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논리를 넘어서는 관용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꽤 내 나름대로 선호하는 정치집단이 뚜렷한 편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싫어하는 정치집단이 뚜렷하다고 해야하겠다.)

사실 지난주 내내 다음의 비디오에 나오는 욕들을 실제로 써가며 이 ㅆㅂㅅㄲ들을 몽땅 까부숴주시도록 기도했었다.

이렇게 내 ‘진영’을 밝히는 이유는,
내 ‘진영’쪽에서 나오는 어떤 이야기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최근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영성일기’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가 엄청나게 비판을 받았다.
나도 그 글을 읽었었고, 읽을 당시 그리 마음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었고, 이 시점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을 비판하는 글들을 읽으면서는 그것보다 더 많이 불편했다.
마치 그 목사님이 무슨 최순실의 꼬붕이라도 되는 것 처럼 정말 엄청나게 달려들어서 물어뜯었다.
결국 대형교회 목사의 한계라느니, 그런 사고방식이 독재를 부른다느니…

그러나,
비록 내가 fully 동의하는 신학적 관점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정치적으로 바로 행동하기 전에, 혼란스럽고 무서우니 오히려 주님과 더 가까이 하겠다고 생각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정말 그렇게 비난받아야할 일인가?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비난받아야할 기독교계의 목소리는,
박근혜를 앉혀두고 사탕발림으로 어거지를 쓴 일부 한기총 계열의 목사들이다.
권력 친화형, 거짓선지자들.
나는 이 목소리는 분명히 잘못된 현실인식과 왜곡된 성경해석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했던 더러운 경험과 함께 역사 속에서 ‘쓰레기’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려는 어떤 시도나 생각을 그렇게 ‘악’으로 규정해서 몰아붙여야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기독교계에서 그런 신비주의적 영성과 같은 접근이 기독교를 post-modern generation에서 더 accessaible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말 Bernie Sanders를 지지하고, 썰전의 유시민에 열광하고, 이재명의 광화문 연설을 반복해서 들으며 좋아하고, 그렇게 정치로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만 기독교에 남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맞서서 싸워야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에 더 우선순위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관용을 가져야하는건 아닐까?

정말 글쓰기가 안된다.

어제도 인터넷을 보면서 완전 쌍욕을 해 대었다.
사실 무당에 의해 조종당한 공주년 얘기 말고는 여기 다른 얘기를 쓸 수가 없는데…
그 얘기는 이미 인터넷이나 여러곳에 좋은 얘기들이 많이 있어서 (물론 나쁜 얘기들도 있지만…)
따로 여기에 내 짧은 생각을 더하는건 큰 의미가 없지않나 싶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서 이 쌍놈의 새끼들을 개패듯 패주시도록 기도하는 것 말고는 따로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세월호 아이들 불쌍해서 어쩌냐.
대한민국 국민들 불쌍해서 어쩌냐.

글로 담기엔 너무나 거친 아주 심한 욕이 가득담긴 기도를 계속 하고 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만 글쓰기를 쉽니다

어제 글은 쓰고서도 약간 후회를 했습니다.
논리도 없고, 사색도 없고, 그저 감정만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루나 이틀정도만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다시 글쓰기로 복귀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이럴때 일수록 힘내십시오. ^^

정말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다

진짜 뉴스를 보면서,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다.

이런 정도라면 탄핵을 하고, 그 후에 사법조치라도 해야하는거 아닌가. (한국)
이런 정도라면 조사를 해서 사법조치를 하고 실형을 살게해야하는거 아닌가. (미국)

이명박, 박근혜 같은 인간들 대통령이라고 지지한 한국 교회가 말로 다 할수 없이 부끄럽다.
Trump를 지지한다고 달려드는 미국 교회가 미치도록 부끄럽다.

정말 미치도록 화가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부끄럽고,
시름이 깊도록 걱정스럽다.

이명박, 박근혜, Trump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최소한 한 10년간은 투표권을 제한해야하는거 아닌가.
말도 안된다는거 잘 안다. 그렇지만 하도 화가나니, 이렇게라도 좀 venting을 해야….

87년 대선때,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서 기도했다는 어떤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금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어떤 사람들이 정말 있을까.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만이라도 좀 들리면 내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을텐데…

(나라도 그렇게 기도해야할 모양)

어제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박근혜가 연설하면서 이렇게 했단다.
“고심 끝에 헌법을 해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일 오후 루틴

민우는 런닝맨을 좋아한다. ^^
나도 덕분에 런닝맨을 좋아하게 되었다.

주일 오후에는 민우와 함께 (가끔은 엄마도 다 함께) 런닝맨을 보는 것이 루틴이었다.
민우는 그걸 보면서 까르르 웃고, 나는 그렇게 웃는 민우를 보는게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민우가 아무래도 수험생이다보니… 시간이 잘 나질 않는다.
주일 오후에도 할일들이 꽉 차 있어서 한시간씩이나 그렇게 한가롭게 앉아있을 여유가 매주 나질 않는다.

그렇게 매주 함께 보는 일을 멈추고서, 한동안은 나 혼자서 런닝맨을 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재미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민우와 이렇게 런닝맨을 보는 일이 앞으론 정말 없겠구나 싶어…
괜히 더 서운해졌다.

