보자며 뛰어다니기도 했고, 어떤 땐 그저 앉아서 구름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중학교때 몰래 다른 아이 일기장 훔쳐 본 것까지 생각해 내며 ‘회개’를 하고 이젠 좀 풀어달라고 기도해보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

그런데 답답한 마음 중에 나는 출애굽기를 묵상했었어. 사십년 간 광야를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말이야. 워낙 잘 아는 이야기들이고 그저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해 보였던 출애굽기가
내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 정말 살아 꿈틀거리는 생생한 이야기로. 사십년 간 돌고 돌고 또 돌면서, 어떤 때엔
구름기둥/불기둥이 며칠씩, 몇달씩 움직이지 않았던 때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면 백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구름기둥이
움직일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나 하며 천막 밖으로 목을 빼곤 했겠지.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해 하면서도 그저 그것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그래도 눈물을 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겠지.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이러한 깨달음은 그저
‘시뮬레이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몸으로 부딪히고 온 삶으로 겪어야만 내 것으로 체득되는 것이니까.

오
늘도 나보다 이년 더 늦게 우리 과에 들어온 어떤 사람이 마지막 박사논문발표(final defense)를 한다는 이메일을
받았어. 이런 이메일을 받는 박사 6년차의 기분이 어떤지 넌 아니? 그래, 나는 아직도 그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던져놓으신
‘돌맹이’로 인한 파장을 다 수습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허덕이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장학생(長學生; 오래 공부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께서 왜 그때 그렇게 하셨는지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어. 물론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공부를 향한 나의 인간적 욕심을 다루시기 위해 등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 볼 순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성철아,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모든 ‘고난’과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난 유학오길 잘했다는 거야. 젊은
시절에 경험하는 이 ‘광야생활’이, 비록 나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할 지라도, 내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더 절실히 의지할 수 있는 멋진 영적여정(Spritual Journey)임을 알기 때문이지. 지금 내 은행계좌엔
584불이 남아 있어. 앞으로 한달 동안 나와 내 아내와 우리 두살난 딸이 함께 살아야 하는 돈이지. 학문적, 경제적 압박들이
늘 나를 짓누르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또 다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내 삶 속에 흐르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만 있다면 한번 해 볼만 한 일 아니니?

성철아,
이번의
실패로 마음이 답답하면 울어. 먼 산을 쳐다보며 멍하게 있어도 보고. 나도 어떻게 어려움과 아픔들을 견뎌야 하는지 잘 몰라.
그냥 나도 그렇게 울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멍하게 있곤 하거든. 그래도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
아니니.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바보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어 돌아가셨잖니. 그 예수님의 사랑에 한발
더 깊이 빠져보자. 그것 외엔 길이 없으니까.

언제 전화 한번 해라. 내가 네 푸념 들어주면서 네가 좋아하는 육개장 오랜만에 한국음식점 가서 사줄게.

2001년 4월,
주안에서 함께 형제된, 경호형이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도문 – 99년 12월, FKCC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 이름을 알지 않고서는 도무지 누릴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도 그저 저희에게 벅찬 감격이 됨을 고백합니다. 도무지 저희에게 구원받을 만한 무엇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온 몸을 찢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인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일년간 저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먹이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은 단 한끼의 식사도 먹을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저희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저희를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이나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외모보다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하는 것을 저희로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모였을 때 보다 흩어졌을 때 더 powerful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중 장부를 만드는 일을 그치고, 부정한 방법으로 학교 성적을 올리는 일을 멈추고, 뇌물 주고받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하나님의 법이 흐르는 세상만드는 그런 공동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을 거짓이라 이야기하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 조금만 더 참아주시옵소서, 저희가, 우리 젊은이들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과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의 소망이 되는 때가 올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잠시만이라도 이 교회를 거쳐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누었던 많은 사랑과 vision으로 가슴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누리고 쓰는 것 보다 다른이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교회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형제들이 굶고 있는데, 그저 무슨 밥그릇에 밥먹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교회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한번만 듣기만 하면 주님앞으로 돌아와 영광스러운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외침, 단 한 덩어리의 빵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눈물, 전쟁의 포성 속에서 지하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있는 어린이의 공포에 싸인 눈,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아픔을 보시며 가슴아파아시는데 저희는 그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반찬에 밥먹을까만을 고민하는 그런 싸구려 인생들되지 않게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번주에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나 하는 것보다 우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주에 헌금이 얼마 들어왔나를 세는 것보다 어느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가를 찾을줄 아는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보시옵소서. 죄를 죄라고 외칠 때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땅을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돈, sex, 권력, 쾌락의 우상들을 보시옵소서. 오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필요로합니다.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 땅을 고쳐 주시옵소서. 지금도 지옥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가득한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을 보내주시옵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땅에 가득하게 될 부흥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로 하여금 그 부흥의 도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특별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사람들에게 바로 이 자리가 당신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거나, 직분을 가졌거나, 배경이 어떻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사람의 주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사람의 말솜씨와 기술로는 불가능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 마음에 닿으면 바로 그가 예수님 영접할 수 있게 될 줄 아오니 이 자리가 그런 영광스럽고 기쁜 자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 그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너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내 몸을 찢었노라고, 너의 삶을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노라고 하나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음성으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서 있다가 침체에 빠진 사람들, 열정을 잃은 사람들, 더 이상 싸울 힘도 사랑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 다시한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일어서 주의 용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어 기도하는 용사들로 다시 세워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는 어떤것도 하나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자폐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희에게 기쁨도 감격도 진리를 깨달음도 행함도 아무것도 있을 수 없사오니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희로 주의 자녀들 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바로 이 시간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테크닉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지고, 저희가 그 죄의 무게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십자가 앞에 내어 던지는 구원의 감격이 넘쳐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님,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축하하는 예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