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떨어져 있고, 몇년씩 만나지도 못하지만,
가끔 한번씩 생각이 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나름대로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냥… 시간이 지나서 이젠 관계가 멀어졌다고 생각할거다. 뭐 가깝게 자주 만나지 못하니 관계가 그렇게 가깝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 얼마전, 내가 참 좋아하는 선배님 한분이 내 동생의 건강을 물어보셨다.
그분은 내 동생을 그냥 얼굴정도 아는 수준으로 알고 계실텐데…
형수님과 함께 매일 내 동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분은 허투루 말을 하는 분이 아니시고,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그렇게 하고 계신거다.
아… 그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계시구나. 참 감사했다. - 나는 한편, 교회를 다니면서 실망을 한적이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가면, 목사님을 비롯해서 교회 지도자들이나 사람들이 나를 ‘resoure’로만 생각을 하고,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정말 진정으로 나를 위해주고,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했던 우리교회 목사님을 가졌던 것은… 아마 보스턴에서 개척교회를 했을때니까… 아주 오래전이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분이 나를 위해서 깊이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나마 이제 그 목사님과의 연락도 끊어진지 좀 되었고, 그 목사님도 이제는 나를 거의 잊지 않으셨을까 싶다.
나를 활용할 resouce로 생각하지 않고, 돌보아야 할 사람, 서로 그렇게 돌보면서 살아야할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여겼던 기독교 공동체는… 역시 보스턴에서 학생일때 했던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거기 나보다 약간 더 나이가 위이신 분들이 나와 우리 가족을 그야말로 ‘care’하셨던 것이 정말 기억난다.
그나마 그분들과도 이제는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 가끔은…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의 기도가 나를 지켜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그래도 정기적/부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 처럼,
이제는 연락도 잘 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정기적/부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건 그런 기도 덕이 아니겠나. - 기도해야겠다.
Month: September 2024
장로는 아마 못될 듯
내가 집사가 되었을때가 29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에서 갑자기 집사가 되라고 하셨는데…
음… 나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뭐 딱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ㅠㅠ
1년동안 제직회도 가고 뭐 집사가 해야하는 아주 최소한의 것들을 했고,
대신 나는 교회에서 시키지 않은 일들을 열심히 했다.
괜히 성경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1년 후,
나처럼 이렇게 교회 system에서 성실하게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집사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집사로서 교회의 system에 봉사하는 것은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집사직을 반납(?)했다.
집사로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집사 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께는 엄청 미움받았다. ㅠㅠ
그 이후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 어디서도 그 교회의 집사로 정식으로 다시 임명되어 일한적이 없다.
내 생각엔…
웬만해선 다시 집사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장로는 더더군다나 평생 못될 것 같다. ^^
교회에서 성실하게 집사와 장로로 섬기는 분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한’ 환대 (6)
나는 환대가 참 좋다.
내가 환대를 받으면 정말 따뜻하다고 느낀다.
나도 그렇게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나같이 마음이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에게 환대는 매우 필요한 가치와 자세일 것 같다.
그렇지만
때로 환대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의 공동체라는 말이 환대의 공동체라는 말로 치환되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이 서로를 환대하라는 말로 치환되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환대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치환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때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여된 것은
환대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불편한’ 환대 (5)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nice’ 한것은 예절 혹은 문화의 영역이다.
Stanley Hauerwas가 미국의 어떤 특정 교단의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비꼰적이 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nice하다고 믿습니다.” God is nice.
그런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그분의 은혜가 크고, 그분의 헤세드 (loving-kindness)는 그분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nice한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nice하지 않을때도 많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독선적이라고 느껴질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다.
우리를 하나님과 동급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겠지만,
기독교의 문화가 뻔지르르한 niceness로 정의된다면 그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기 보다는 그 공간을 허물어버리는 일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과정은 nice하지도 않고, 환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불편한’ 환대 (4)
두번째로,
환대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가령,
노예 해방 이전, 미국 남부의 southern hospitality (남부의 환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에게 잔인하게 대하거나 최소한 정의롭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들끼리 거하게 음식을 나누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문화가 있었다.
나는 모든 미국 남부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모든 미국 남부의 southern hospitality가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환대는 그 뒷면에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나 가식이나 정의롭지 못함이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불편한’ 환대 (3)
내게 환대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환대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환대는 일종의 사람간의 좋은 관계를 위한 social skill에 머무를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비해 훨씬 더 낮은 단계에서 머무르는것이 가능한 개념이다.
폭력성, 전투성, 배타성의 정서에는 그것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급진적인 무엇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미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우리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있다고.
그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실만큼 그분의 사랑은 크고 급진적이라고.
폭력성, 전투성, 배타성은 그 사람들이 환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불편한’ 환대 (2)
나는 그분들이 왜 그렇게 환대를 이야기하는지 이해한다. (적어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 한국과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의 전투성, 배타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전투적이고 배타적이기 보다는 친절하고 포용적인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었을 것 같다.
나도 동의한다.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보수 기독교는 정말 매력없다. ㅠㅠ
그리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도 아닌 것 같다.
자신들의 ‘신념’ (나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신념이라고 생각한다)에 맞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지 말고 다 좀 친절하게 하자는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다. 그 사람들은 잘 듣지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환대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하다.
그런데,
내 질문은 이것이다. 그것에 대한 반대로 ‘환대’를 이야기해야 했을까?
정말 환대라는 가치가 지금 상황에 대한 해결책일까?
내가 환대라는 가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는 있으나,
나는 폭력성, 배타성, 전투성의 반대로 환대를 잡은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폭력, 전투, 배타성의 반대는 환대가 아니라 사랑이다.
환대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환대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편한’ 환대 (1)
환대의 영어단어인 hospitality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the friendly and generous reception and entertainment of guests, visitors, or strangers.
한국어 사전으로도 역시 비슷한 뜻이다.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함.
당연히 엄청 좋은 말이다. 환대가 넘치는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한 10년정도 되었을까…
기독교 써클에서, 특히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 ‘환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기독교 비주류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더 젊은 복음주의 계열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내가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그런 분들이다.
아직도 내게 소중한 책들
주말에 오래된 책들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한곳에 처박혀있는 책들을 발견했는데, 그중에는 내가 대학생때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던 기독교 서적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생때 읽었던, 그래서 내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그러나 한동안 잊혀졌던 책들 몇권이 떠올랐다.
그 리스트는 대충 다음과 같다.
- 로렌 커닝햄, 네 신을 벗으라
-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제자입니까
- 양승훈,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
- 박영선, 하나님의 열심
- 리처드 웜브란트,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새장밖을 벗어난 새 이던가…. 빨간 표지의 묵상집)
아마 내가 새 책을 읽는다면 이런 류의 책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들의 내용은 아직도 내게 소중한 신앙의 자산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Barmen Declaration
1934년 나찌 히틀러의 광기 속에서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했던 선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한다.
-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계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가령 세속의 권력과 같은)
- 예수 그리스만이 모든 영역에서의 주가 되신다. 다른 어떤 권세도 없다.
- 교회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흔들려서는 안된다.
- 교회는 리더(Führer)에 의해서 지배당해서는 안된다. 교회에는 hierarchy가 없다.
- 국가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고, 교회는 국가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 Barmen선언은 교회가 국가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말씀과 성령이 교회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이 선언이 지금 바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혹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행태는 몹시 역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