빨리 바쁜 일들이 좀 끝나고,
민우와 함께 런닝맨을 볼 여유가 좀 생겼으면…

사람의 잘못과 시스템의 잘못

어떤 사람을 잘못을 저질렀을때,
그것을 그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은 꽤 단순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공해준다.

가령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나찌 독일의 아이히만을 생각해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이 사람은 독일의 ‘공무원’이었다.
이 사람이 담당했던 것은 유태인 학살의 logistics였다. 많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수송하고, 죽이는 과정을 아주 꼼꼼하고 완벽하게 잘 해내었다.

나중에 이 사람을 전후에 찾아서 보니, 이 사람은 악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매우 그저 성실한 사람이었다.
대단히 성실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물론 아이히만이 한 일을 정당화할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저 system이 요구하는 일을 성실하게 했을 뿐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했을 뿐이라면?

사실 아이히만을 비판하고자할때에는 반드시 나찌독일의 광기를 먼저 잘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context가 아니면 아이히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말하자면 시스템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안의 성실한 사람이 악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가 개인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을 죄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system을 죄로부터 구원시킨다.
아니 온 피조세계를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시기는 것이 기독교이다.

어떤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개인의 죄는,
사실 상당부분 그 사람이 살고있는 그 세상의 죄가 투영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럴 경우 모든 개인의 죄만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가지고 온 피조세계의 구조적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
죄는 그렇게 훨씬 더 조직적이고 구조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어그러짐으로 개인의 죄를 무마해버리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못하다. 개인의 죄가 분명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죄를 넘어서는 시스템의 어그러짐을 제대로 다루어야 비로소 죄와 악을 좀 더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Ready to Vote?

지난 월요일,
우체통에서 우편물 확인을 하다보니 이런 메일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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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민우가 투표를…
하긴 이제 며칠 있으면 민우가 만 18세가 되니, 이번 선거가 민우로선 첫번째가 되겠구나.

민우는 정치적 입장이 나와 아주많이 비슷하다.
몇달전까지 Bernie Sanders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심하게 낙담하였으나,
지금은 Clinton의 비판적 지지자가 되어있다.
민우 laptop에는 Bernie Sanders 지지 스티커가 붙어 있고, 불과 몇주전까지만 해도 학교 가방에 Bernie Sanders 뱃지를 달고 다녔다.

사실 나는 민우와 여러가지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동성결혼 합법화 문제, 불법이민 문제, 중동평화 문제, 미국의 소득 불평등 문제, Black lives matter movement같은 것들, 마약문제 등등에 대해 내가 시간만 있으면 이슈를 던지고 민우의 의견을 묻는다.
때로는 아주 근본적인 정치적 입장의 문제, 과연 liberal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문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민우는 아직은 고등학생이므로,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생각들이 많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민우의 정치적 성향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포인트인것 같아 보인다.

내게는 한없이 어린 우리 민우가 벌써 투표할 나이가 되었다는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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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중립이 되는 것과 올바른 길에 서는 것

나는 기독교가 어떤 특정 정파와 ‘결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경으로부터 지지받기 대단히 어려운 자세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정치적 중립’과 같은 입장을 완전히 깨버리고, 어느 한 정파를 과감하게 공격하고 심지어는 그 정파를 갈아엎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가령,
4.19때 정상적인 지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학생들과 함께 시위했어야 한다고 본다.
6월 항쟁때에는 서울시청앞 광장에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이게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규정하기가 어렵다. – 그것은 사실 좋은 일이다.
두개 혹은 그 이상의 정파가 있을때 다른 한쪽을 demonize하지 않고 한쪽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성숙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쪽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정말 ‘악’하다면?
그렇다면 3.1운동때 태극기를 들거나, 4.19때 경무대 앞에 가거나, 6월항쟁때 시청앞에 가듯… 그 ‘악’과 대면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악’을 너무 쉽게 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심지어는 3.1운동이나 4.19 같은 상황에서도 그렇게 한쪽을 악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이 위험한 것을 넘어 잘못일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느 한쪽 정치집단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서서 ‘악’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럴때 비정치적이되거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악과 타협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어떤 공주님 정치인과 그녀를 둘러싼 정치집단과(그리고 4대강 삽질한 그 전 정치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어떤 대통령후보를 보며…
이럴때는 무엇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가를 따져야할때가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따져야할때라고 생각한다.

독서와 사색

요즘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는다고.
음… 나를 포함해서 물론.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

그런데,
요즘 생각은 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색이 아닌가 싶다.

독서는 많은 경우 지식을 공급해 주지만, 사색은 그 지식을 하나로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색은 독서를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독서를 많이 하더라도 사색하지 않으면 지식이 그저 꿰지 않은 구슬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색을 하라고 독려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Christian circle에서 ‘사색’이라는 것을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종교화 해버렸다.
그래서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깊이있는 사색과 사고를 멈춰버린채 그저 종교적 만트라만을 되뇌이도록 훈련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라면,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책을 읽으려 하지 말고,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워라.
그리고 생각이 한계에 다다를때 그 생각을 넓히기 위해 책을 읽어라.

독서없는 사색은 부족한 사색이되지만
사색없는 독서는 그나마 아무것도 아니다.

Stanley Hauerwas: How much a Christian earns shouldn’t be private

Stanley Hauerwas가 한 짧은 interview clip이다.
아주 아주 흥미로운 point였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서로의 income이 얼마인지를 다 나누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실험을 우리 공동체에서도 해볼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