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소위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mystic)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Eugene Thacker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나왔던 Alexandria에서 찾고 있었다.

Alexandria는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달했고, 기술이 진보했으며, 여러 사상과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인 풍요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종의 ‘벽’ 혹은 ‘한계’를 느끼고 ‘신비’를 찾아 사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Eugene Thacker는, (이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했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사막의 교부들이 Alexandria를 버리고 신비를 추구했던 그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결국은 신비 혹은 초월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대면할수 밖에 없다.

그런 초월적인 need가 지금 더 크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독교에서 신비 혹은 초월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신비 혹은 초월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비주의나 초월에의 추구가 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이 두번째 견해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해보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두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유형이 훨씬 더 relevancy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위 ‘악덕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 40대의 직장인을 생각해보자.

뭐 해적선 선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보면서는, ‘악덕기업’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 사람이 그런 악덕기업에 다니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다른 skill set이 별로 없을 수 있다.
20대부터 배우고 해온게 그건데… 뭐 다른 일을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이직을 해보려고 해도,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들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다들 악덕기업들이다. 심지어는 사장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라고 알려진 회사들을 포함해서…
게다가 가족 생활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 등등을 결국 이 악덕기업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고 있다.  노예와 같이 사는 것 같아, 때려치고 싶다가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도 않다.

이런 사람에게…
너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 악덕기업에 다니고 있는거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상당히 야속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이외에는.

체제를 개혁하는 일도, 개선하는 일도…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리고 도무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그 체제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럴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사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금년초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12번에 걸친 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이 시리즈에서 다시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가지 포인트만 간략하게 더 써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우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변혁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framework에서 세상을 변혁(transformation)시키는 복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차드 니버 역시, 이것을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라고 하여 중요한 분류로 사용하였다.

이 입장은, 사실 소위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해준 책,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의 원제는 Creation regained 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창조때 주어진 문화명령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의 체제, 문화 등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이라는 모토가 매우 어울리는 입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정치,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경제 등등을 강조하는데, 그 변혁을 이루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에만 신앙을 가두는 이원론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선한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느혜미야 같은 사람이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사람이 이 입장이 표방하는 영웅이다.

음…
내가 사실 대학-대학원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이게 다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이 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로 ‘리더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것 같다.
80년대 개혁주의적 기독교세계관을 비판할때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변혁 모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여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입장을 이야기하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삶의 치열함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던(?) 대학교수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이론적 구호로부터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80-90년대 그렇게 ‘변혁’을 외쳤던 그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에, 세속화 라는 거대한 물결에 속수 무책으로 휩쓸리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했지, 그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이런 변혁의 입장은 흔히,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해. 그런데 악한 세력이 동성 결혼을 찬성하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가 세를 더 모으고 정치적 promotion을 통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자.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에 권위(authority)를 갖기 보다는,
힘과 number of votes로 세상에 권세(power)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게된데는 이런 background가 다분히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건 내가 강의등을 할때 많이 차용하는 스토리이지만 여기 한번 또 써본다.

아마 2003년엔가 eKOSTA에 썼던 글에서 나는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벌써 내가 여기저기서 우려먹기 시작한지 10년도 더 지난… ㅎㅎ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해적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심하게 망가져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위의 해적선 비유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해적선원이 한사람 있다고 하자.
이 해적선원에게는 어떤 가능한 option들이 있을까?

뭐 그냥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해적선에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해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해적선에서 사랑이 꽃피우도록 사랑하라.
해적선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나타내어라.

음….
뭐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막상 ‘해적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좋으신 말씀’일 뿐이다.
아주 아주 shallow 하고 superficial한.

그냥 일반적으로 좋은 말씀에 머물것이 아니라면…

나는,
크게 세가지의 viable한 option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5)

마지막으로,

이번에 휘튼에 간 것은 2년 만이었다. 

작년에 과일회사에 다니면서 아예 conference 자체를 참석할 수 없었으니…

그런데,

휘튼 구석구석은 정말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분들도 참 익숙하고 반가웠다.

한국에서 유명한, 나보다 연배도 위 이신 목사님께서 내게 먼저와서 인사를 청하시기도 하셨다. (완전 민망… 죄송….)

뭐 그도 그럴 것이 96년부터 휘튼에 매년 갔으니…

여러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늘 그렇듯이 섬기는 사람들 보면서 감동도 받고, 군데군데 모여있는 학생들보며 뭉클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지내고 밤을 꼬박 새우고 목요일 새벽에 ORD 공항으로 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억.

이거… 너무 내가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많이 편하고 익숙하면, 편하고 익숙한 것에 감추어진 blind spot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오래 코스타를 섬겨오면서 이렇게 그냥 편하고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래서 화들짝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 코스타가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바뀌어야 하는가

– 둘 다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코스타를 떠나야 하는가

글쎄….

내게는 무거운 숙제이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4)

뭐 하루 반짝 참석해놓고 이래저리 길게도 쓴다고 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서두,

뭐 내 블로그니까 내맘이다. ㅎㅎ

어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집회 자체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고,

공동대표 모임, 간사 모임에 좀 참석했고, 몇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고, 그리고 중보기도실, 서점 등 다니면서 오랫만에 뵙는 분들 인사다닌게 전부였다.

