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에 대해서 (어제 글에 이어서)

아니, 세상에 스승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
그렇게 많은 스승들 가운데서 네 스승을 찾지 못하는건 네 문제이다.
네가 교만한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듯 하다. ^^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스승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진정한 스승의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스승의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그냥 순전히 내 생각이다. ^^

1.진정한 스승은 자기를 바라보도록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을 만들기 보다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유명한 교회의 교인이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것, 유명한 기독교 단체나 모임의 멤버가 그 리더나 창립자를 추종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장로님이, 저 목사님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추종자들이 다 같이 개종하겠다… 싶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

2.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도록 돕는다.
정말 자신의 신념에 헌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제자에 의해서 그 신념이 더 발전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나게 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역할은 자신만큼 제자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제자들이 자신을 뛰어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스승이 제자를 tightly control하면 안된다. 그러면 제자가 스승을 넘을 수 없다. 부족하더라도 제자가 실수하도록, 심지어는 망하도록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방식으로 제자들을 키워내면… 제자들 그룹이 조직화 되기 어렵고, 따라서 큰 그룹으로 자라나기 어렵다.
반면, 조직화되고 큰 그룹으로 자라난 모임이나 조직에서는 진정한 스승-제자 관계가 만들어지기 대단히 어렵다.
대형교회, 대형선교단체 등등에서 그 창립자를 뛰어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언뜻 떠오르는 case가 내게는 없다.)

3. 진정한 스승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 제자를 키우는 것 자체가 그 스승에게 보상이다.
그에 따른 어떤 보상 (금전적 보상, 사회적 인정, 사람들의 존경 등등)이 부차적으로 올 수 있으나 그 부차적인 것들을 우선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승이 되기 어렵다.

스승의 날에

나는 정말 존경하고 따를만한 스승이 늘 없다고 여겼다.
세상에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정말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내 스승이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도 만났었고,
신앙으로도 참 존경할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 사람들을 직접 ‘내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관계를 갖은 적이 없었다.

물론,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 사람의 name value가 좀 도움이되었을 뿐, 사실상 대부분의 공부와 연구는 혼자서 해야했었다.
아주 뛰어난 책을 쓴 다른 학교의 교수님이라던가, 훌륭한 논문을 쓴 유명한 사람들로부터 좋은 insight를 얻긴 했지만 그분들이 스승은 아니었다.

신앙적으로도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나를 이끌어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저 분이라면 내가 계속 내가 따라야할 모범이라고 여기고 갈 수 있겠다… 싶은 분이 없었다.
어떤 한 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으로부터 좀 배우고 나면… 아… 이분으로부터는 여기까지 배울 수 있겠구나 싶어 관계가 좀 달라지게되는 경험만 많이 했었다.

20대에 그래서 정말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배울 스승, 선배를 간절히 찾았다.
정말 간절히 찾았다.
주위에서 그렇게 찾을 수 없어 나는 책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스승들을 찾아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부터 많이 도움을 얻었다.
그렇지만… 정말 스승은 아니었다. 인격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이 들어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도움이되는 스승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꼭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내 삶과 생각 자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평생을 살면서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사람으로 나를 딛고 가는 사람 5사람만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을 가졌었다.

이제 40대 후반이 되어서,
나는 이제 그 소망을 사실상 버렸다.

나로부터 누군가가 그렇게 배울만한 사람일까 하는 것이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사 조금 나로부터 배울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관심을 갖는 사람도 별로 없다. ^^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삶과 생각의 궤적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수만 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비록 나는 그런 스승이 될만한 자격이 되지 못하지만,
세상 어디에선가는 정말 건강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만이라도 좀 들어볼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한때 스승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한때 스승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정말 어디엔가 있을 참된 스승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응원한다.

가치와 관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가치일까 관계일까.
사람을 헌신하게하는 것이 가치일까 관계일까.

가치를 충분히 자기것으로 하지 못한 사람은,
어설픈 관계로 가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또한,
관계를 무시한채 가치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관계가 자주 가치를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여 실패한다.

