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10) – 회심의 순간?

나는 과연, 언제 회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였을까?

대학교 3학년 언젠가,
마음 속의 공허함을 발견하고, 성경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였을까?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소망을 찾아내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터지고,
통곡을 하듯 몇시간씩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 경험을 하던 그 순간이었을까?

어느순간,
내가 나 스스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그 강렬한 경험 후 10년이 지난 때,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얻어지게된 그 순간이었을까?

태어나서 30년넘게 가지고 있었던 ‘꿈’을 주님께 드리고,
내 삶의 앞길을 주님께 넘겨드리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직도 온전히 회심하지 못한 것일까?

—-

짜장면은 언제부터 짜장면일까?

처음 밀 이삭이 뿌려졌을 때 부터?
그 밀을 수확했을 때 부터?
밀가루로 만들어졌을 때 부터?
중국집에서 그 밀가루를 사들였을때 부터?
면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했을때 부터?
면발을 뽑아내었을때 부터?
면을 익혔을때 부터?
짜장면을 손님이 주문했을때부터?
면과 양념이 섞여졌을때 부터?
그릇에 담겼을 때 부터?
손님의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손님이 짜장면의 맛을 처음 느낄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소화가 되기 시작하는 순간?
소화가 다 되어 배설되는 순간?

글쎄…

회심 (9) – 회심과 헌신

나름대로, 내 회심의 경험은, 내 근본을 흔들어놓은, 아니 뒤집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내가 주체할 수 없을만큼 강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내 회심의 경험이 강렬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 성향/성품이 그래서일까.

나는 그 회심이후에 아주 ‘강한 헌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반드시 건강한 헌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내가 여전히 이 헌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머리속에 염두에두고 신앙생활을 했다.

만일, 내가 경험한 이 회심이 ‘진정한’ 것이라면, 정말 이 복음이 진리라면, 예수의 사랑이 그렇게 큰 것이라면, 도무지 그럭저럭 사는 option이 내게는 불가능 했다.
그래서 정말 좌충우돌하며 ‘강한 헌신’을 추구했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절제된(?) 헌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만난 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대충 헌신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리로 받아들인 이 복음을 진리로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자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이 모자라서, 아직 잘 알지 못해서 건강한/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도 있다.
혹은 헌신의 좋은 지침을 얻지 못해 좌충우돌 건강하지 못한 헌신의 모습을 보일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더 깊이 헌신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의 죄성에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배교와 헌신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 걸까?
내가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에, 일반적인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회심 (8) – 회심의 오염, 비종교적 회심

처음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을때, 마치 나는 내 마음 속에 커다란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느꼈다.
환한, 어둠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런 빛.

그런데, 점차 ‘교회생활’을 해 가면서, 그 빛이 일부 가리워지기도 하고, 어두어지기도 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른바, 회심의 오염이다.

물론, 건강한 공동체 생활이 어린 그리스도인이었던 제대로 서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오염은, 공동체생활이 가져다주는 오염이 아니라, 어그러진 종교체제가 내 안의 빛을 자꾸만 꺼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 생활, 혹은 종교 생활이 내게 익숙해 지면서, 나는 그런 종교생활 혹은 교회생활에 의해 오염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내 안의 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자주, 내 자신을 종교생활로부터 끄집어 내어, 그 빛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면, 무슨 대단히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종교생활이 열정적인 내 회심의 경험을 희석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 회심 경험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종교인이었다. 세례를 받은.
내 회심 경험은 나를 종교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 후에도 내가 종교인으로 안착하고자하는 유혹을 느낄때마다 내 회심의 경험 자체가 희석되고 오염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비종교적, 아니 어찌보면 반종교적인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회심의 일반적인 성향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게 특별히 일어난 어떤 현상인지는 잘 알수가 없다. 

회심 (7) – 개인적 회심

나는, 복음을 받아들인 과정이 지극히 개인적이다.
말하자면, 혼자 성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지금도 대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어느 겨울날, 추운 기숙사 방에서 혼자 성경책을 읽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내게 복음을 소개해 준 것도 아니고,
함게 구도의 길을 걸었던 동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내 신앙은 두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우선, 어떤 ‘사람’으로부터 지배적으로 받은 영향이 없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제한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주변에서 보면, 특별히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한 사람이 뚜렷한 경우, 그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남들은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나는 꽤 어렵게 얻어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 – 나는 그래서 지금도, 어떤 사람을 다짜고짜 신앙적 영웅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단체/조직 등을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것에 반대/저항한다.

