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보다 덜 출세한 사람들에게 거는 희망

“하나님의 은혜로 내 능력보다 더 잘되었다” 라는 표현은,
믿음의 표현일까.

나름대로 주변에서 정말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주 전 세계에서 손꼽을만큼 성공한 사람도 보았고, 국가대표급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보았고, 동네에서 목에 힘좀 줄만한 수준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보았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정말 목에 힘이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전혀 예외가 없다.

성공이라는게 학문적 직업적 물질적 성공뿐 아니라, 하다못해 facebook 친구 숫자나 twitter follower 숫자까지도… 정말 성공은 그 사람을 반.드.시. 교만하게 만드는 것 같다.

많이 조심하고, 망가지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면 약간 나아지기는 하는데,
한단계 성공이 그 사람을 100만큼 교만하게 만든다면, 열심히 겸손하려는 노력은 그 사람을 5정도쯤 겸손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쨌든 어떤 사람이 가진 재능/talent는 중요하다.
정말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뛰어난 리더쉽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dilemma가 있다.

능력이 있어 성공을 하면 교만해지고,
그렇다고 능력이 없으면 훌륭한 리더쉽을 기대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그리고 희망을 걸어볼만한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만큼 잘 풀리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Steve Jobs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람중에서, 그저 조그마한 기업에서 봉급쟁이로 살고 있는 사람들.
Obama같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중에서, 동네 조기축구 총무수준의 리더쉽만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
수만명을 모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설교자들 중에서, 20여명 수준의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

음…
나는 어떤 정도에 위치하고 있을까?
내 능력보다 더 잘된 case일까, 그렇지 않으면 능력만큼 잘 되지 않은 case일까. ^^

내가 지지하는(?) 후보

http://www.isidewith.com/elections/2016-presidential-quiz

인터넷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면서, 내가 지지할(?) 후보를 찾는 quiz를 찾아서 해 보았다.

Sanders와 많이 align되는 것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Trump와 자그마치 59%나 일치하는 건 상당히 충격이었다! ㅎㅎ

수년전에 비슷한걸 했을때엔, Dennis Kucinich 와 제일 잘 align 되는 것으로 나왔고,
Republican 후보들과는 거의 공통된 의견이 없는 것으로 나왔었는데…

그래도 내가 조금은 보수화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같으면 거의 ‘적군’ 이라고 생각했을 Rand Paul 같은 사람과도 50%가 넘는 일치를 보이고 있으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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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를 꼴불견으로 만드는 사람들

여러종류의 사람들을 당연히 많이 만났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심지어는 가족간의 관계나 친구간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크게 두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내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실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실제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쉽게 목에 힘주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괜찮은 사람인가를 이야기하는데 관심이 많다.

두번째 부류는, 그분에 비교해서 보았을때, 내가 꼴불견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들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실제보다 나 자신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얼마나 중요하도록 여겨지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 드러난다.

내 바람은,
내가 더 많은 이들에게 두번째의 사람이되는 것이다.

분노를 거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표현을 하지만,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신다.
그것이 창조의 의도였고, 그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plan A 이다.

나는 내 세계관이 매우 적극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한국의 민주화를 겪었다.
독재가 시민의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사회가 급격히 투명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지금도 한국 사회가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지만, 40년전의 한국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래도 훨씬 나아지지 않았는가.
–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들을 거치면서 많이 투명해진 사회를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일부 되돌리긴 했지만…

나는 사람이 정의를 위해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많이 살았다. – 그리고 그것은 내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내 동년배 즈음의 소위 ‘기독 청년’ (지금은 기독중년이라고 해야하겠지만..)의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지.
자기의 조국이 지옥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죽을만큼 지긋지긋하게 힘들다고.

대충 나보다 20살쯤 더 어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이 지각할 수 있는 시기에 적극적인 역사의 진보가 한국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정도가 가장 강력한 기억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에 대해서도 덜 낙관적이고,
그나마 미국에서 오바마 정권이 바꾸어나가는 것을 부러워하는 수준에 머무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세상에 공의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맛보았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것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맛보고 있는 세대라고나 할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나가신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 속에 스며들어 온,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탈색시키고자하는 하나님의 버티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향해서 분노하며 주먹을 쥐고 이 세상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했던 시대와는 달리…
이제 그 분노 마저도 거세시키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기도는 이것이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는 중에서라도, 너무 침묵하지만은 말아주십시오.
지금은 사방에서 모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만 계신것 같아 보입니다.

부도덕한 정치가 세상을 장악하고,
크리스천들은 우매하거나 독기가 올라 있거나 둘중 하나인 것 같아 보이고,
사랑이 실종되고,
사람들은 더 망가지고, 그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만 보여주십시오.

광복70주년을 맞이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원문과 서명 링크는 이곳을 클릭

한동안, 이런것 열심히 서명하고 참여하고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동안, 이런것 거의 서명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이 글을 읽어보니, 참 잘 썼다.
내가 깊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약간 견해를 달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내가 약간 내 의견을 유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이런 것이 정말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서명하였다.

아직 이 글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은, 한번 꼭 읽어보길 적극 권한다.

