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누가복음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자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내 자세를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

아… 정말 내가 많이 해이해져 있었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정말 대단히 급진적이고, 그것에 all-in하도록 요청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다른 것을 병행하는 것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한것.

그러니…
에이, 그래도 이만큼이면 된거지…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지…
그런 식의 자기 합리화와 안주가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어 보인다.

얼굴이 벌개져서 소리를 고래고래지르는 광기의 종교인이 되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지만,
살아가는 자세와 방향의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한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아름답다.

이번주는 계속 여행중

이번주는 오랜만에 미국내 출장중이다.
월요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서는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6사람이 함께 다니는데 아침 7시부터 저녁식사까지 모두 함께 하고, 그 후에는 저녁에 wrap-up 미팅들을 해가며 빡빡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아… 힘들다. ㅠㅠ

욕망의 문화가 만드는 루저

한국의 미디어등에서 소위 MZ 세대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미국에서는 밀레니얼들하고 Gen Z를 함께 엮는 경우가 있던가 싶은데.
그래도 한국에서는 M과 Z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보통 MZ세대를 이야기하는 특징으로 이기적(?)이고, 감성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것을 많이 미디어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단지 M이나 Z세대 뿐 아니라 그냥 다른 세대의 대중을 행해서도 이기적, 감성적, 욕망지향적인 것을 거의 조장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여러가지 광고도 그런 욕망의 문화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 같고,
마치 온 세상이 욕망의 문화에 빠져 있는 것 같이 보이곤 한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밀레니얼이나 Gen Z들이 그렇게 미디어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냐하면…
아닌 것 같다. 아,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소위 ‘성공’하고 있는 밀레니얼이나 Gen Z들은 오히려 그 윗세대가 만들어놓은 system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자유 자재로 활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윗세대와도 충분이 말이 아주 잘 통한다.

그리고 M세대나 Z 세대가 드러낼 수 있는 창의성과 새로운 감성들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놀랍다. 정말 세상을 움직일만하다고 느끼게 한다.

나는…
결국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미디어에서 그리는 대로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대다수의 ‘루저’로 주저앉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러니,미디어에서 그려내고 있는 욕망의 문화는 대다수의 루저를 만들어 내고 있고,
그것을 뛰어넘어 일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 대다수의 루저를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M과 Z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기업같은 경직된 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욕망 지향적 문화가 대세이니 그것을 충분히 indulge하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문화가 절대다수의 루저들과 극소수의 엘리트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든다.

주기도문으로 하는 기도

나는 기도를 참 잘 하지 못한다. ㅠㅠ
꾸준히 기도하는 것도 잘 하지 못하고, 깊이 하는 것도 잘 하지 못하고, 많이 하는 것도 잘 하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주기도문으로 하는 기도를 열심히 해보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한줄을 하고서는 그 뜻을 마음에 깊게 새기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연관된 여러 기도의 내용들을 떠올리며 기도한다.

또, 가령…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 구절을 외고는, 여러 필요에 대한 기도를 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구절에서는 지금 ‘악’과 싸우는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
병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마음의 상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사회 정의와 정치를 위해서도…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니,
나름 내 기도가 조금 나아진 느낌이 살짝 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참 좋은 template이구나…. 하는 생각.

어떻게든 조금 더 깊게, 많이, 꾸준히 기도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은데…

Silicon Valley Bank

실리콘 밸리 은행 (Silicon Valley Bank)라는 은행이 망했다.
기본적으로 미국 정부가 그 은행의 자산과 예금을 모두 몰수해서 새로운 ‘국립’은행을 만들었다.

이 은행은 실리콘 밸리에서 많은 start up 회사들의 돈을 가지고 있는 은행이다.
만일 이 은행이 정말 완전히 망해서 문을 닫았더라면 아마 실리콘 밸리의 수많은 start up 회사들이 줄줄이 망했을 거다.
아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미국 정부가 얼른 뛰어든 것 같은데…
아마 오늘 이후 이게 어떻게 되는지에따라서 이 파급효과가 얼마나 클지 조금씩 더 드러나게 될 것 같다.

나는 이런 쪽 잘 모르지만,
꽤 섬뜩해지는 지난 금요일의 뉴스였다.
심지어는 우리 회사의 CEO도 아침 일찍 우리 회사는 괜찮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우아…
정말 꽤 혼란스러운 경제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꽤 효과적인 금식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내 전화에 있는 게임들을 모두 지웠다.
게임이라고 해봐야 한 10분만에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나 아케이드 게임들이다.
아주 심각하게 총쏘고 그런건 잘 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그것에 쓰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을 모두 지웠다. (그래도 그렇게 지운 것들이 거의 10개쯤 되었다.)