또, 내 신앙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물론 내 회심의 경험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나는 참 좋은 신앙의 공동체를 만났다. 그곳에서 heavenly fellowship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앙의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가 많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몇번의 건강한 공동체 경험을 통해서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신앙/회심이 ‘개인적’이라는 basis는 내 한계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회심 (6) – 죄

죄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성적인 단계’에서나, 그 후에 복음에 빠져들었던 ‘감정적인 단계’ 모두에서,
죄에대한 깊은 회개, 고백 등은 없었다.

내가 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된 것은,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어던 갈등은,
“이렇게도 죄에대한 인식이 희박한데, 과연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긴 한건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 깊이 감격했지만,
그것은 내 죄를 용서하셨더는 감격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랑 때문이었다.

죄에대한 인식 없이, 십자가의 희생이 어떻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겐 처음 단계에서는 그 십자가가 ‘죄의 용서의 도구’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

죄에대한 분명한 인식, 그것에 대한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내 초기 회심경험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야…
일종의 신비체험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죄에대한 더 깊은 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내 초기 회심경험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확실한 인식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제가 아니라는 내 생각, 또 그런 내 경험은…
지금 내가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 복음을 전하는 방식,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나 복음에 막 입문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회심 (5) – 개인적 구원, 우주적 구원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근거한 개인적 구원이다.
반면 이머징 교회등에서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우주적 구원,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이다.

나는 처음 회심의 경험때, 무엇을 받아들였을까?

앞의 글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매우 이성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먼저 거쳤고, 그것에 바로 연이어서 아주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먼저 이성적 깨달음을 거칠 때,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성경책은 에베소서였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거의 충격적일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라면 정말 소망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땅에서의 여러가지 어그러짐이 회복되는 그림을 성경에서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에 먼저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이 이성적 깨달음은, 나를 복음의 길에 들어서게 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할때에는,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예수의 고난 이었다. 그 고난을 생각하며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까지 창조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 벅찬 감격에 나도 나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격렬한 감정적 경험은, 나를 복음에 헌신하게 했고, 더 깊이 들어가도록 인도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 – 복음을 받아들임”
“감정적 경험 – 예수의 십자가/고난 – 복음에 헌신함”
이 두가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내게 꽤 강력하게 다가 왔는데…

만일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라는 framework만 가지고 있었다면, 깨닫긴 했더라도 헌신하지 못했을 것 같고,
감정적 경험 – 예수의 고난, 이라는 framework만 있었더라면, 일시적으로 헌신했을지 모르나 금방 싫증을 내거나 밑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이 두가지가 모두 꼭 필요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회심 (4) – 무척 감성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감성적인 것이었다.
나는 꽤 전형적인 ‘nerd’ 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
매우 ‘나만의 세계’가 좁은 사람이었고, 내 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거의 배척하는, 그리고 감성을 이성에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 그렇고. ^^)

그런데, 내게 큰 변화가 생겼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가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왔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마다, 도무지 어쩌할 수 없는 감격에,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무슨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게 아니냐고 주변에서 생각할수도 있었을만큼 (다른 이들 몰래 울었기 때문에,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다.) 몇달 동안은, 밤이고 낮이고 울었던 것 같다.
어떤때, 약간 여유(?)가 생기면, 학교 뒷산 같은 곳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통곡을 하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기도를 하다가 울고, 성경을 보다가 울고, 찬양을 부르다 울었다.
좋아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또 망가진 세상을 보며 울고,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며 울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희생의 피를 흘리시는 것을 생각하며 울고, 그것을 알아차리지못하는 군중 속에 내가 있음을 보고 울었다.

반면, 참 많이 웃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말 많이 웃게 되었다. 사람들을 보며 많이 웃었고, 특별히 같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정말 환하게 많이 웃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감사해서 웃기도 했고, 한끼 식사를 앞에두고 감사해서 크게 웃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에 크게 웃었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이전보다 훨씬 더 밝고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많이 웃고 우는 것은 그러나…
그 “회심의 기간”동안에만 있다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22-23년이 지난 지금도, 내 회심의 경험 이전의 나에 비하면, 참 많이 웃고, 참 많이 운다.
 