코스타와 관계된 여러가지 기사들, 사건들, 그리고 facebook이나 다른 포스팅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집회 직전에,

문창극 총리후보를 support하는 성명서를 낸 어르신 목사님들도 그 자리에 계셨고,

그것을 보면서 저분들과는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다고 열받아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계셨다.

그중 어떤 분은, 아예 설교 시간에 보수적 정치적 발언을 하시기도 하셨고,

그걸 보고 엄청 열받은 강사님도 계셨다.

그 두가지의 정치적 입장을 놓고 보았을때,

내가 나름대로 가지는 정치적 입장은 비교적 뚜렸하다.

한국 선거에 투표한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처음 선거권을 받은 이후 

92년 대선부터 최근 대선까지 늘 한쪽 후보만을 위해 투표했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드러내고 쓰지만, 나는 어떤 특정 정치집단은 매우 싫어한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이런 세팅에서 이번에 더욱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렇게 다른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안에서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내가가진 정치적 입장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신앙적 입장인 것 같아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나는 그런 입장을 갖는 것은 일종의 오만일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신앙 자체를 일단 받아줄수는 없는 걸까? 

꼭 저 반대쪽 ‘빨갱이’ 혹은 ‘꼴통’을 쳐부수고 쓸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적어도 코스타 세팅에서는,

양쪽의 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양쪽의 분들을 다 모시고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도록 하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코스타 세팅에서 해잴 수 없는 무모한 시도일까?

정치적 입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느 것이지만,

그런 정치적 입장은 신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똘레앙스를 갖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3)

딱 하루 있었는데도,

이런 저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들이 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코스타의 대선배님과의 대화였다.

저녁집회 시간에, 저녁집회를 다 빼먹고, 그분과 열띤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그것도 꼬박 서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배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최근 코스타의 방향 대로라면, 지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인들을 거기에 보내는데 우려를 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오는 어떤 어떤 강사를 보니, 내가 거기 갈 자리는 아니구나 하고 느낄만 하다. 적어도 일정부분의 balance가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은 balance가 많이 깨어진 것 같아 보인다.

내 항변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지금 방향과 강사 선택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balance는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기계적인 balance를 추구하려고 들다보면 운동성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금 소위 그 ‘보수적인 목회자 그룹’의 color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판국이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코스타운동에 함께 하지 않는 젊은 그룹도 있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보수적 목회자 그룹이나 개혁적 젊은 그룹 양쪽이 보기에 모두 다 불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position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보수적 목회자 그룹의 눈치만을 보거나, 개혁적 젊은 그룹의 눈치만을 보고 있자면 코스타만이 해 낼 수 있는 역할을 놓치게 된다.

가령 86년에 코스타를 시작할 당시, 그 당시 ‘보수적 어르신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교단 정치 목사들을 코스타 운동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들과의 balance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젊은 개혁그룹이였던 신복음주의자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일으켰고 때로는 날카로운 날을 세워가며 목소리도 높였다.

왜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적용될 수 없다고 보시느냐?

음…

뭐 내 블로그이니까, 당연히 내 주장을 더 길게 썼다. ^^

그분의 말씀과 생각에도 물론 깊이 고려해보고 생각해볼 내용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약간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지도록 열띠게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해보면 한참 선배님이신 그분께 버릇없지는 않았는지 후회와 반성이 된다.

그분과의 대화를 한지 3주가 지났는데도, 그 생각이 계속 내 머리에 남아있다.

코스타는 얼마나 ‘날카로움’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2)

코스타를 섬기는 사람들이 매년 100명 수준은 되지 않나 싶다.

강사, 찬양팀, 어린이코스타 교사, 간사 등등.

그중,

그 사람의 생일이 언제라는걸 알만큼 가까운 사람들은 대충 간사 + 일부 강사님들정도가 아닐까.

그 수를 따져보면 40명 수준?

매년 놀라는건데,

유난히 코스타 집회 기간에는 이 섬기는 사람들의 생일이 많다.

금년에도 따져보니…

적어도 3-4명 정도의 생일이 그 기간에 겹쳐있다.

확률적으로는 40명 중, 그 한주에 생일이 들어있는 사람이 0.8명 정도 있어야 한다. (40명 / 52주)

그런데 4명이라는건, 확률의  자그자치 다섯배나 되는 거다.

흠… 이건 참 흥미롭다. 매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생일이 그 주에 끼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10년 넘게 자기 생일을 코스타 집회기간중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 생일… 내가 더 많이 복되게 해줄께.

네 소중한 섬김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정말 그건 네게 큰 선물이 될꺼야.

이 사람들의 섬김이 참 복되다.

….

개인적으로,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동생의 생일이 모두 7월 첫째주에 몰려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된지도 모르겠다. ^^

아, 물론 그렇다고 이 기간에 생일 있지 않은 사람은 별로 섬기는거 아니라는건 아니다. ㅎㅎ

이 기간에 생일 있는 사람이 더 섬기는 거라는 얘기도 아니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