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입장과 가장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설교

요즘 내가 취하고 있는 신학적 입장과 가장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설교가를 꼽으라면,
나는 거의 두말하지 않고 Greg Boyd를 꼽는다.

그분의 아주 세부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 모두 다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교회 (Woodland Hills Church)에서 제공하는 podcast를 통해서 듣는 설교들은,
내 입장과 거의 싱크로율 80-90%정도는 되는 것 같다!

Open theism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글쎄… absolutely yes, no 라고 이야기하기엔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선 유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스스로 청교도적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지금은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이렇게 써도 되나 모르겠다. ㅎㅎ

Christmas Tree

지난주말,
우리가 가정을 꾸린지 13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에,
처음으로 내 키보다 더 큰 크리스마스 트리를 샀다!

아내는, 성탄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기뻐하는 것인데, 그것과 크리스마스 트리는 큰 상관이 없는거 아니냐는…. 지극히 “오승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돈쓰는 것을 자제시키려 했다. ㅎㅎ

그렇지만 나는, 이제 teenager가 되도록, 한번도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집에 가져보지 못한 민우에게,
그래도 뭔가 크리스마스 트리 다운 걸 하나 갖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식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진짜 나무도 아니고, target에서 40불주고 산, 싸구려이지만…

아직 밖이 어두운 아침 5시 반, 기상 알람 소리에 눈을 떠서 거실에 나올때…
반짝이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괜히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해준다.

회심 (14) – 맺으며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몇번에 나누어서 적어 보았다.
뜬금없이 내 회심의 경험을 적게된 동기는, 처음 글에서 썼던 것 처럼,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과, 내가 겪은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이 세대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대의 교회와 기독교를 내가 담아내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이 특별한 경험을 한 내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까.
왜 내게는 이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신 것일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 경험을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강렬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다른 이들에게 강력한 하나님과의 대면의 경험을 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도울 여지는 과연 있는 걸까.)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뭔가 좀 더 clear해 질 것 이라는 기대를, 20여년 전에 했건만, 여전히 나는 clue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두렵다.

회심 (13) – 내 회심의 특징/한계

1. 나는 회심 경험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경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앙이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다.
 
2. 나는 회심 경험이 내 신앙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새로운 경험등을 결국 내 회심경험으로 해석해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나는 매우 보수적이다.

3. 개인적 회심이 매우 중요한 이슈일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어떤 상황이 되었건, 누군가가 ‘결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90% 이상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인다. 구원 자체가 과정임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회심의 순간이라는 것을 중요하게여기는 이율배반성이 내 신앙 안에 있다.

4. 회심 이후에 경험했던 변화가 나름 매우 큰 것이었다. 따라서, 회심과 변화(성화)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고, 빠른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5. 내 신앙과 신학이, 내 회심 경험이라는 다소 주관적 경험에 근거하는 부분이 많이 때문에, 내 신앙을 객관화시키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Gospel Coalition에서, Don Casron, John Piper, Tim Keller 이 세사람이 대담하는 것을 podcast에 올려놓아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역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대담이었는데…
많이 내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서도… 한편 듣고나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것은…. 이 세사람의 어조가 대충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는 복음도 알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는데… 우리처럼 그거 아는 사람 구하기 참 힘드네요.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처럼 좀 제대로 믿는 사역자들 어디 없나요.”

그 세분이 이야기한 내용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는 식의 그런 자세는 참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회심 경험이,
나를 그런 편견/교만의 함정으로 인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회심 (12) – 회심의 지속성/현재성

만일, 회심이 한번의 ‘경험’이고,
그 후에는 그로부터 자라가는 과정이라면…

그 회심의 강한 경험을 한것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 책을 읽은 것, 영감있는 강의를 들은 것등과는 어떻게 그 경험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그 강한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가면서 그것에 내 삶의 근본이 있음을 기억해나가는 여정일까.

만일 회심을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그 과거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강한 결단력과 정신력으로 그 과거의 사건에 걸맞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회심이후에 내게 생긴 변화는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

우선, 매우 사고/생각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생긴 변화가 아닌가 싶다.
글로 써서 남기기에..좀 머쓱하긴 하지만, 사실 회심의 경험이후에 나는 학과목의 평균 평점도 더 나아졌다.
그야말로 회심 이후에 비로소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심 이전에는 글쓰기 한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회심이후에는 글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훨씬 더 쉬워졌다)

그리고, 의지력이 몹시 강해졌다.
정말 결심하고 결심해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회심 이후에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
이것은, 회심의 경험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통일성을 갖게되어, 그야말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갖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에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할수도 있겠다.

내 지,정,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지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는 것을 경험해왔다.

감동적인 영화나 책, 강연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 회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심 (11) – 회심과 삶

회심과 일상과의 관계, 회심과 삶의 여러 영역과의 관계, 회심과 세계관/가치관과의 관계를 생각해볼때,
다음의 두가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번째 그림은, 회심으로부터 바로 파생되어 연결되는 생각/생활/삶/가치관 등이 있고,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점차적으로 2차, 3차적으로 그것이 발전되어가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고,  그것으로부터 발전되어나가게되는 일종의 씨앗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번째 그림은, 생각/생활/삶/가치관등의 모든 영역이 다 회심과 직접적으로 혹은 1차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고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 사건일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돌아가서 점검해야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의 혼합형이 될 가능성이 많지만, 그 근간이 되는 모델이 첫번째인지 두번째 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매우 명확하게 두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삶이나 생각에 내적 통일성 (integrity 혹은 internal consistency)가 없다고 느낄때 마다, 혹은 내 삶이나 생각등이 너무 사변적이 되거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회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과 연관시켜 풀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자신을 ‘출애굽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반복해서 그 출애굽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했던 구약의 전통이나, 예수의 희생과 죽음, 부활을 반복해서 기념하고 기억하는 신약의 전통이…
첫번째의 그림보다는 두번째의 그림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역시,
내 회심의 경험때문에 내가 가지게된 특정한 관점일까,
그렇지 않으면 모든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