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 manipulation (2)

나 역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는 리더로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누리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그 악순환 아래 있는 사람중 하나이다.

이러한 감정적 manipulation은 많은 악영향이 있지만,
그중 몇가지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성령에 의한 감동을 잃어버리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한 감정적 동요가 에너지드링크 같은 것이라면,
성령에 의한 진정한 감동은 잘 달여놓은 인삼 녹용 보약과도 같다.
보약은 급격한 몸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그 몸에 건강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에너지드링크에 의존해서 ‘순간화력’을 발휘하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나면,
몸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더 튼튼한 사람이되는 것에는 점점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좀더 즉각적인 효과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소비주의적, 피동적 대중을 만들어 낸다.
감정적 manipulation은 결국은 service provider인 리더와, consumer인 대중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 구조는, 계속해서 대중이 리더에 의해 선동당하고 끌려가는 것을 고착시키고,
대중은 소비주의적, 피동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이 능동성을 회복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사람과 사역에 대한 건강한 분별력을 잃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해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 하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것을 리더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정말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건강하게 분별해내는 일이 대단히 어려워진다.

그래서 잘못된 리더들이 양산되고, (가령 감정적 manipulation에는 능하지만 신앙적 integrity가 없는)
건강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있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지혜로운 인도가 불가능해진다.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고, 그저 감정적으로 부화뇌동하는 ‘대중’만 남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 (1)

Christian ministry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대중을 manipulate 하는 것은 독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리더의 입장에서는 (설교자, 찬양인도자, 기도인도자, 성경공부 리더 등등)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면 쉽게 무언가 자신의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에 길들여진 대중은, 감정적으로 manipulate 되는 것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cycle이 반복되면,
리더는 대중을 manipulate하고, 대중은 리더에 의해 manipulate 되는 것에 서로 익숙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나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런 함정에 깊이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잘못된 manipulation의 악순환이 어떻게 끊어질 수 있을지… 해결의 단초가 보이질 않는다.

 

Answering questions that nobody asks

1.

현대 기독교가 답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을 대답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라고 이야기하면…

현대인들은 ‘어떤 하나님이요?’ 라고 묻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고 영원하 살아라 라는 식으로 쏟아내고 나면,

음… 이건 내 관심사는 아니네.. 

그렇게 돌아서버리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 서클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relevant 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시도가… 일반적으로 실패해가는 것 같아 보인다.

2.

가끔…

내가 성경공부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뭐 기타 다른 세팅에서 이런 저런 강의/설교들을 하고나면…

결국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에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크리스천 서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에게도 정말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다루지 못했다는 생각을 할때가 많이 있다.

3. 

Apple에서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일단 그것을 갖게 되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기기를 만든다” 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복음은, 혹은 진리는,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원하지 않지만,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매우 즐겁게 누리게되는 성격이 있지는 않을까.

4.

그렇지만,

내가…. 때로 ‘청중’과 disconnect 된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내 생각이 깊고 innovative 해서라기 보다는, (뭐 당연히 아니지… -.-; )

그저 relevancy를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5.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따라가며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스토리를 잘 못 읽는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아브라함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면서,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어 가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지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6. 성경에 계속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는,
세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시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여 읽으면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하나님 이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그 삶의 스토리 안에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나와도 동행하신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내려가면,
pluralistic society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은 insight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3.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로 한 구체적인 배경이 성경에 다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큰 믿음을 가지고 창조주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기 보다는,
여러신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국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자신의 security로부터 detach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것,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것 등등 모든 행동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섬기는 신에대한, 그 당시 통용되던 방식으로 충성을 보이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꽤 엉성하고 허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 후에는 상당히 깊은 회의/depression/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계속 동행해가면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게된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벌써 몇주 지나긴 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묵상 본문이었다.

몇년 전, 아브라함을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아브라함을 읽는 방식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1. 나는 아브라함을 ‘위인’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communicate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demonstrate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대표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에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지방에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다신교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에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background에는, 아브라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다원주의적, 다신교적 상황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어쩌면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따르기로 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mish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mish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mish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mish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이런 두번째 유형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믿음의 선배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 외에도 흑인 노예들, 한국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무지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림’ 혹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되겠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상황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 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형이 더 relevant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 심화되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아…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있고,
세상의 화려함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되는데,
그 체제 속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낙오자가 되도록 강요받는 상황.

장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렸고,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상황 속에서 suffer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것.
그래서 초월, 신비, 고난 등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패배주의’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suffer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저 낙오자이고 실패자일 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이 두번째 유형이 잘 못 제시되었을때 생기는 독소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