노무현이라는 상고 출신의 정치인은,
지금까지 그를 따르는 많은 추총자를 낳았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계승하겠다는 유력한 정치후계자들을 만들었다.

문재인이나 안희정을 움직였던 것은 가치였을까, 관계였을까.

헌신

며칠전 유시민이 한 인터넷 방송에 나와서 한 이야기가 마음에 참 와 닿았다.

개요는 이렇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위기는 진보진영의 공격으로 인해서 왔었다.
동시에 여러 진보진영의 언론과 단체들이 노무현 정부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서 집권 6개월 안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때 참 많이 아쉬웠던 것은 ‘내편’이 되어주는 지식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권이 바뀌면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 그렇게 새 정권을 돕고 싶다.

이 내용은 김어준이 유시민에게 ‘총리’ 생각이 있느냐 이런 류의 질문을 하는 context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유시민의 이 이야기가 참 감동적이었다.
유시민과 정치적 견해를 함께 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유시민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출세/영달 보다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로 세워지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리가 되거나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꼭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헌신’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명분하에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다.

자기의 밥그릇을 챙기고 싶은데, 이왕이면 더 뽀대나게 하나님나라 라는 명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해도 좋으니,
내가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좋으니,
내가 그 속에서 심지어는 망가져도 좋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자유주의 (liberalism)의 가치에 헌신한 유시민의 헌신이 부럽다.

솔직히 말하면… 나 울었다.

여기 시간으로 9일 새벽 2시 반쯤에 일어나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인터넷을 뒤져가며 들었다.
여러 글들과 주장들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4시에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나는 울었다.
문재인의 광화문 연설을 들으면서 또 울었다.

솔직히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 부패와 독재와 수구의 세력이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키고 marginalized되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정권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절망, 그리고 나중에는 냉소에 빠져 있었다.

문재인이 광화문에서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정되고서 만난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이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울었다.
그 세월호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이번에 첫번째로 투표할 수 있는 선거였을 게다.

불과 몇달전만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모습의 대통령과 청와대의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참 많이 설레었다.
하루만에 나라가 바뀐 느낌.

하지만,
새로운 정권에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걸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중이다.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에는 여전히 한계가 많이 있다는 것을 자꾸만 되새기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하루쯤은 그렇게 울어도 되지 않겠나.

이해가 되지 않는….

두주 전,
잘 아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홍준표를 지지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냐고 부드럽게 대화를 넘겼지만,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좀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정책과 사람을 지지하는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준표가 20%가 훨씬 넘는 득표율로 2위를 하는 것을 보고,
게다가 대구경북, 경남 지역에서 심지어 1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게다가 경북은 과반! -.-;)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지난 봄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때,
구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이가 좀 든 임원은 여전히 새누리당-박근혜가 상대쪽보다 더 좋다는 입장이었고 그 아래 있는 젊은 부하직원은 아무리 그래도 박근혜나 새누리당을 이 마당에 지지할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 그 좁은 지역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게 어떻게 가능할까…
광주와 같이 어떤 정치적 피해자가 되었던 기억이 있는 지역도 아니고…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미국도 트럼프를 당선시킨 나라가 아니던가.
영국도 Brexit을 통과시킨 나라가 아니던가.
다행히 프랑스는 좀 이성적인 선택을 했지만…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커다란 논리적 비약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적 비약은 흔히 분노나 두려움과 같은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나는 새로운 대통령이,
적폐세력을 강력하게 청산하고, 언론개혁, 검찰개혁, 정부조직 개혁, 재벌개혁, 개헌 등을 통해서 정상적이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노력하길 바라지만,
반면 그런 비상식적 행동을 할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사회적 대화가 좀 열리는 시대가 되면 참 좋겠다.

어쨌든 내가 지지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ㅎㅎ

징크스

내가 어릴때,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 아니었다. ^^
70년대 후반에 되어서야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금메달을 하나 딸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손기정 선수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어릴때 흑백 TV를 보면서 축구나 한일전 같은걸 보면서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컬러 TV를 들여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하는데, 한일전 야구 무슨 결승전 같은걸 했었다.
그때 김재박이 신기한 번트를 하고 한대화가 3점 홈런을 쳐서 극적으로 이겼던 경기였다.
나는 스포츠에 빠삭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번씩 중요한 경기를 보면서 ‘우리팀’을 응원했었다.