언니를 보고싶어 하는 하이디

지난 두주 민우가 writing camp를 갔었다.
민우가 없는동안, 하이디는 민우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

민우 방 앞에서 가만히 민우 방쪽을 보고 앉아있기도 하고,
민우방에 혼자 들어가서 두리번 거리며 민우를 찾다가 왜 언니가 없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하고,
민우 없는 빈방에 혼자 들어가서 민우 침대 옆에 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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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민우를 그렇게 그리워한것은 하이디만은 아니었다. ^^

어떤 복음의 신비

말씀으로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다보면 결국 어떤 사람의 삶의 깊은 이슈들에 엮기게 된다.
그래서 말씀을 앞에 놓고 삶의 문제를 다루다가 도무지 그 사람의 아픔과 문제를 더 듣는 것이 어려워져서 그저 마음을 떨구고 앉아있게 되기도 한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혹은 그 사람과의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무지 마음이 추스려지지 않아서 몇번이고 큰 숨을 몰아쉬고 정신을 차려야할때도 있다.

최근에도,
어떤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었던 복음성가가 도무지 마음을 달래주지 못해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원 노래를 틀어놓고 한동안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고는 복음의 어떤 특별한 부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말씀으로 세워주려하다가 그 사람의 아픔에 내가 함몰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경험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해준다.

어떤 영적 리더들에게서 때로 특정한 종류의 답답함이나 밋밋함을 느끼게 되곤 하는데,
그것은 그런 영적 리더들에게 바로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그렇다.)

지난 주말,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자기가 말씀으로 섬기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대해 아파하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내게 텍스트를 보내 주었다.

나는 이메일로 이야기해주었다.
네가 복음의 신비를 깊이 경험하고 있구나…

신약백성에게는 구약백성과는 다른 방식의 선교가 제시되었다는 의견에 대하여 (배우고 자라는 하루)

제가 잘 아는 사람이 ^^
지난 화요일의 제 글에 좋은 reply를 달았기에, 아예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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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9에 나오는 declare the praises of him [NIV] 또는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ESV]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43:21에 나오는 declare my praise [ESV]와 (chosen people이라는 공통점도 pivot으로 작용하여) 비슷한 표현인데, Joel Green은 이것을 두고, 베드로에게는 구약의 vertical language와 신약의 horizontal language가 다르지 않았다고 해석했더군.

베드로의 편지와 그의 동료 요한의 편지 모두, 편지 전체 그림을 놓고 볼 때 그 선포의 형태로 삶의 방식 (거룩과 사랑, respectively)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자세를 넘어서, 선포의 형태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더라구.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형도 주지했듯이, 이 두 사람의 행동들 (selected and recorded by 누가) 을 보면, 예수의 삶/죽음/부활을 설명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채워나갔으니…

이 두 가지가 단순 상보적이지는 않을진대, 결국 적어도 이 두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그 핵심적인 교집합을 간과한 결과인 것 같은데. 이 둘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든지 강조점을 두는 것은 contextual matter일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등장으로 선교의 컨텐츠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정립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싶네. 예수가 이스라엘됨을 성취한 것은 맞지만, 그 성취를 구현하는 몫은 남겨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이 편지에서 권하는 삶의 방식의 핵심을 예수에게 잇대는 모습이 분명해 보이고.

The Sent – 내 묵상 (15)

내 개인적으로,한때 대단히 missional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기간이 있었다. (지금도 사실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정말 missional한 것일까 하는 진지한 의문과 고민이 생겼다.

내가 무슨 기독교 사역을 열심히 하고 하지 않고에 관련된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서 하고계신 큰 그림과 align되어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가깝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며 아주 힘들고 지루한 전도과정을 거치고, 어려운 사람을 말씀으로 돕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나누고,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고…
게다가 말씀 묵상과 기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이런것들 다 열심히 하는데, 과연 이게 missional 한 것일까,
과연 이게 영속하는 가치 (lasting value)에 충실한 삶인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나는 열심히 사는 종교인인걸까.

금년은 코스타 30주년 이었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나름대로 내가 코스타를 섬겼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조금 더 크게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내 고민은 큰데 해답은 멀게 느껴진다.
아마 계속해서 더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어쩌면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고민을 하는 긴장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생각들이 있지만, 일단 이 시리즈의 글은 이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보는게 좋겠다.

자, 이제 컨퍼런스에서 무슨 가르침들이 있었는지 한번 본격적으로 배워봐야겠다.

The Sent – 내 묵상 (14)

Chris Wright은 구약학자이다. 복음주의 구약학자 (Evangelical OT scholar)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개념을 복음주의로 가지고 온 것은 대단히 brilliant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러한 개념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서술했던 것과 같이, 구약시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premise가 달라졌다.
구약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던 반면,
신약은,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그것을 성취하신 시대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일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인건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서두…)

사실 사도행전이나, 기타 서신서에 드러난 신약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기 보다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책을 건성으로 보아서 그런진 몰라도,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차드 헤이스의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를 읽겠다고 작정만하고 읽지 못한지 벌써 몇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와 연관시켜서 좀 더 공부를 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