회심 (3) – 무척 이성적이었다.

소위 ‘회심체험’하면 이야기하는 갑자기 뽕 맞는 것(?) 같이 감정적으로 확~ 격양이 되더니 갑자기 신비한 체험을 하고, 감정적으로 뜨거워지고… 하는 식을 떠오르기 쉬운데,
내 경험은 그것과는 꽤 많이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어려서부터 많이 접해왔던 ‘복음’이 어느날 ‘새롭게’ 깨달아지게 되었다.
기존에 그저 파편적인 윤리강령 정도로 생각했던 복음의 여러 내용들이 한꺼번에 쭈루룩~ 맞추어 지면서, 정말 ‘말이 된다’하는 탄성을 터뜨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중에, 꽤 많이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이 있었다.
글쎄,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어느순간 성경말씀이 ‘말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정말 미친듯이(?) 공부를 했었다.
그 당시 기독교서점에 가서, 여러 대학생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교재들을 한 20-30권 한꺼번에 사다가 혼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한달에도 몇권씩 여러가지 신앙/신학 서적들을 읽어나갔다. 하루에 몇시간이고 성경을 읽고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처음 그렇게 읽었던 ‘한영 현대인의 성경’ 책은, 곧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 대단히 격렬한 감정적인 반응이 따라오긴 했으나, 그것은 이성적인 프로세스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만일 이 복음이 진리라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계관과 가치관이 모두 사상누각으로 허물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대단히 깊이 했었다. 그래서 소위 세계관, 신학과 철학, 역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과 과목’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회심 (2) – 불연속적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본격적인 ‘회심 경험’을 했던 것을 대학교 3-4학년 때로 보지만,(벌써…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군. ^^) 기본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건성으로나마 나갔던 이력등이 있으므로, 아예 무신론자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것과 같은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
어찌보면 상당히 답답한 모범생이었다. 대학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턱이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었다. 결국 찢어진 부분을 꿰메러 가면서도, 그것 때문에 수업을 빼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꽤 깊이 고민했을만큼, ‘샌님’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드러나는 대단한 일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위 ‘허랑방탕하게’ 살아본적도 없었다. 

소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던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불연속적인 경험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뢰할만한 신’이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고,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세계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매우 비뚤어진 형태이기는 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고등학교때 세례도 받았었다!

회심 이전에도 모범생이었고, 회심 이후에도 그 모범생의 길로부터 심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내가 회심의 경험을 했던 것이, 어떤 한번의 event라기 보다는, 대학교 3학년-4학년을 지나면서 넓게보면 2년, 짧게보면 몇달 동안의 기간에 걸쳐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이 찌릿한 경험을 했다거나, 입에 거품을 물었다거나(^^), 대단한 신비체험을 한것도 없었다. 그저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 경험을 하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회심경험이, 특별히 종교적인 배경을 거의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회심체험을 하던 그 2년여의 기간은, 도무지 내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아마 앞으로의 글들에서 이런 부분을 더 다루게 되지 않을까…)

대단히 불연속적인 경험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연속적으로 보일수도 있는 경험이었다고… 그렇게 애매하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회심 (1) – 우리의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가?

지난번 제주에서,
내 “기도멘토”인 동국이형과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동국이형이 “정말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었던걸까?” 라고 자문했던 것이었다.

동국이형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복음을 타협하는 사람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살마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정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직면하는 경험을 하면, 그 사람의 본질부터 달라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많이 부족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한 이후에, 삶이 근본으로부터 달라졌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일까?
혹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제한적으로 그 만남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우리와 같이 완악한 사람을 바꿀 수 있었는데, 왜 훨씬 더 선하고 좋은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의 경험이 특별하다는 말인가?

동국이형과 그 이야기를 나눈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도록, 내 머리속에서는 그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그래서,
내 회심 경험을, 앞으로 몇편의 글들을 통해, 나름대로 분석적으로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 내가 신앙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무기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 그리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정리해보고 싶다.
잘 될른지는…. 글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