그랬더니만…
지난 한주정도 동안 약간 시간이 빌때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살짝 당황하곤 했다.
음… 내가 진짜 그렇게 그 게임들을 많이 했고, 그것이 습관으로 내게 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매우 놀라운 건,
그 짧은 시간동안 게임을 하는 대신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실제로 꽤 쓸만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혹은 ‘묵상’이라고 이야기해볼수도 있겠다.)

지난 몇년간 내가 했던 금식들 가운데 가장 쓸만한 금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다.

바쁘지 않기로 결심

내가 많이 바쁘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음… 뭐 아주 설렁설렁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죽을만큼 바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어느정도 ‘사랑할 여유’를 남겨두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어느정도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때로 내가 해야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많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고,
그러면 그야말로 overwhelm되어서 (이걸 한국말로 딱 옮길만한 적당한 표현이 없다. 압도당한다는건 너무 감이 좀 쎄고..) 허덕거릴때가 있다.
그러나 늘 overwhelm되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늘 힘든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해야하는 일들을 다 해내기 위해서 꽤 삶 속에서의 효율성을 확보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시간’에 대한 강박이 좀 심하다.
약간 빡빡하다 싶게 하루 계획, 일주일 계획등을 짜놓고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빠듯하게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그 계획을 중간에 쉽게 바꾸는게 쉽지 않고,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이 내가 엄청 바쁘게 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바쁠때 내게 무엇인가 도움을 요청하면 내 일정을 조정해서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은, 여전히 내게 힘들때가 많다.
그러나 그건 생각해보면 내가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쫓겨서 그런 것이다.

바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는 일이 내겐 필요해 보인다.
이미 내게 시간은 꽤 충분히 있는 것 같다.

A Way Other Than Our Own

월터 브루그만의 사순절 묵상집 “A Way Other Than Our Own”을 계속 보고 있다.
민우가 매일 그걸 읽어서 녹음을 해서 보내주고 있어서 그걸 들을 수 있어 도움을 얻고 있다.
그리고 물론 민우에게 그걸 부탁하면서 민우도 매일 함께 읽도록 하고 싶었다.

월터 브루그만의 생각을 좋아하지만,
때로 나는 그냥 그분이 너무 한쪽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묵상집을 조금씩 보면서,
아, 이분은 정말 ‘신앙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좋은 믿음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

참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살고 싶다.

Gospel not big enough?

이것이 얼마나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게는 일종의 working theory가 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얼마나 큰 것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짓는 다는 것.

어떤 사람은 복음을 알게된 이후, 자신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경험한 것 전체는 완전히 재해석하고,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복음을 알게된 이후에도 자신이 받았던 교육, 자신이 생각해왔던 사고방식, 자신의 성품, 자신의 상처 등등에 여전히 사로잡혀 살기도 한다.

그건 변곡점은 물론 한순간에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삶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복음이 그 사람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있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에 사로잡혀 살지 못하게 된다.
이게 유치하게 그 사람이 구원받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식의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난히 자신이 받았던 상처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것은 당연히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상처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의 배리어를 넘어서는 수준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비로소 그 상처를 넘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영적 지도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음을 경험한 만큼 그 사람은 자신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을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
얼마나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순절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은 나를 얼마나 뛰어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성경공부 고민

요즘 성경공부를 하면서 느끼는건,
내 설명이 너무 많아지고 길어진다는 거다. ㅠㅠ

예전에 성경공부를 할때엔 나는 거의 사회만 보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주로 내용으로 해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던 경험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하는 성경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뭔가 질문을 하면 사람들이 잠잠하고…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설명을 길~게 풀어내는 일들이 많다.

왜 그럴까?

우선, 요즘 하는 성경공부는 내가 10년쯤 전에 했던 성경공부보다 더 내용이 어렵다.
요즘은 꽤 깊이있는 신학적 내용들을 다루어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흔히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보는 방식으로 본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여하는 사람들로부터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내가 말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성경공부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많이 했다면 요즘은 성경공부의 내용에 대한 준비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미리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좋은 질문들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이 길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더 깊이있는 신학적,성서학적 내용을 다루려고 노력하다보니 나도 내용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빡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성경공부 인도 자체에 대한 준비 보다는 내용 준비, 어쩌면 나 스스로 공부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고 있다.

또,
예전보다 순발력이 더 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빠릿빠릿하게 눈치를 채고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코멘트나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자꾸 내가 그냥 설명으로 채워버리는…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지나치게 커져서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꼭 다루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