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6)

박 선배님,

그렇지만 저는 예전처럼 그렇게 강력한 반고지론자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이들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전하는 논리의 완벽함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반지성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지성주의적 관점에서 완벽한 논리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제가 이렇게 선배님께 편지를 쓰지만, 제 생각에도 분명히 헛점이 있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님의 반론도 기대해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사리분별을 하고, 논리적 사고를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완벽할수는 없다는 겸손함을 계속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가 소위 ‘고지론’ 메시지에 헌신했다고 이야기하는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이들의 대부분은 고지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 그저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며 피가 들끓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K 운동에서 여름 집회를 했을때, 오전에는 반고지론자 설교자가 서시고 저녁에는 고지론자 설교자가 서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대부분은 전혀 혼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이게 꼭 다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그 두개의 다른 message에 혼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critical thinking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한번에 고지론에 헌신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지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결국 인도되는 곳이 고지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헌신 이라면… 저는 그렇게 헌신의 통로로서 열정을 가진 이가 고지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건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 아닙니까.

셋째, 그 고지론을 말씀하시는 ‘원조 목사님’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젊은 학생들이 그분의 좋은 점을 많이 닮았으면 합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자신이 믿는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시는 모습을 보면 깊이 존경심이 듭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젊은 학생들을 향한 passion은 늘 제 마음도 뭉클하게 만듭니다. 

그분의 동기에대해 저는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가진 참 소중한 보배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아주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고지론을 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의 실력과 위치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제 생각과 논리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헛점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세번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선한 양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주장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기대를 갖습니다.

제 주장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 후배들에게 요즘 가끔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진심으로 고지론을 용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좀 과해서… 하지만 이것이 제게는 제일 적절한 표현입니다. 한동안 고지론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심에 쌓여있던 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박 선배님,

괜히 제 글이 지루하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님께서 혹시 기분나쁘게 읽으시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면, 선배님의 말씀을, 차 한잔 앞에두고 찬찬히 좀 듣고 싶습니다.

제게도 생각의 구멍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배님도 저도…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동창생 아닙니까.

주안에서,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

3 thoughts on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6)”

  1. 간사님. 제가 편지를 받는 대상은 아니지만 간사님의 글을 읽어오던 중 말씀드리고 싶은 바가 있어 이렇게 글 남깁니다. 저는 고지론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지 않기때문에 고지론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 간사님 글에서 조금 불편했던 몇가지를 말해도 될까요? 되겠지요? ^^;

    첫째, 고지론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간사님께서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선택을 고지로 생각하시는지 아닌지의 예보다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들어 반박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는 조금 다른 목적을 이루러 이땅에 오셨고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 고지에 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살기위해 그런 고지가 반드시 필요한것이 아니란 점에서 저도 고지론을 반대합니다만, 사람들이 고지에 서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뜻에서 고지에 선 사람은 칭찬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고지에 서지 않았을때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냐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간사님의 예를 든다면 지금 계신 곳이 다른 사람 눈에는 고지가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고지로 느끼고 자족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저는 박수를 쳤을 것 같아요. 
    셋째, 간사님께서는 이미 선택을 하실 수 있으신 만큼의 유리한 고지에 서 계십니다. 마치 ‘내려놓아서’ 박수를 받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 내려놓을 위치에까지도 가본적도 없고 가지도 못하지만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고지론을 비판할 더 큰 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고지론이 비판 받으면서 ‘내려놓음’이 예수님의 삶과 더 맞다고 각광받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낍니다. 100%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70%만 쓰고 있다면 그것이 왜 박수를 받아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글로 남겨도 될까 고민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드러내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같아 부족한 생각을 조금 적어보았습니다. 솔직한 글들 후배들과 소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아주 한글자 한글자 정확한 지적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내일 ‘추신’의 형식으로 한번 더 쓸 예정인데요… ㅎㅎ
      내일 쓰신 내용이 이 물어보신 것에 대한 답변이 좀 될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좀 써보자면요,

      1.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고지론 비판은 이미 많은 곳에서 이미 이루어 졌으므로 객관적인 접근 보다는 주관적 접근을 통해서 썰을 좀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고지론자도 반고지론자도 모두 자신의 주장을 support 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2. 고지가 아니어도 자족하는 것이 칭찬받아야할 훌륭한 가치인 것이 정말 맞습니다. 적어도 내가 처한 위치가 내게는 고지이다 라도 생각한다면 그것도 멋지고요.
      그것은 제가 5번 글에서 쓴 첫번째 입장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언급한 두번째 길을 선택하여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어쩌면 훨씬 많은 사람들은 케이뒤가 이야기한대로 자신이 이미 처한 위치에 자족하면서 감사하는 삶이 아주 큰 의미를 주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제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이 두번째 길인 것으로 인식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 자족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길을 향해 모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3. 제가 이미 고지에 있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동기 가운데 하나도요… 고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막상 자신은 애매한 수준의 고지에 있으면서 그래서 고지에 있는 사람들만이 겪는 경험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펴는 것에 대해 제 이야기기를 통해서 제 주장을 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고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고지론을 비판할 수 있는 strong point가 물론 있지만, 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지론 비판 역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100% 능력이 아닌 70%의 능력만을 사용하는 것이 박수를 받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100%의 능력을 고지를 정복하는데 사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가치를 삶에서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용하는지 하는 것을 바탕으로 judge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사실 오늘의 이 글이 이 편지를 통해서 제일 하고 싶은 내용이었습니다.
      앞의 내용들은 고지론자들에게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오늘의 이 글은 반고지론자들에게 고지론자들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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