그런데,
내가 어릴땐 이상한 징크스 같은게 있었다.
내가 보기만 하면 우리편이 지는거다.
그러다가 내가 안보면 우리편이 좀 더 잘하고.
(아마 그런 비슷한 경험 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ㅎㅎ 이게 통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므로)
그래서 중요한 권투경기가 있다거나 할때 나는 일부러 그 중계방송을 보지 않을때도 있었다.

오늘 밤, 이곳 시간으로 4am 에 출구조사가 발표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일찌감치 잠을 청할 예정이다.
출구조사가 발표되기 전까지 나는 뉴스를 기웃거리거나 그런 짓을 하지 않으려 한다. ㅋㅋ

천재의 두가지 유형

학교 다닐때,
교수님들중 ‘천재’로 소문난 분들이 좀 계셨다.

그렇게 천재로 소문한 교수님들은 대개 두가지 부류 가운데 하나였다.

첫번째 부류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속 터져하는 교수님들이었다.
이런 교수님들에게 걸리면 죽음이다.
완전 주눅들고, 들들 볶임을 당하고, 자존감 땅에 떨어지고, 일은 죽어라고 하고…

두번째 부류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오지 못할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매사에 무지하게 너그러운 교수님들이었다.
이런 교수님들에게 걸리면, 대박이다.
뛰어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 천재로부터 배우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좀 덜 뛰어난 학생들도 그 너그러움 속에서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땐 정말 두번째 부류의 교수님이 정말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나… 아주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떨어지는 사람도 아니라면…
첫번째 부류의 교수님으로부터 더 뭔가를 배울 수 있게 될 가능성도 높고, 그래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지만,
가끔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누군가를 이끌고 지도하고 키워야할 때 이 생각을 많이 한다. 직장에서건, 기타 다른 세팅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혹은 내가 뭘해도 안되겠다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마냥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내 존재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다 싶은 사람들에게는 뭔가 더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가 이런 과정에서 판단을 잘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
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거다… 그렇게 위안을 해본다.

정치에 소망을 덜 두기

내가 지지하는 정파가 늘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 실망을 줄여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소망을 덜 두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지지하는 정파라 반대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내 과도한 기대를 줄여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소망을 덜 두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정치가 정의를 이루는데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정치는 또한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 무엇인지를 잊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독재자가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해 3S (Sex, Screen, Sports) 정책을 썼다면,
혹시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백성들의 관심을 궁극적 소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정치라를 tool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존 하워드 요더나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다시 곱씹어 보려고 노력한다.
잘 안되긴 하지만. ^^

잘하면… 이번에는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2004년 Red Sox가 World Series를 우승하는 것을 구경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눈물

나는 국민학교때 전학을 많이 다녔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주에서 서울로 이사가는 바람에 전학을 했다.
4학년을 마치고 다니던 학교가 너무 커서 분교가 되는 바람에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5학년을 마치고 부모님이 국민학교 졸업 전에 조금 더 좋은 학교 한번 다녀보라고 ‘사립’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또 한번 옮겼다.
그렇게 전학을 할때마다 나는 참 많이 울었었다.

국민학교때 담임 선생님이 나보고 ‘남자가 그렇게 눈물이 많으냐’고 뭐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

대개 내 나이쯤 되면 홀몬에 변화가 생겨서 눈물이 더 많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 많던 눈물이 다 없어진 것 같다.

요즘 내가 눈물을 흘릴때는,
마음을 찢으며 기도할때 뿐이다.

대학때만 하더라도,
가요를 듣다가 울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보고 울고, 좋은 글을 읽다가 울고… 한번은 비오는날 기숙사에서 짝퉁 워크맨에 꽃혀있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울었던 기억도 난다.

때론 눈물이 그립다.
지난 주말에, 우연히 youtube에서 다음의 노래를 들었다.
살짝 눈물이 났다.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